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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지평선

[스크랩] 성경 문답 자료(진행 중)

by 낮은곳에 서서 2012. 3. 14.

궁금한 주제에 대하여 회원 간에 의견을 나눈 글입니다.

 

         <차           례>

 

간섭에 대하여

교회를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1)

기도에 대하여(2)

기도를 마칠 때 중보자의 호칭에 대하여

다툼에 대하여

명절이 주일인 경우에 대하여

모세 오경의 기록에 대하여

목사에 대하여

방언에 대하여

사도신경에 대하여

삼위일체에 대하여  

선악과 해석에 대하여

성가대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십일조에 대하여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에 대하여

이단을 정죄하다가 이단이 되는 경우와 신유의 문제

이분설과 삼분설에 대하여

자살에 대하여

정죄와 비판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청소년 문제에 대하여

축도에 대하여

축복에 대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헌금에 대하여

회개에 대하여

 

간섭에 대하여

 

전상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에 대해 궁금합니다??(잠26:17,딤전5:22,벧전4:15)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잠언26:17)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5:22)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

 이 세 구절을 보면,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나와 있는데, 실생활 중 말씀을 적용한다면, 어떠한 예들이 있을까요?

 "복음 전파"같은 경우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남에게 간섭해서 전파하면 좋은데...다툼이나,죄는 간섭을 피하라고 나와있네요.그럼, 옆집의 부부가 싸움해서 피터지게 싸우고 그래도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말도 되는 건가요^^;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데...예를들어 설명해 주시면 감사히 잘 듣겠습니다.

사랑나누기  1. 실생활 중 말씀을 적용한다면, 어떠한 예들이 있을까요? --> '간섭'이란 용어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다릅니다. 말씀 별로 의미와 사례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1) 잠언 26장 17절의 '간섭'(미트아베르)은 '흥분하다', '격분하다'는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남의 일에 관여할 때 당사자들보다 더 흥분하거나 격분한 상태에서 끼어들어 화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경우를 말합니다.
10.04.21 02:19 new

2) 디모데전서 5장 22절의 '간섭'(코이노네이)은 '함께 나누다', '동반자'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친구가 도둑질을 하자고 제안하였을 때 직접적인 참여로 죄를 짓는 경우와 간접적인 참여로 공범이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10.04.21 02:24 new
3) 베드로전서 4장 15절의 '간섭'(에피스코포스)은 '참견하다', '감독하다'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남의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가 아니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워 참견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10.04.21 02:30 new
사랑나누기  2. "복음 전파"같은 경우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남에게 간섭해서 전파하면 좋은데...다툼이나,죄는 간섭을 피하라고 나와있네요--> 복음 전파(傳播, preached)는 복음을 널리 퍼뜨림을 의미합니다(딤후4:2;고후4:5). 따라서 '간섭'이란 용어가 '전파'와 상관이 없는 용어입니다. 무엇보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고(막16:15,16;행1:8,5:42), 오신 목적입니다(눅19:10;막1:38) 10.04.21 02:31 new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10.04.21 03:52 new
사랑나누기  3. 옆집의 부부가 싸움해서 피터지게 싸우고 그래도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말도 되는 건가요--> 피터지게 싸운다면 생명과 관계 되는 경우인데 신고해야 되지요. 그것은 '간섭'이 아니라 생명존중의 행위지요. 위의 1번 세 가지 경우를 잘 살펴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10.04.21 02:10 new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10.04.21 03:50
전상진  사랑나누기님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이해가 갑니다. 10.04.21 07:38
 
교회를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자신이 '가라지'가 되느냐? '알곡'이 되느냐?의 중대한 문제를 세상 인정으로 결정을 유보한다는 것은 글쎄요? / 옮길 경우에는 소개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설교를 여러 번 듣고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맞는 교회'(굉장히 중요함)를 신중히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떠돌이 교인이 될 염려가 많습니다. 08.08.25 07:53
사랑나누기 저도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습니다. 그동안 함께 하던 모든 것과의 떠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자들의 흉내도 몇 개월 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황폐해짐에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교회 싸이트를 방문하여 '말씀 중심'으로 목회 한다는 지금의 교회를 찾아 정착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시19:10)는 것을 거짓으로 여겼는데, 옮긴 그 다음 해에 일년에 12독을 할 정도로 말씀의 독에 빠졌었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의 문제가 걸렸기에 인정 보다 말씀의 진리가 우선이라는 말을 할려는 것이 사설이 길었습니다. 08.08.23 16:08
coldblooded 와! 목회자이신 줄 알았는데요, 아니신가 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에 대하여


