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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 교육 자료실

[스크랩] 바른 찬송과 기도에 대하여(개혁주의신앙공동체/이천우 목사)

by 낮은곳에 서서 2012. 9. 20.
교회안에서 행하여지는 습관적인 형태에 관하여

(참고자료로 이용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질문 ; 주 안에서 사랑하는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목사님께 안부 인사드린다고 했지만 여러가지 일로 인해서 아직 인사드리지 못한 점 죄송스럽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형태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가령 찬양할때 박수를 치며 찬양하는데 정작 그들에게 물어보면 찬양할때 왜 박수를 치느냐 물어보면 대다수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하니까 한다고 하고 혹자는 그렇게 찬양해야 하나님이 받으시고 또한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기쁜마음으로 박수를 치면서 찬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았을때 그것을 보고 기뻐 춤추었던 것을 예로 들어 그런 것과 같다고 합니다. 또한 통성기도할 때 꼭 주여 삼창을 하는데 이것 역시 저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또 어떤 사람은 다니엘서 9:19절을 인요하여 거기에보면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이렇게 3번 나오기 때문에 그런 중심으로 주여 삼창한다고 합니다.  또한 통성기도할때 왜그리 목소리를 크게 내는지... 이런 자들의 신앙 행위에 대해서 목사님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답 ; 먼저 형제의 인사를 대하면서 기쁜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해 드립니다.

    형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 행해지는 습관적인 행태에서 크게 두 가지를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는, 찬양할 때 박수를 치는데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통성기도 할 때 "주여∼"를 삼창하는데 이 또한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지, 이러한 신앙 행위들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이 꼭 성경 구절을 들어서 자신들의 행위를 마치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그래서 가장 신앙적인 것인 양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형제의 이 두 가지의 질문을 대하면서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은 형제가 본 글을 대하면서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왜냐하면 내가 형제에게 찬양과 기도가 무엇인지를 말하면 그에 따라서 능히 형제가 잘 판단할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찬양에 대한 이해입니다. 흔히 "찬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할 때 대부분의 성도들이 "곡조 붙은 기도!"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문자의 의미부터 잘못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찬송은 결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와 같은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기도의 한 부류로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찬송이란 말은 한문에서 온 말인데 그것을 풀이하면 기릴 찬(讚), 기릴 송(頌)으로서 칭찬, 공덕을 칭송, 성덕을 칭송하여 고함이라는 뜻입니다. 찬송을 국어사전에 보면 "찬성하여 칭찬함, 아름다움을 일컫고 덕을 기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고전에 보면 송찬(頌讚)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찬송의 의미를 가진 이 단어가 옛날에는 고관대작들을 경배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찬송을 예배에서 부릅니다. 그것은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악적인 요소를 담아서 시적인 표현으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리는 것이 찬송입니다. 그런데 찬송이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예배에서나 그 외의 성도들의 모임에서나 혼자서나 '찬양'(讚揚)이란 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찬양이라는 단어와 함께 찬미(讚美), 찬송(讚頌)이라는 단어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각기 단어를 쓰는 그 분위기만 조금 다를 뿐이지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이나 찬미나 찬양은 모두가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모두가 그 의미는 "하나님이 행하신 덕을 칭송하는 노래"입니다. 찬송이 이런 것이기에 그 노래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노래말을 담고 있습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어떤 사람의 아름다운 인품을 흔히 덕(德)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도 하나님이 지니는 여러 성품을 덕이라고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벧전 2:9). 따라서 찬송의 문자적인 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합니다. 시대와 형식의 구별 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모든 노래를 일단은 총체적으로 '찬송'이라 부르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찬송을 하나님의 인품, 곧 하나님이 행하신 덕을 칭송하는 노래로 부릅니다.

