[스크랩] 제3장 예배의 대상(중심) /김영익 교수
제3장 예배의 대상(중심)
(사도행전 17:24-25)
예배란 마땅히 드릴 자에게 드려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받을 수가 없는 어떤 대상을 만들어 놓고 무조건 정성만 쏟으면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소요리문답 1조)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예배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자는 자신의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면 알수록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될 때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예배의 모습을 스스로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1. 창조주 하나님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경외와 봉사와 생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먼저 나의 예배와 섬김을 받으실 분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할 자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의라는 것이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지으신 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라는 사실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목적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대 아테네 지역을 돌아다닐 때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말하기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집)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조성자시요, 주인 이시요,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것이고 우상을 섬기듯이 그런 방식으로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예배는 오직 천지의 주재자만 받으셔야 할 것이며 그는 분명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며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면 거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자신들의 종교성에 의하여 종교예식을 행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악하고 불경건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사의 저자 오스카 하드만(Oscar Hardman)의 말대로 예배란 지극히 높은 가치에 대한 피조물적인 자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가치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알고 자신이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예배는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2:20절 이하를 읽어봅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계속하여 25절에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마땅히 경배할 자로 알아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상을 섬기고 따라서 많은 윤리적 부패와 불경건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합당한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마땅히 예배를 드려야 하는 피조물인 것을 깊이 자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각성이 있다면 어찌 감히 하나님 예배를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경거망동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돌보심)하시나이까? 많은 피조물들 속에서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본다면 이러한 진정한 자기 성찰과 아울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칭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품성)이나 존재하심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이라는 명칭은 주를 의미하며 대체로 위엄과 권위를 표현하고 하나님은 우주 위에 위엄과 권위의 대주재 이심을 뜻하고 이에 따르는 {엘로힘}은 강하고 유력한 경외의 대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하나님은 창조주와 통치주 이심을 가리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도나이}(주)라고 불렀던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다스리신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모든 것의 굴복을 받으시며 사람을 종으로 가지시는 자이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권능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며 그의 나라를 이 땅에 두시고 그의 백성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존귀하신 어른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하나님 앞에 인간들은 다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듯이 그들의 예배는 바알 숭배와 같은 위복 사상의 제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출발되는 예배하고 일반종교의 기복주의적인 의식행위와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자도 될 수 있는 반면에 피조물을 섬기는 우매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기고 다만 그를 경배하지 않는 것은 피조물의 주권이 창조주의 주권보다 큰 곳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창조는 신적 계시의 시작과 기초이며 모든 윤리적 종교적 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느헤미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송영하기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 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 경배하나이다'(느 9:6)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재자이시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또 보존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로서도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존재들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여기에 거룩하신 나라를 건설하시고 경영하여 나가시는 일을 보고 경배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예배도 이교도들의 다신론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인위적이며, 순간적 표현방식의 예식과는 달리 유일신론적이며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엄격한 구분에서 오는 윤리적, 인격적 복종과 모든 일을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순응과 원칙적으로 통일된 표현방식에 의한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창조적 신앙이 없는 곳에는 다신론과 범신론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 창조주 신앙이 확실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배자의 영역, 태도, 대상, 그리고 예배자와의 관계를 훌륭하게 묘사하여주고 있음을 봅니다. 시인은 먼저 '온땅이여'라고 함으로서 예배의 영역을 확장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 모든 우주 만물, 삼라만상을 통하여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특별한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절)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께서는 목자처럼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데 그 통치하시는 통치의 성격은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5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근거는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뒤따라오는 통치자와 백성,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과 이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응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맥스웰(W.D. Maxwell)도 이 점을 동감하여 '우리의 예배는 창조주시요 모든 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충성하는 데 그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 구원의 하나님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2). 인간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 생각도 허망하여지고 마음도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서 특별히 정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이 땅에 두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영혼들은 하나님을 섬기고자하는 소원과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앞에 예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예배를 받으실 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에 감사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나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베푸신 크신 사랑에 대한 인간적 표현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음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아울러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되어졌다는 사실은 더욱 그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제사는 속죄적 성격과 아울러 감사의 예배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들이 드리는 물질들은 감사와 예물의 표가 되었으며 그 은혜에 대한 헌신의 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원되어진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삶을 예배에다 중심점을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배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귀찮은 것이나 형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공리적 심사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예배자의 관심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구원의 확신은 말하여도 예배의 기쁨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는 아닌지요?
우리의 예배생활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속에는 반드시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나의 예배생활 속에 감사와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생활의 위기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 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1). "그에게 가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하나님의 구원은 예배자의 무한한 기쁨이 되며 심적 동기가 됩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하).