<질문>1.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 살인할 것을 명하셨는데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2. 구약은 신약에 비해 하나님의 공의가 두드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저의 느낌이 맞다면 왜 구약은 하나님의 속성 중 유독 공의가 두드러지는 걸까요?(떠들썩한 중고등부 예배 때 선생님이 지금이 구약이었으면 우린 모두 당장 죽었을 것이다 라는 말들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나누기 <질문. 1.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락하신 이유는 아래 < Re:창골산 봉서방의 글...>에 나오는 것처럼 죄의 폭로와 그 대가를 알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국민을 보호하고 국토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당방위로 죄가 아니며(출22:2;삼상17),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삼상17:47)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삼상30:8). 08.08.30 16:39
사랑나누기 <질문. 2. 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구약에 두드러지게 느끼는 것은 죄에 대한 공의로운 법 집행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의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원천이란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성경의 한 특정한 부분에서 하나님 성품의 한 단면이 다른 면보다 더 많이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개관하면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08.08.30 20:48
coldblooded 명쾌한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도에 대하여(1)


agok
그런데 그렇게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신자이고 믿음의 조상들이 그래왔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에게 뜻하신 바라고 여겨집니다. 기도는 우리의 의무 ,기도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권리
 Evergreen 애매하군요. 기도가 우리의 의무는 아니지요.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히 들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기도는 어찌 해석해야 되나요?  08.09.30 06:04
사랑나누기 Evergreen님께서 애매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위의 글에서 <하나님 쪽에선 당신의 뜻을 변경한 것은 없지만 인간 쪽에선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 받은 것입니다.>라는 글을 그냥 지나치신 것은 아닌지요? 히스기야의 기도도 이 말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08.09.30 09:58
사랑나누기 <기도가 우리의 의무는 아니지요>라는 생각은 저와 달리하기에 그 이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성도의 믿음의 기초인 소요리문답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고전10:31;롬11:36;시73:24-26;요17:22-24).>라고 밝히고 있으며,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 고하고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간구하여 죄를 자복하며 그의 자비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다(요16:23;요일1:9,5:14;단9:6;빌4:6;시10:17,62:8,145:19).>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08.09.30 10:20
사랑나누기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잠15:8)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빌4:6;시145:19)이니 기도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이루는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살전5:17)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살전5:18)이라고 밝히고,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삼상12:23)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성도의 의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저의 견해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주셔서 함께 바른 신앙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08.09.30 10:32
Evergreen 저는 억지로 의무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도 의무입니까? 그게 의무로 되나요? 당연히 해야 할 바라고 하더라도 의무로 하는 기도는 전혀(거의?)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이고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쁘게 바치는 마음과 경배하는 마음 없이는 하나마나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수정하겠습니다. "기도가 우리의 의무가 돼서는 안 되지요"  08.09.30 17:40
사랑나누기 '외식적인 기도를 하지말자'는 의도는 짐작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우리의 의무가 돼서는 안 되지요"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대화하는, 뜻을 아는) 유일한 통로이고(출33:11;요15:15),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마21:13;살전5;17). 뿐만아니라 기도는 성도의 권리(마7:7;약1:5)이자 의무(살전5:17;엡6:18;골4:2)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08.09.30 18:14
사랑나누기 <항상 기뻐하는 것도 의무입니까? >라는 질문에 저의 견해로는 의무에 속합니다. '의무'의 어의는 '마땅히 행하여야 할 본분이나 직무(신25:5,7;갈5:3)'라고 합니다. 그리고 의무는 상위권자의 명령이나 법에 의하여 드러납니다. 따라서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빌4:4;살전5:16) 고 명령하였으니, 기뻐하는 것은 성도에게 의무에 속합니다. 의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으니 회개하고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행2:38). 성령 충만하면 항상 기뻐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갈5:22).  08.09.30 19:00
Evergreen 사랑나누기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의무' '법' 하면 약간의 거부감이 있네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조금 쉽게 만들어서 사람의 힘으로 지킬 수 있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 대신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감사와 기도와 기쁨은 의무보다는 성도가 누리는 권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08.09.30 19:07
사랑나누기 '의무'라는 말을 Evergreen님께서 쓰셨기에 논의되었지만, 저도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조금 쉽게....방법 대신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급히 쓰시느라고 더 중한 것을 놓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속물이 아니라 속죄의 대속물이셨기 때문입니다(마20:28;막10:4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갈5:1;고후3:17)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회적인 자유라기보다 죄와 율법에서의 자유(롬6:18-22,8;2,21)입니다. 또한 감사와 기쁨은 성령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의무를 행한 후에 누리는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08.09.30 20:01
Evergreen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08.09.30 22:28
사랑나누기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09:21