    그러면 찬송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5-16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 보면 찬송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찬송에는 제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찬송에는 제사의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겠지요. 히브리서를 쓴 기자가 이 말을 한 데에는 그 배경을 이해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단지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릴 수 있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에 한해서 언급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15절에서 "항상 드리는 찬미의 제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로써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6절에서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선한 행실이라는 삶의 열매로써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사'라는 말과 같이 쓰는 것은 찬송은 제사가 의미하고 있는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제사란 구약적 개념을 갖고서 하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에는 여러 제사가 있어서 그 속에 다양한 정신을 담아서 표하였습니다. 제사는 적어도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속죄제, 속건제, 번제, 소제, 화목제 가 그것입니다. 이 제사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죄 용서를 바라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 앞에 성별 된 자로 있으며, 하나님과 화목의 교통 속에 있고자 하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찬미가 제사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제사에 담겨져 있는 정신을 다 담아서 드려야 비로소 찬미, 그리니까 찬송이 됩니다. 하나님께 찬송한다고 할 때 이런 여러 가지의 정신을 갖고 해야 합니다. 다신 한번 언급하거니와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속죄의 의미,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 헌신한다는 헌상의 의미,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구별시켜 온통 드린다는 성별의 의미,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고 교통한다는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 거기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반드시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찬송은 이렇게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일 뿐만 아니라 그 찬송에는 제사가 의미하고 있는 정신을 담고서 노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때 찬송하는 자는 찬송을 부르기에 합당한 자여야 합니다. 찬송이란 말을 붙였다고 해서나 아무 노래나 찬송이 될 수 있고, 아무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 그 자체도 찬송을 부르기에 흠이 없어야 하며, 찬송을 부르는 자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과 제물을 다루는 제사장이 다 흠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령 아무 것이나 흥얼거리면 되는 것으로 해서는 곤란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체험이나 개탄하는 내용, 혹은 호소하는 식의 노래나 복음송을 불러서는 찬송이 되지를 않습니다. 곡이나 가사가 하나님께 직접 드려도 흠이 없는 최상의 것을 선별해서 드려야 찬송이 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내용을 지닌 가사이어야 합니다. 시편 또는 그 시편으로 찬송한 시편 찬송에서 보듯이 예배에 합당한 찬송은 그 시와 곡이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기리고 모시는 글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찬송을 할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과 선하심, 또 그의 기이하신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그 도덕적인 속성 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무소불능과 또 그와 같은 독특한 속성들에 대해서 찬송을 하는 것이 예배 시에 부를 수 있는 합당한 찬송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높이 나타내 선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찬송의 가사나 곡이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내용을 가지고 그 분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주관적인 체험이나 자기의 어떤 감정을 갖게 된 곡이나 가사로 표하는 것은 찬송으로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객관성이 결여되고 자꾸 자기의 주관적인 사건이나 체험에 근거한 내용들은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여서 드릴 예배 찬송으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격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시나 곡으로 내 감정을 표현하기 쉬운데 찬송을 할 때 그런 것으로 해서는 전혀 예배 찬송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공교회로 예배드릴 때는 공동으로 발하는 소리이기에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공동으로 직접 올려야 할 내용을 담아서 드려야 찬송으로 합당합니다(엡 5:19). 그런 것인데 어떤 한 사람의 주관적인 체험과 그 감정을 예배 찬송화 하여서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주관적인 체험과 그 감정을 담고 있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을 은혜를 기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노래를 할 수 없다거나 그래서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송이 있는가 하면,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노래로써 그러한 자신의 마음과 신앙을 표시하는 '신령한 노래'(엡 5:19)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 558곡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이 신령한 노래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찬송인 예배 찬송에 포함되어 함께 사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 찬송은 '복음송'이 적합합니다.

