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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童 김학철 신앙 칼럼

내 양은 어디 있느냐?

by 낮은곳에 서서 2019. 5. 5.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대형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가 크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모든 게 하나님 건데 하나님 교회가 째째하고 초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말이지 그건 교회 안에서의 그들의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밖에서 보게 되었다.

밖에서의 느낌은 교회라기보다 한 부자나라로 보였다.

나만의 느낌인가?

 

나라는 국민이 있고 그들을 통치하는 통치권자가 있다.

여기에서 드러나야 하는 권위가 바로 주권이야기인데 그 주권이 그 곳 안에서는 한 사람에게 주어져 있었다. 주권이 곧 통치권자였다.

“장로님은 나를 도와주어야 하는 당회 회원이지 당회장이 아닙니다. 당회장은 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장로님이 떠나야지 내가 떠날 수는 없지 않아요? 안 그런가요?”

이렇게 해서 장로회의 회원 수는 차츰 줄어가게 되고 어느 시점에 가면 그 많던 그들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두어 사람만이 그의 주변을 감싸준다. 그것이 바로 그 부자나라에서의 통치권 위력이었다.

그러한 권위의 힘은 다른 자위부대 세력을 다시금 한 두명씩 다시 세워 나아가며 세력을 키워갔다.

교회 건물도 아주 무난하게 위엄있게 어느 지역 땅에 또 세워진다. 역시 부자나라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게 했다.

 

주님은 교회가 부자나라가 되어가길 소망하시는게 아니다.

조개같은 아픔을 아는 헌신자를 원하신다. 진주가 태어나는 과정 그 배후에는 조개의 살을 에이는 아픔이 있었다.

진주는 어느 누구에게는 뼈아픈 상처의 결실이다.

조개같은 헌신자가 될 때, 품안에서는 진주 같은 보배들이 싱그럽게 소망을 잉태하며 기지개를 펴게 될 것이다.

사랑의 열매 주의 나라는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또 하나 세워져 간다. 진주같은 한생명의 교회는 아픈 상처를 통하여 탄생한다.

그 아픔은 부자나라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다.

 

지금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

모두 네것 뿐이구나

내 양은 어디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