3. 영이신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창조, 보존, 구원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앞서 보았으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존재형식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 하시느냐에 따라 우리의 예배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어떤 우상과 같은 형식으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예배도 마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처럼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들의 신관이나 신 지식의 수준 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계시에 따라 얼마나 바르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예배의 차원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그의 존재하심, 또한 사역들을 알고 전심으로 그 앞에 엎드릴 때 예배는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아론에 의하여 주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사건은 바로 이 점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숭배하기는 해야겠는데 그들의 신관은 저조하여 자기들이 보아왔던 애굽의 표현방식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우상(금송아지 형태의 아피스)을 만들어 거기에다가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신 여호와라는 이스라엘적 신 개념을 집어넣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냈다고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사실들을 많이 경험하고 감격하여 그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그가 금새 하나님을 정당하게 섬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듯이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숭배 심리가 자신들의 공리심사와 깊숙히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좋을 때는 서둘러서 자기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행위는 창조주와의 관계에 의한 것이나 하나님의 존재형식에 대한 깊은 인식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현실적 유익과 혜택과 깊이 관련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감과 정열, 종교적 감정이 넘치는 이방의 우상숭배에 의하여 항상 영향을 받아 왔고 때로 거기에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생활 도중에 발람의 책략으로 우상의 제전에 나아가 타락했던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을 알고 섬긴다면 그러한 기복주의적인 촉감으로 날뛰는 낮은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가와 아울러 하나님은 어떤 분이 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전자의 감정은 후자의 지식에 의하여 통제되고 인도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표현방식이 지극히 유치한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형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신자들의 제일로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이 신 분으로 대우해 드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세안심 내세복락을 위하여 존재하는 분이나 되는 것처럼 비좁은 신 지식을 가지고 기독교가 운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주의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위치한 유치한 형태의 기독교입니다. 이러한 심사는 이스라엘 전 역사 과정에 뿌리 깊히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원인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긴 역사적 배경을 안고 그들의 심리를 잘 반영하여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하느냐 그리심 산에서 드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심 산은 일찍이 모세 시대에 축복의 산으로 부각되면서(신 11:29) 포로 후 사마리아 지역의 성소로 인정되어졌는데 이 때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사이는 심한 불화가 있었고 특히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딸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마나세가 결혼을 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마나세가 산발랏의 딸과 이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방하여 버리므로 산발랏은 마나세를 맞아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그를 대제사장으로 취임시켰습니다. 이때부터 그리심산 예배는 예루살렘 예배와 경쟁적인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처소를 주님께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주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23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배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되어진 이유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이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정신과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이 되어집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가견적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성격 때문에 그 시대에 있어서는 장소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지만 실은 미래의 실체를 내다보며 똑같은 다른 자세로 지향되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경륜상 구약 경륜의 때가 아니고 보다 신령한 실체의 시대가 도래하였으므로 예배에 있어서도 그 실체에 따른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예배는 상당한 제한적 현상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 영적 요소를 강화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가 바른 영적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을 전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다른 존재나 사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지신 분 이심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적 존재 속성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의 전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시며 어디에나 계시며 예배자의 마음의 자세를 다 살피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영이신 분으로 깨닫는다면 훨씬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영이신 하나님만 받으실 수 있으며 영이신 하나님을 가시화 하려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4. 예배와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9:12)
우리는 구약시대의 제사 의식에서 나타나는 특징 한 가지가 희생 제사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속죄의 큰 원칙은 "생명이 생명을 대속한다"(레 17:11)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죽음엔 죽음으로 대가를 치루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히 9:22하).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죄로 말미암아 죽어버린 영혼들이 다시 살기 위하여서는 그만한 효력을 낼 수 있는 가치의 생명이 대신 죽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구약 경륜 하에서는 이러한 실체의 사실에 대한 상징과 모양의 성격을 띠고 동물이 인간의 죽음을 대신 하는 제물이 된 것입니다.