    이 복음송이 찬송가에 포함되어 함께 불려지고 있는 실정이어서 찬송곡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속에 있지 못한 성도들로서는 그러한 곡을 선별해 내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교회적으로 힘써서 선별하여서 부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더구나 비복음적이요 비신앙적인 것도 많은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령, 신유나 복을 기원하는 곡인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대로'(72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489장),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498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528장), '네 병든 손을 내밀라고'(530장)은 그 대표되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도 부흥집회용으로 만든 곡들이 상당수 실려 있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무디(Moody)의 전도 부흥집회를 돕기 위해서 생키(Sankey)가 만든 것들을 들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342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349장), '십자가 군병들아'(391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478장) 등입니다. 또 무디의 친구인 위틀(D.M. Whittle)이 미국에서 전도 집회를 인도할 때 그를 도와 복음송을 만들어 부르게 한 블리스(Bliss)의 곡도 있는데 '온 세상이 어두어 캄캄하나'(9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235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241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257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276장) 등입니다. 우리 귀에 익은, 아주 자주 그리고 잘 부르는 곡들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 곡들은 지금까지 예배 찬송곡으로서의 적부합성을 놓고 논란이 되고 있는 복음송들입니다. 이러한 노래들은 대부분이 대중의 흥취에 맞추어서 부르도록 되어 있고 그 곡이나 가사가 신학이 없는 체험이나 간증의 내용으로 쓰여졌고, 더구나 심지어는 즉흥적으로 만들어서 불렀던 곡도 있습니다. 아주 은혜스럽게 부른다고 하는 197장의 '이 세상 험하고'가 그 곡입니다. 이 곡이 작사된 배경을 보면, 앨비나 메이블(홀) 마이어즈(Elvina Mable<Hall> Myers, 1820-1889) 여사가 벌티모에 있는 감리교회 성가대원으로 강단 뒤 성가대석에 앉아 예배를 드릴 때, 그 교회 슈릭 목사의 중보의 기도가 오래 동안 계속되자 그 지루함을 참지 못한 그녀가 짜증난 상태에서 눈을 뜨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찬송가 장수를 한 장 한 장 뒤적이기 시작했는데 찬송가 맨 뒤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니까 찬송가 맨 뒤 여백 페이지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쓰여진 시는 슈릭 목사의 기도가 끝나고 아멘 하는 수간 5절의 시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시는 그 교회 반주자이며 성가대 지휘자인 그레이프씨가 취미삼아 작곡한 곡과 잘 맞아서 널리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타령하는 곡인 스코틀랜드 민요에다 찬송 곡을 붙인 것도 있는데 545장인 '하늘가는 밝은 길'이 그 곡입니다. 이러한 노래들은 'Gospel Hymn'이란 제목으로 발표되고 사용되었을 때 많은 물의와 비판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전도를 권장하거나 고취시키기 위하여 만든 노래인 '예수 말씀하시기를'(263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276장)가 있으며, 흑인 영가인 '거기 너 있었는가'(136장)도 있고,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 지옥, 천국, 멸망, 영생 등을 다룸으로써 신자들의 시들해진 신앙심에 자극을 주어 다시 강하게 일어나도록 하려는데 역점을 두고 만든 곡인 '신랑되신 예수께서'(162장), '하나님의 나팔 소리'(168장)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연가의 속곡에 찬송곡을 붙여서 부른 '오 거룩하신 주님'(145장), 오스트리아 국가(245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영국 국가(79장, 피난처 있으니)의 곡들이 찬송곡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곡들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찬송은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음악을 하나님을 위한 예배 시간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앙체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버젓이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찬송가에 들어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예배 찬송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찬송곡을 선별하여 부를 시에는 가사와 곡의 선별은 물론이고 그 가사와 곡이 누구에 의해서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도 세심히 살펴서 선별하여 불러야 합니다.

    복음송이 예배 찬송과 구별되어 불려져야 하는 것은 복음송들은 원래 목적이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만들어져 불려졌던 것이지 예배용 찬송곡이 아니었던데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곡들이 만들어진 그 특성에 따라 거기에 맞게 사용되면 될 것인데, 그래서 예배 찬송은 거기에 맞게 예배 시에, 복음송은 거기에 맞게 복음 전도 시에나 개인의 신앙고백을 표하며 주님의 은혜를 노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두를 다 무분별하게 예배 찬송에 복음송을 삽입하여 같이 사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식별력을 가지고 선별하여서 사용하여야 합니다. 예배 찬송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예배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버젓이 불러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찬미의 제사가 되지를 못합니다.

