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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자살이 많았던 이유

낮은곳에 서서 2012. 1. 11. 12:30

김충렬 박사의 ‘살자’ (6) - ’지나친’ 신앙은 때로 우울증 불러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1.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유형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6. 자살의 역사적 이해-(3) 르네상스 시대

르네상스(Renaissance)는 일반적으로 중세에서 근세로 이르는 과도기라고 한다. 이 르네상스는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상징되지만, 본래는 재생이나 부활을 의미하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무엇의 부활이고 재생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대개는 자유로운 자연적 인간의 발전과 그리스·로마 시대 고전적 문화의 부흥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중세의 강력한 신 중심 권위로부터 속박된 인간성을 회복, 자연적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이 신의 권위에 의해 상실했던 자아(自我)를 각성하고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것이 르네상스를 인본주의 또는 휴머니즘과 같은 뜻으로 부르는 이유다. 이 시기 자살에 대한 시각을 그 특징에 따라 다음의 세 가지 관점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 “자살하면 지옥간다”

르네상스는 실로 오랫동안 신 중심이라는 중세의 그림자 속에 파묻혀 있던 인간의 이성이 자유롭게 날개를 달고 학술, 문예, 미술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자아에 눈뜬 시기다. 신의 권위에 억압돼 발휘되지 못하던 인간성이 일정한 한계를 넘어 자연스러운 인간성으로 점차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문예나 미술 뿐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 천문학 등 여러 자연과학적 발견, 자연철학, 그리고 이성을 통한 학문의 발전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신 중심의 권위를 말끔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영국에서는 10세기 말 에드가 왕이 자살한 사람을 절도범이나 다른 범죄자들과 동일하게 취급했고,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나무막대기에 묶어 거리에 세웠다. 이는 르네상스가 아직도 중세 신학의 영향권과 그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는 과도기적 특성 때문에 신 중심의 신학적 권위나 영향력이 그다지 감소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단테(Dante Alighienter)의 <신곡>에서 이것이 더 확고해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사상이다.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은 단테가 7일동안 하나님의 세계를 여행한 문학적 상상의 기록이다. 여행자 단테는 여행안내자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와 함께 지옥-연옥-천국으로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수백명의 신화상 혹은 역사상의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죄와 벌, 기다림과 구원에 관해 철학적, 윤리적 고찰을 할 뿐만 아니라 중세의 신학과 천문학적 세계관을 광범위하게 전하고 있다.

단테는 <신곡>을 쓰면서 자살한 사람을 지하 7층인 지옥의 7번째 원(圓)에 뒀다. 사탄이 지하 9층 밑에 있으니 사탄과 가까운 곳에 둬 자살을 정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테는 자살한 사람은 최후의 심판 후에도 부활할 수 없다고까지 역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단테가 <신곡>의 ‘지옥편(inferno)’에서 상상했던 지옥의 끔찍한 모습들은 훗날 프랑스 미술가 구스타프 도래(Gustave Dore)의 일러스트레이션에 잘 나타나 있다. 온통 어둡고 사악한 기운이 도는 가운데 머리와 다리가 잘려나가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 그곳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뚫고 자란 가시난 나뭇가지를 달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육신을 포기한 몸이므로, 최후의 심판 후에도 부활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단테의 사상이 엿보이는 대목일 것이다.

2) ‘삶의 초탈’로서의 자살

중세는 비교적 자살을 엄격히 통제하는 분위기였다. 신체적인 특성을 주로 들었다. 인간은 단지 사용권(usus)을 가지며, 하나님은 지배권(dominium)을 갖기에 가능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자살을 교의로 성문화시키고, 자살자를 법적으로나 관습에서 신성모독으로 간주해 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적 장례를 치를 수 없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엄격히 자살을 금지하고 방지하는 분위기에서 숨겨진 측면을 읽어내야 한다. 이렇게 교의로 성문화하면서까지 자살을 금지하는 것은 그 시대 자살자가 상당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이단으로 정죄되던 도나파의 경우, 기독교적 신앙을 맹신하게 만들어 순교적 유혹을 통한 자살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행동이 성화(聖化)돼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기만 한다면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면서 개인의 삶을 혐오할 정도로 기독교적 맹신을 추종하게 만들었다. 이교도들의 자살 외에도 신자들의 자살도 일어났다. 물론 각종 교회 회의를 통하여 이교도의 자살과 신자들의 자살이 현격히 감소하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자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당시 신자들의 자살은 주로 수도원에서 일어나곤 했다. 당시 불신앙인들이 야기한 분노에 따른 공포, 수많은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삶에의 혐오, 기독교적인 믿음으로 지상의 고통에 대한 구원을 찾기 위해 남성과 여성들이 수도원에 몰려들었다. 도나파 신도들이 기쁨과 환희로 죽음을 택한 것과는 달리, 수도원에서는 세상적 삶의 무료함에 대한 도피적 성격의 자살이 있었다.