 

기도에 대하여(2)


사랑나누기 1.(예수이름으로 가난의 저주는 끊어질 지어다. 가난의 마귀는 떠나갈 지어다.) ->성경에 가난의 원인으로 ①하나님의 주권으로(삼상2:7) ②자신의 게으름으로(잠6:10,11,10:4) ③놀이 즐김과 방탕으로(잠21:17,28:19) ④술 취함과 탐식으로(잠23:21) ⑤잠자기를 좋아하여(잠20:13) ⑥인색하여(잠11:24) ⑦훈계를 저버려(잠13:18) ⑧가난한 자를 학대하여(잠28:3) ⑨눈이 악하여(잠28:22) ⑩일하지 아니하여(엡4:28)로 드러나 있습니다. ①하나님의 주권으로(삼상2:7)에 해당된다면, 하나님의 쓰임에 맞게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것이니 저주가 아닙니다.  19:50
사랑나누기 오히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니(약2:5) 축복입니다. 그 외의 원인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가난의 10가지 원인을 살펴보면 가난이 마귀라는 근거는 전연 찾을 수 없습니다. '가난의 마귀는 떠나갈지어다'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흉내낸 우상숭배자의 구호입니다. 신자를 유혹하고,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19:59
사랑나누기 2. (술먹게 하는 귀신은 떠나가라.) ->성경에 술에 대한 경고(警告)가 있습니다. ①술 취하지 말라(롬13:13) ②술 마시는 것으로 실족시키지 말라(롬14:21) ③술 취하는 자와 사귀지 말라(고전5:11) ④포도주를 마시지 말라(엡5:18) ⑤술을 마시면 가난하게 된다(잠21:17,20-21) ⑥불행의 근원이 된다(잠23:29-35) ⑦병의 원인이 된다(호7;5). 왜냐하면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더럽힐 수 없는데(고전3:16,17), 술을 마시고 싶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갈5:17), 재앙은 술에 잠긴 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잠23:29,30).  20:05
사랑나누기 그런데 술 먹게 하는 귀신이라는 말은 성경 어느 구석에도 없습니다. (술 먹게 하는 귀신은 떠나가라.)는 말은 우상숭배자의 주문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는 기도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중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아님의 결론처럼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능력있는 기도가 됩니다. 글을 줄이려다 보니 단정형으로 진술하여 미안합니다. 저의 견해로 받아주시고 도움이 되었으면 기쁘겠습니다.  20:18

 