    또한 찬미의 제사라고 할만한 찬송의 곡이나 가사는 물론이요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 역시도 찬송하기에 흠이 없는 합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찬송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功效)를 힘입은 자만이 찬송할 수 있는 적격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의지하고서 예배에 나온 자만이 찬송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만이 흠이 없는 만인제사장의 위치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공급받는 실질적인 삶을 누리는 가운데서 주일에 공교회로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으로서의 흠이 없는 자리에 서서 찬송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의 내용이 없이 살아온 자로서 단지 주일에만 입으로만 찬송한다고 할 때 이는 형식에 치우친 것이 될 것이기에 하나님께 찬송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찬송하는 자가 찬송을 제대로 온전히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성경의 계시관에 입각하여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에 합당하게 찬송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신인식 하고 있기는 한데 단지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인식이라든지, 다른 복음에 의한 인식의 상태로서는 우리가 아무리 찬송을 한다 해도 찬송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거나 칭송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아무리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찬송해도 찬송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덕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그 하나님의 덕을 자랑하고 칭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불러야 하는 것인 만큼 경박하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역대상 16장 28-29절까지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고백에 어울리게 찬송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과연 누구 앞에서 하는 것이며, 누구에게 바치는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의에 벗어난 행동으로 찬송을 불러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찬송의 내용 또한 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부르는 찬송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찬송이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태를 갖는 찬송이나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찬송이나 하나님 앞에서 물러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찬송이나 그 모두는 그 내용의 격에 맞는 찬송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 자신이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찬송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즐겁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찬송은 세상 노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데 있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은혜를 받고 기쁨을 누리고자 해서 찬송하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까 주관적인 체험이나 감정을 호소하려고 하는 경향이 짙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더 나은 믿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충족을 시켜줄 그 무엇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가 거기에는 많이 있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향하게 하기보다는 사람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노래는 노래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감정이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감정에 도취되어 자신이 기뻐하고 자신이 흡족하여 부르게 되는 경향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우리가 찬송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찬송을 부르려고 신중을 기해도 자칫하면 찬송을 기교적으로 부르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훌륭한 곡과 가사로 된 찬송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을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들이 찬송에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하여서 찬송을 자칫하면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인 리듬이나 멜로디나 화음과 같은 음악적인 요소에 도취되면 그러한 음악적인 요소 자체를 즐기는데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찬송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보다는 찬송을 이루고 있는 음악적인 요소들 자체를 즐기는 쪽으로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세 로마 카톨릭에서는 음악의 장엄함이나 기교 쪽으로 빠져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결례(缺禮)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종교 개혁자들 중에는 아예 음악 자체를 즐기거나 기교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악기의 사용을 금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화란 교회는 오르간을 아예 교회당에서 없애버리고 반주 없이 단지 목소리로만 찬송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은 헨델의 메시야 같은 곡도 망령된 행위로 보았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여 찬송하는 일을 일반 극장에서 대중에게 돈을 받고 연주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죤 뉴톤(J. Newton)은 크게 반대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처음에 헨델은 그 곡을 발표할 때 지금의 메시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단지 '거룩한 오라토리오'라는 곡명으로 연주했습니다.

