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4장 예배의 목적 /김영익 교수
제4장 예배의 목적
예배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마음의 경계를 가지고 하나님 어전에 나아가 절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배를 어디에 그 목적을 두고 하느냐?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 예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목적이 변하여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여질 때 그것은 예배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심각하게 반성하여야 할 문제가 있는데 예배가 사람의 목적을 위하여 오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타락은 항상 이러한 조그마한 문제에서부터 예를 들면 찬송 한 장 부르는 일, 일상적으로 기도드리는 일 등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일은 한 번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가 마음을 기울여서 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제쳐놓고라도 사람의 목적 혹은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고 있다는 데에 문제는 심각합니다.
마틴 루터는 예배는 '죄인의 개종' 또는 '회중의 교육'이 그 목적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의견은 건전한 이야기이지만 예배의 목적을 바르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예배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목적 자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러한 예배순서(찬송, 기도, 헌상, 죄인 회개, 교육 등) 하나 하나와는 구별되는 예배 자체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예배의 목적이 되거나 예배 전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경건주의 자들은 '성도의 교제'가 예배의 목적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역시 예배의 기능 혹은 그 결과일 수는 있지만 목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교통이 없는 예배는 사실상 올바른 공동예배가 될 수는 없지만 예배가 교통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연합이 뚜렷하여 공적예배를 드릴 때 예배는 예배로서의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 슐라이에르 마허 계통의 사람들은 예배를 자신의 종교적 감정의 표현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현대 기독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배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그 인식에서 오는 지적감정과 의지적 발휘 전체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지 예배의 대상과 관계없이 자신의 경건한 감정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표현하면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사상에는 계시 대한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계시란 자신들의 주관적 느낌 혹은 직관 및 종교적 내적 경험이기 때문에 성경계시를 소홀히 하여 버립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 역시 자신들의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 사람들이 교리주의의 메마름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에 따른 정당한 경외심과 경건한 심정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을 드리는 자세로 드리되 그 목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하나님 예배는 자기 만족이나 성취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현저합니다. 예를 든다면 종교 감정주의자들의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결핍되어 있거나 성경의 한 부분을 취하고 나아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들은 감정주의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합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감정운동은 올바른 인식의 터전이 빈약한 신앙의 무질서를 초래합니다. 대부분의 감정운동의 사람들은 그것의 촉진제가 되는 신비운동을 끌어들입니다. 실질 상으로는 성경적 수준의 신비도 아니지만 그와 유사하게 하기 위하여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그 일을 위하여 수단을 동원합니다. 요즈음 그래서 아이디어 그룹과 그것을 모방하는 이미테이션 그룹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적 사역과 사람의 모방으로 만들어내는 흉내들 하고 구별해 내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 예배는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침해를 당하며 위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 찬송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목적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부추기고 들뜨게 하는 노래를 즐겨 선택하여 반복하여 부르게 하고 종교적 감흥에 휩싸이게는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서의 성격은 상실시켜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향이 하나님보다는 나의 느낌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명료한 각성과 책임 있는 그리고 기도하는 영역이 갈수록 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로 확대되어 나아가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할텐데 무조건 많이만 하면,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으시느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공적이 되고 성황당에 돌무덤이 늘어나듯 많이만 하면, 오래하고, 힘써서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기도에 대한 성경적 지식의 결핍은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중언부언의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종교적 자기 수양과 포만감과 기쁨은 줄지 몰라도 열매맺는 일에, 능력이 공급되는 기도로서는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무모한 열심이 하나님 예배를 해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일도 바른 깨달음을 통하여 은혜가 임하고 그 은혜는 깊은 감동을 주고 삶을 태동시키는 것인데 감정 운동가들은 감정을 돋구거나 위무하여 청중들의 정당한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제는 감정을 유도하는 웅변적 기술이나 테크닉, 제스춰, 심리적 응용을 초월할 줄 아는 성숙한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수단들은 성숙한 예배로 나아가는데 많은 저해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정치예배라는 것입니다. 1967년 베를린의 한 교회에서 진행된 성탄 자정예배에서 젊은이들이 궐기 운동을 한데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월남전 반대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번져 폭력 교란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상 이런 것은 하나님 예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예배를 변조한 여로보암의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정치적 예배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정보와 명상과 토론과 행동입니다. 정보를 통하여 정치적 의지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에 맞는 성경의 명상, 기도, 노래, 경험의 대화를 나눈 후에 사회적 여건의 개혁을 위한 행동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적 예배운동은 카톨릭의 스테펜스키(F. Steffensky)에 의하여 인도되었으며 그것은 독일, 폴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신학을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만들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목적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을 충족 시키려는 것이나 덕성함양을 통한 아름다운 사귐에 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떤 종교적 강론을 듣거나 교육적 효과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예배의 목적도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그의 백성들의 행위입니다. 칼빈 선생은 예배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종교를 인간의 열망이나 요구나 종교심의 기초가 되는 행복주의에서 이끌어 내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칼빈 선생은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다스려야 한다. 우리 자신이 예배를 다스는 자이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John. S. Whale가 칼빈 선생의 이 가르침을 확실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를 '예배는 원래 죄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은혜의 위로를 주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고백과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정하신 때에 구속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한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것을 하나님께 첨가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그 분의 영광을 위한 자가 되고 또 그분의 기쁨을 위하여 그분의 목전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자신의 기쁨을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그 형식에 있어서나 예술, 혹은 재료까지 전부 드리는 것이다'고 말한 R. M. 벤슨이라는 분의 말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는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어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나아갈 때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 하게 놓아야 하는 것이지 어떤 의식을 행하였다든지 참여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 드려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기 위하여서는 거기에 항상 붙어 따라다니는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요, 그 수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수준인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한 경계를 우리 마음과 자세로 갖추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벌써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계는 떠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40:6에 '주께서...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고 하였는데 예배 자들이 그 형식은 갖추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마음과 생활의 요소를 첨가하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신다(시 51:19)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데에 의미가 있고 예배자는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기 위하여 잘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먼저 우리는 예배의 목적을 분명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 과 제 >
1. 예배의 바른 목적을 쓰라
2. 예배의 잘 못된 목적을 진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