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0대가 아프다] “아이팟을 함께 묻어주세요” 14살 다훈이의 마지막
[10대가 아프다]
“아이팟을 함께 묻어주세요” 14살 다훈이의 마지막
경향신문|류인하·박효재·이혜인·이재덕기자
중학교 2년생 다훈이(14·가명)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 잘 하고 부모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성적이 오르면 엄마 얼굴은 밝아졌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차가워졌다. 다훈이는 자기 만족보다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가족은 다훈이가 외고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중 1 때부터 성적이 좋아야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훈이의 희망과 학교생활, 친구 관계에는 무관심했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워버렸다.
부모의 뜻을 거스를 생각도, 용기도 없었다. 외고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영어학원을 다녔다. 영어원서도 열심히 읽었다. 중 1 땐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가족은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전교 1등도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다훈이의 공부방은 영어와 제2 외국어 대비용 독일어 참고서로 가득찼다.
2학년 1학기 성적이 반에서 하위 30%로 곤두박질쳤다. 시험 2~3주 전부터는 새벽까지 공부했다. EBS 교육프로그램을 시청하고, 학원에 열심히 다녔다.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과외도 했지만 한 번 떨어진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1학기 때까지 수학·영어 이동식 수업 중급반 수업을 들었던 다훈이는 2학기엔 하급반으로 내려갔다.
성적이 떨어지자 주위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순위가 떨어진 성적표를 가져간 날 다훈이는 심한 말을 들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단지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는 가족의 태도는 더 견디기 어려웠다.
학교는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만 신경썼다. 학교에 오래 남아있기 싫어 방과 후 수업인 ‘또래학습’에 불참하겠다고 했지만 관심을 갖는 선생님은 없었다. 한 선생님은 “공부 못하는 애를 굳이 남겨서 가르친다고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교문 앞에 걸린 ‘△△과학고 XXX 합격’ ‘△△외고 XXX 합격 축하’라는 플래카드와, ‘지금 눈 감으면 미래의 눈도 감긴다’며 공부를 다그치는 듯한 급훈은 매일 다훈이를 괴롭혔다.
의지할 것은 아이팟 밖에 없었다. 음악을 들으면 마음의 상처를 잊을 수 있었다. 아이팟은 공부 하라고 다그치지도 않았고 공부 못 한다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가족보다 친구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다훈이는 절망했다. 수업 도중 “나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라고 말했다. 옆자리 친구는 웃으며 “그래 떨어져봐”라고 했다. “나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여기 말고 미국 가서 살고 싶어. 스티브 잡스를 만나고 싶어”라고도 말했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세상을 향한 비판도 쏟아냈다. “우리나라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른들이 자녀에게 공부를 첫번째로 강요해서야. 다른 것 말고 공부만 강요하니 학생들은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인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훈이의 ‘애절한 신호’는 누구에게도 접수되지 않았다.
다훈이는 어느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아이의 방 책상에는 A4용지 두 장짜리 유서가 놓여 있었다. 학생이 아니라 학생의 성적에만 관심을 보이는 가정과 사회와 학교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정말 죽어라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도 좋은 성적을 얻고 싶었는데 혼나기만 하니 내 자존심은 망가졌습니다. 교육만 강조하는 한국의 사회 구조는 잘못됐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교육 현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무조건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는 것이 싫습니다.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 사회를 떠나고 싶어요. 전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스티브 잡스를 만나러 먼저 갈게요. 부탁이 있습니다. 아이팟을 함께 묻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