    왜 이처럼 찬송에 대해 극히 예민한 반응을 가졌겠습니까? 이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시의 찬송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쪽 보다는 음악의 기교나 장엄함 자체에 빠져있는 데서 건져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회 개혁을 주도해 나가면서 신경을 쓴 여러 가지 중에 하나가 바로 찬송입니다. 이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당 안에 거대하고도 웅장한 오르간을 들여놓고서 연주로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칼빈은 찬송의 개혁의 필요성을 크게 절감하고서 찬송 음악의 선정 원리로 다음의 두 가지를 삼았습니다. "첫째, 곡은 반드시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가사의 정신을 잘 나타내 주어야하니, 곡은 경박하지 않고 장중한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음성이 없는 일반인들도 쉽게 불러야 하고,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것을 배제하고,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은 이런 원리에 따라 시편에 곡을 붙여서 찬송가를 발간하였으니 그때가 1562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송하는 실상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면서 온갖 추악한 자태를 다 보이고 있습니다. 몸을 심하게 흔들어대면서 크게 박수를 치면서 고성으로 찬송하는가 하면, 사람의 말초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악기들을 갖추어 놓고 거기에 따라서 찬송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통성으로 부르짖어 기도하게 했다가 또 찬송하게 했다가 하는 반복을 통하여 그야말로 하나도 정신없는 상태에서 찬송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악기는 사용해야 한다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흑백 논리의 처방을 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찬송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된 천상적인 인격을 갖춘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에 합당한 격을 갖추고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자들은 찬송할 때 박수를 치며 찬송합니다. 왜 그렇게 찬송하는가 라고 물어보면 대다수들의 대답이란 것이 고작 다른 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게 하니까 한다고 하고 혹자는 그렇게 찬양해야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한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면서 찬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럴싸하게 성경의 한 사건까지 들이댑니다. 자신들의 그러한 행위가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자신들은 찬송을 합당하게 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다윗이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았을 때 그것을 보고 기뻐 춤추었던 것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찬송에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들이 제시하는 다윗이 춤을 추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때는 사무엘이 선지자로 활동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사사 시대였습니다. 곧 사사 말기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점차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장성하자 그를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사무엘의 말은 온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때에 엘리 제사장의 집은 몰락의 극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는 아주 늙어 앞을 보지 못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더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이러한 엘리 제사장의 몰락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 지도자의 타락은 곧 이스라엘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쳐 백성들 전반적으로 종교적 암흑기에 들어 있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크게 징계하십니다. 해서 하나님은 블레셋을 일으켜서 징계의 방편이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는 수단으로 삼아 이스라엘을 치게 하였는데, 그때 이스라엘은 그 전투에서 전사자만 4,000명이나 되는 대패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법궤를 내세워서 전투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 여호와의 법궤만 선두에 있으면 자신들은 무조건 이기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신관이 어떤 상태인지를 잘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이스라엘의 블레셋에서 구원하실 신은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여호와 하나님의 실존을 법궤에서 찾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전쟁에서 진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법궤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영내에 두면 여호와께서 자신들 가운데 계셔서 자신들을 대신하여 적을 쳐부수어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인식은 이스라엘에게서 불신앙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두 번째의 전쟁도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안게 합니다. 더욱이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의지했던 법궤마저 탈취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그럼으로써 그 법궤를 신격화한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이때 제사장으로 법궤를 모시고 전쟁에 참여하였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의 며느리요 비느하스의 아내도 해산이 가까운 만삭 중에 있다가 법궤가 블레셋의 손에 넘아가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갑작스런 진통 중에 아이를 낳고서는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을 남기고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삼상 3:19-4:).

    그리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은지 40년이 지났고 그 뒤를 이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내에서 블레셋 족속을 몰아내고 그동안 그들의 지배 아래였던 국경지대의 마을에서 빼앗겼던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찾아와 우열곡절을 겪은 끝에 예루살렘의 다윗성으로 옮겨왔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 복받쳐 오르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춤을 추면서 법궤를 따라갔습니다. 이때에 그는 세마포로 된 제사장의 예복인 에봇만을 입고서 제물도 바치고 백성에게 직접 복도 빌면서 제사장의 일가지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환호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면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습니다(삼하 5:-6:15)

    여기에서 보는대로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찾아오면서 춤을 춘 것은 빼앗겼던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찾아오게 된 데 대한 감격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무 기쁜 나머지 그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춤을 춘 특별한 경우이지, 이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이 늘 일상적으로 그렇게 찬송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지 이것이 찬송의 전형(典型)인 것은 아닙니다. 만일 다윗의 춤을 찬송의 전형으로 삼는다고 하면 다윗이 행한 모든 것이 신앙의 전형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다윗이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죄악을 저지른 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좋은 것은 신앙의 전형으로 삼고 나쁜 것은 무시하면 되는 것입니까? 이런 곡해는 우리의 신앙 행위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찬송의 경우에서 몸을 들썩거리며 크게 노래하며 박수치는 행위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적용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됩니다.