이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은 화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이렇게 화해적이며 대속적인 영적 의미를 가지고 시행되었습니다. 희생되는 짐승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보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치 다리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수없이 희생된 짐승들은 하나의 모형이었고 그 실체는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그 실체의 사실을 확실히 모르고 행하였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일을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려 나아가는 것은 아무라도 나아가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그 상태 그대로를 가지고 나아간다고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 갈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주실만한 경계(위치)를 갖추어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성결하다는 판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
인인 사람이 감히 나설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서(그것도 그 거룩하신 광채의 한 부분이겠지만) 하는 말이 "화로다 나야 망하게 되었다"라고 했는데 이렇게 우리 인간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 길을 여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신 후 즉시로 처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이요, 계속해서 주께서 우리의 중보가 되신 터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결정적인 기초를 마련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올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예배가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10-11절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하고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실이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하). 주께서는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전구속사의 마지막 시기에 오셔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 근거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예수님의 중보 사역에 의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심에 의지하지 않고 예배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예배 자들은 나 혼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몸에 참여하여 주님의 거룩한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의식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심정이 항상 있어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아무런 생각 없이 막연히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예배를 참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경망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 마음에 주님을 의지하는 간절한 심정이 없이 하나님께 나를 드리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없이 그냥 참석하여 그저 함께 따라 진행되는 예배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배의 습관이 계속되는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이 그의 영혼에게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역동적이며 살아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실에 항상 의지하고 감사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있어서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보이는 말씀으로서의 귀중한 예식을 우리 주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바로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배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요소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 거룩하신 죽으심과 사심을 근거로 하여 주님의 몸에 참여하였다는 사실과 그 이유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누리게 되는 사실들을 나타내줍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매 번의 예배 시마다 언제나 꼭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그 정신만은 예배 속에 항상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모든 회중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한 형제로서의 공동의 예배를 가능하게 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언약 공동체요 부활공동체로서의 예배의 공동성을 바로 성례전이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학자 맥스웰도 이러한 예배의 원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성례예배라고 하면서 성례예배는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적절한 예배이다고 극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제물만 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자신이 그 제물을 들고 성소에 들어 가신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대제사장 역시 구약제사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중보 자였습니다. 백성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온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를 받았고 속죄의 제사가 아닌 감사의 제사나 헌신의 제사도 제사장의 중보가 기초가 되어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실체요 진정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우리 주님의 중보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갔고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중보자로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구약 백성들이 제사장 없이 제사에 설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없이 예배에 나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는 예배적 생애입니다. 그는 예배의 삶을 사셨고 예배의 기초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예배에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의지하여(제사장은 사제가 아님) 항상 우리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에 예수님과 관련하여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드릴 때 그 자리에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사실상 주님께서는 탄생하신 때부터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주께서는 대권을 가지시고 온 세상을 그 앞에 굴복시키시고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는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7:16)이시요, 우리는 그에 합당한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5. 예배와 성령님
성령님께서는 성부, 성자와 아울러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께도 찬송과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예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계십니다. 특히 성령님께서는 기독교의 공동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데 성령님께서는 교회의 공적 예배의 동일성을 가져다 주십니다. 공적인 예배는 다같이 같은 심정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성령님께서 각자의 마음을 주장하심으로 이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0:7절에 "그들이 매주일 첫째 날에 함께 모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성령님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내적 인도로 함께 모여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그렸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통일(unity)은 그 속에 영적 자유가 내포된 통일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림에 있어서 영적 자유를 가지고 드린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제도나 의식에 구애됨이 없이 혹은 의무감이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이며, 기쁨이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통치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채비를 갖추고 즐거움과 기꺼움이 솟아올라 예배를 위하여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기능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예배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종교제도주의의 노예가 된다든지, 자신에게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의 다스림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영적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우리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신(엡 4:3 참고) 사실은 기독교의 엉적 자유와 통일을 가르쳐주는 좋은 구절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예배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적 자유는 자발적이고 즐거움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통일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각자의 마음을 함께 다스리심으로 하나로 묶어 주시고 일치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연합과 통일이 있는 법인데 우리의 공동의 예배에는 이러한 영적 자유와 영적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배를 위하여 성령님의 인도와 그 통일케 하심과 자유케 하심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예배는 성령님으로 시작해서 성령님으로 마쳐야 합니다. 레이몬드 압바(Abba)의 말대로 참된 예배는 다만 성령님의 활동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고, 봉사할 때에도 성령님 안에서 봉사하라(빌 3:3)고 했고, 찬송할 때에도 성령님 안에서 부르라(엡 5:18)고 하였으며, 연보할 때에도 성령님의 자유 안에서 할 때 항상 유쾌하고 풍부한 연보가 된다(고후 9:7)고 가르칩니다. 물론 성령님의 협력으로 말씀도 전하고 들을 때(고전 2:1-16) 효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철저히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령님과 함께, 성령님을 의지하여 드려져야 합니다. 생명 없는 의식과 제도주의로 드려서도 안되고 아무런 생각 없이 참여해서도 안됩니다. 성령님의 영적 자유를 구해야 합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성령님으로 예배를 드린다하여 준비 없는 즉흥적인 기도가 미리 짜여지고 준비된 기도보다 더욱 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또한 예배가 순서적이며 의례적일 때는 형식적인 예배가 되고 계획없이, 순서없이 드릴 때 그 예배는 엉적인 예배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많은 준비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물론 성령님의 감동을 우리가 제한하지 말아야 하지만 무계획과 무질서가 항상 성령님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4:32, 40 참고). 우리의 예배는 회중들의 마음과 전체 속에 감도는 경외감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헌신의 눈빛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이 가득하며 즐거움과 평강이 지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령님의 다스림이 각자 가운데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 예배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1)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예배의 유일하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배 중에 경배 받기에 합당한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시고 응답하실 때에 자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새롭게 늘 드러내셔서 우리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관념이나 생활철학이나 형이상학 가운데 등장하는 만날수 없는 초월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인격이시며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할 때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2)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는 예배의 전 부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고 계심을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항상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 되시며,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밖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직 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3)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
성령은 예배의 원동력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깊이 아시는 분은 성령뿐이십니다.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통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에는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은 예배 중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성도는 성령의 끈임 없는 역사와 인도하심을 따라서 변화 받게 되며,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인 예배를 진행시키며, 주관하는 원동력은 성령인 것입니다.
<과 제 >
1.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진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