우울, 은둔, 명상 위주의 생활, 금욕주의,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비관적 생각, 지옥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자살을 유발시키는 요인이었다. 그들은 최고의 미덕을 실천해야 하기에 세상이 주는 기쁨, 오락 등의 모든 인간적인 교류를 차단한 채 고요함 속에서만 살다 보니 우울증에 빠지거나 삶에 역겨움을 느껴 자살의 유혹을 더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승들의 자살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려는 병리적인 측면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수도원이 오히려 잦은 자살의 현장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자살은 개인 양심의 문제”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면 자살에 대한 틈이 약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12-13세기에는 자살이 마치 고대의 추억처럼 사회 각계 각층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이 시기에는 고대 문헌들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고대 이교도들처럼 자살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의 소설과 시에는 영웅과 미인들의 영예나 사랑이 의도된 죽음으로 끝나는 일화들이 다수 수록돼 있다. 이 시기에는 자살에 대해 문학 영역에서 미화시키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니라 해도 상당히 영향력있는 인물들이 그런 입장을 취해서 이뤄진 측면이 없지 않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몽테뉴(Michel Eyguem de Montaigne)가 대표적이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Utopia)>에서 고통이나 치료될 수 없는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을 허용하는 것처럼 표현했다. 이런 입장은 물론 작품의 특성이 풍자적이고 환상적인 경향 때문에 그 진위에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몽테뉴는 <수상록(Essias)>에서는 자살 사례와 자살을 칭송한 로마 작가들의 글을 인용한다. 그의 의도는 자살을 개인의 판단이나 양심의 문제로 생각하자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지만, 부분적이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자살이 사회에서 허용하거나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부분적으로 자살에 대한 정당성이 제기됐던 것으로 봐야 한다.

지나친 ‘신앙’의 강조,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살을 돌아보면 우리 시대의 자살과 관련하여 신앙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될 점이 있다. 그것은 생명과 삶의 역설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자칫하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도한 금욕이나 세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 그리고 자기 희생의 순교까지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금욕은 수도원적인 음침함과 부적절한 금식, 고독 등을 낳고, 결국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너무 심한 절제로 정신이 혼란스러울 수 있고, 정신 기능이 약화돼 판단력과 행동력이 심각하게 약화된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은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지나치게 구분하는 흑백논리적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세상적인 것을 모두 부정적으로 볼 때 세상이 주는 기쁨이나 오락 등의 인간적인 교류를 차단하게 돼 고독해지거나 고립되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상태는 그대로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지나친 자기희생적 봉사나 순교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실제로 순교는 하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인식돼 있지만, 이는 종종 이단에서 오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는 이교도들이 순교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도나파의 경우 군중과 사제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이방인들이 믿는 신전을 더럽히고 그들의 축제를 무례하게 망치기도 했으며, 여행자들의 갈 길을 가로막고 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순교할 것을 강요했다.

이런 특성들은 모두 흘러간 시대적 흐름이기에 오늘날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들을 차단해야 한다는 점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수도원 자살’에서 보듯 기독교 신앙이 세상적인 측면을 넘어 지나치게 영적인 측면을 강조해 진정한 행복, 영원한 영광은 이 세상의 삶 너머에 있다고 가르치면, 무의식적으로 자살로 유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한국상담치료연구소: 02-2202-3193, www.kocpt.com
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출처 : 행복†충전소
글쓴이 : 擔任牧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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