    이는 기도에서도 봅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할 때 정의를 내리기를 일반적으로는 "영혼의 호흡이다",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 정의에 있어서 심각히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기도를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계속하여서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기도를 오랫동안 하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많이 하느냐 하는 양적이요 수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기도를 보게 되면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하는 것으로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되는 양 말입니다. 또한 기도를 "끈질기게 간구(간청)해서 응답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럴 경우 기도를 하나님께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를 받아내는 요구로 이해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기도를 부르짖는 것으로 교육시키고 또한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다 보니까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기타 기도 모임 등이 그런 목적에 의해서 실시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또 그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크게 부르짖게 합니다. 게다가 "주여"를 삼창하게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데에는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비결이요, 자신들이 소원하는 바를 응답받는 비결이라고 보는 것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기도는 필시 도깨비 방망이로 둔갑하게 됩니다. 뽀빠이에게 힘을 주는 시금치가 되며, 모든 자물통을 척척 열어대는 만능의 열쇠가 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 없이 기도가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골방 기도를 언급하면서 특히 구제와 연관하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은밀'입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자신의 하는 것(기도)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참 구제함은 구제의 필요성을 느껴서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이 곧 자기 자신의 뜻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단지 인위적인 자선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지고서 하는 구제여야 하듯이, 기도 또한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사는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서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들으실 줄로 생각하기에 할 말을 생각하고 말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과 하나된 관계에 의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으로 구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합니다. 안다고 할지라도 말을 습관적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조금 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기도의 말을 정도를 인하여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듣지 않고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을 적게 하든, 말을 많이 하든지 간에,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곧 기도는 말을 하는 그 말 자체에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이 필요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눈동자, 눈빛만 보아도 그가 무슨 말을 내게 하려고 하는지를 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 정도의 사이까지 되었다고 하면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아니 대단하기보다는 그것이 정상입니다.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고 자신은 그의 의중대로 따를 마음과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간의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의 의중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각도 참고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든지, 모든 일은 의논해서 해야지 그렇지 않고 자신의 의사가 무시된 것은 함께 할 수 없다든지 하면 이는 곤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말을 해야만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어 있을 대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리고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살 마음과 자세, 준비가 되어야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 삼으신 아버지로서 자신 안에서 온전히 의지하여 있는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자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십니다. 구하기 전에 말입니다. 구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통해서 기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이 기도문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해서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을 엉뚱하게 이해하여서 기도 조목 조목을 마치 우리에게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고자 하신다 등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 내게 필요한 물질을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받는 방법으로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도를 무엇인가를 구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가 방법이 되고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통해서 말씀해 주신 기도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어 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신앙고백적으로 드러나게 하신 것이 기도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사느냐고 할 때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짐 속에서 라고 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오늘과 또한 내일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처럼 온전하고자 하여서 행하여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부지하려고 하면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니까 그것을 구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의 죄를 사하여 주어야만 또한 내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남이 나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고 그것을 내세워서 내 죄를 사하여 달라고 구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험, 악에서의 구함 등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 모든 삶들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원하심의 수준에까지 이르러 가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서 행하여지는 일들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사는 가운데 일용할 양식도 주어졌으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며, 시험과 악에서 구하여지는 일들을 겪는 것입니다. 그래 그런 모든 일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 그의 뜻을 인하여서 살아가는 그런 자가 되라고 하는 이해에서 주기도문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구하여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에서 앞으로도 그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자 앞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 사람에게 같이 있어지기를 구하며, 그와 같이 자기의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생명의 공동체인 형제 자매의 열망 때문입니다. 시험과 악 앞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그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는 차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본다』는 차원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기도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12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 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제는 이 말씀이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끌어내고, 자신의 소원과 문제 해결을 위한, 설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하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말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여기서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 때 그 가진 믿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만나기 위하여서 얼마나 간절하고 소망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불신의 아들이 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구하는 것과 대비하여서입니다. 그러면서 불신에 속한 자와 불신의 아들과의 관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떡을 주지 돌을 주는 자는 없습니다.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을 주지 뱀을 줄 자는 없습니다. 그것은 선한 자만이 아니라 악한 자라도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똑 같습니다. 무엇이 똑 같은가 하면 인간이 구하는 것과 줄 수 있는 것이란 떡과 생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 불신에 속한 자는 그 본능과 본성이 육적인 욕망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 그들은 구한다고 하는 것이 떡과 생선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손에 넣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기들의 생명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거기에 의존합니다. 그런 그들에게서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라도 떡을 주고 생선을 주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떡을 주고 생선을 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거기에만 관심이 있고, 또한 염려가 되기 때문에 매달려 구합니다.

    하나님도 구하는 자기의 자녀에게 줄줄 압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주시고자 하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말입니다. 생명과 몸을 염려하는 이방인들은 떡과 생선, 살 집과 의복에서 '살 희망'을 봅니다만,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며, 살 집과 의복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한 순간이라도 연장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제공하여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그 몸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염려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참으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십니다.(눅 11:13). 이는 하나님 곧 자신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우리의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생명을 돌보아 주십니다. 한 날의 괴로움이요? 그날의 것으로 족하게 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서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 된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주시고자 소원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소원하심과 우리의 구하여야 할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하심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원을 가지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시는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하심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대한 믿음으로 회복된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만나고자 하는 마음과 삶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마음과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의 증거로서 나타나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서만 있는, 보여지는 특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기도는 그가 아들이실지라도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나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바울에게서는 그에게 닥쳐지는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함께 하여 주시는 것으로서의 모습으로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기도를 보면 처절한 고난 속에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깨닫고서 감사와 기쁨을 갖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신 이 기도가 우리를 우리의 마지막 일생 다가는 날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우리의 전 생애에서 고백되어 지고 있다고 하면 그는 그만큼 하나님과 가까이 한 자일 것이며, 하나님과 만난 삶을 가지고 산 자일 것입니다. 그는 그만큼 믿음으로 산 자,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하여 믿음이 성장하는 가운데서 산 자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로 살아가는 그 자체인 것이지, 결코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고, 시간을 투자해서 많은 말을 했느냐, 몇 분 동안 엎드렸느냐, 무엇을 요구하고 응답 받았느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좇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령, 곧 자신의 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주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성령을 다른 사람이 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할 최대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최종적으로 설명하기를, '대접'으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의 대접은 누구를 잘 영접하여 대우해 주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성령을 받은 자로서 살기를 원한다고 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같이 우리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받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여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이 뜻을 이루기 위한 삶으로 간절하여야 합니다.

    기도란 것이 이런 것인데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던 시기인 다니엘서 9장 19절의 다니엘이 백성을 위하여 한 기도인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를 들어서 다윗도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하면서 삼창 기도를 기도의 전형으로 삼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와 같이 기도한 것은 예루살렘이 70년 동안 황폐한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깊이 생각하는 중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끼니를 넘겨가면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죄의 용서를 빌면서 사람마다 주님이야말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두 다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오늘날에 기도의 방식에 있어서 주를 삼창하게 하는 것으로 삼다니요? 어디 그뿐입니까?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하였다고 해서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하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그 특수한 상황에 처하기 전에는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그는 그때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이런 경우는 예수님에게서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날 밤늦도록 기도하였으니 철야기도하자고 합니다. 새벽에 기도하였으니 새벽기도를 하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기도를 하시게 된 원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기도의 전형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어떤 자로 만들고 있습니까? 종교 영웅주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기도를 자기 의를 세우는 것으로 합니다.

    이 모두는 참으로 무지한 신앙의 행태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한갖 잡다한 무속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이러한 신앙의 행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상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치겠습니다. 장황하게 설명을 한 것에 비해서 형제가 원하는 대답을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흡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바른 찬송과 기도에 대한 복음적인 서적들을 읽으셔서 도움을 받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형제여, 그럼 안녕히....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김유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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