기도를 마칠 때 중보자의 호칭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1. 신약성경에 기도와 직접 관련된 성구는, <[행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로 <예수의 이름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로 호칭하였습니다. 공통점은 기도시에 <예수>로 호칭한 것입니다.  17:03
사랑나누기 2. 성경에 중보자의 이름은 <그리스도 예수>라고 지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호칭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라 할 때, 세상에서 생활한 역사적 인물(예수-인성)과, 신앙에 의하여 고백하는 칭호(그리스도-신성)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마1:1;막1:1;요1:17;행8:12) .  17:05
사랑나누기 3. '예수'를 칭호하는 이름은 많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네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요14:14)에서 여기서 가리키는 '내 이름'은 분명히 '예수'(요14:6,16:19)입니다. 따라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주님'이란 호칭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란 이름은 기름 부은자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의 뜻이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 아들의 이름'이라 하면 예법에 어긋난 호칭입니다. '성자'도 삼위간의 관계를 드러낼 때 사용되어야 할 칭호입니다.  17:30
사랑나누기 4. 무엇보다도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요셉(마1:21)과 마리아(눅1:31)에게 준 이름으로, '구주' 즉 '구원의 주'라는 의미입니다(행13:23;딤후1;10). 세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는 호적에 등재된 공적인 권위를 가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주민등록에 등재된 공적인 이름이 아닌 가명이나 예명, 아호 등으로 여권을 발급받지 못함과 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하늘나라 여권을 신청할 수 있답니다. 오늘 비도 오지 않고 흐린데 글이 길어졌습니다. 상수리님께서 건질 것이 없게 되어 죄송합니다. ㅎㅎㅎ  17:40
그피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린다”는 말을 사용해고 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이미 그 자체가 예수님 이름으로, 혹은 예수님 이름 안에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14:13-14; 15:23-24). 우리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히4:14-16; 7:25). 굳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서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주술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파악한다면 그래도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20:33
CRYSTAL 저도 그피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21:34
 grace 의미를 알면서 기도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때로는 안 쓸 수는 있지만 쓰는 것이 맞으며 특히 공기도에서는 반드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1:55
그피 저도 그레이스님의 말씀과 동일한 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22:01
사랑나누기 몇 분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된 것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딤2:5). 우상을 섬기는 자도 기도를 합니다. 따라서 주문, 주술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증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되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빌2:5). 기도의 목적이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3:23
사랑나누기 //셋째,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응답이던지 순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고후1;20).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입니다(빌2;10,11).//넷째,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사단의 방해를 막는 유일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골2:15). 그래야 사단이 기도를 가로채지 못합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23:26
사랑나누기 세상적인 가치 기준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모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23:32

 

다툼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대통령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쳐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접을 때가 많습니다. 국가와 민족이란 대명제가 자신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산밑에서 보는 경치하고 산 위에서 보는 경치가 다른 것처럼 개인 이명박과 대통령 이명박의 차이점이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국민은 자신과 이웃을 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자국 국민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도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의 만족이란 어느 국가에서도 있어본 일이 없거든요. 하나님의 나라 외에는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간구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가 아닐까요? 이해와 사랑으로 보기를 소망합니다. 08.08.27 13:20
사랑나누기 바로미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자가 이웃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될 수 없습니다. "라는 말에 "아멘!!!" 합니다. 이 말 속에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저는 좀더 가까이 있는 말로 항상 자문(自問)합니다. "지금 나의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실까?" 안 해 보셨거든 한 번 적용하여 보세요. 이상하게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나아가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08.08.28 06:46
사랑나누기 저도 남못지 않는 다혈질이고, 충동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주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라는 말씀이 저를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저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니 모두가 아집이고, 편집이며, 가면이며, 교만이었습니다. 판단은 주님께 맡기고, 더불어 평화 하시기를 소망합니다(롬12:18) 08.09.02 13:11 행복한당신 아멘 08.09.02 12:37

 

명절이 주일인 경우에 대하여


 goodlogos
교회가 상황에 따라서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그런 곳일까요? 예배가 상황에 따라 안 해도 되는 그런 경배일까요? 자신의 의견이 정답이다라고 쓰기 보다는 저의 의견은 이런데 다른 분들의 의견은 혹은 성경에서의 말씀은 어떤지요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행복한 당신님의 글과 열정을 높이 생각하고 보고있습니다. 08.09.15 07:35
 grace goodlogos 님은 주일오전에 무조건교회만 안 빠지면 신앙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겨울 여행님은 남자니까 자신이 그냥 교회가고 봉사도 하면 되지만 여자들은 맘대로 할수가 없습니다, 만일 명절인데도 주일학교 봉사한다고 시집으로 안가면 남편이 이해할 것 이며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지요? 교회봉사만이 주의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주일날 예배는 빠지면 안되고 가능하면 교회봉사를 당연히 해야하지만 그것으로 신앙이 좋다 아니다를 말할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08.09.15 08:40
사랑나누기 성도는 두 나라에 속하여 있습니다.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세상과 분리되는 소극적인 삶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적극적인 삶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삶은 세상과 갈등을 갖게 되지만 적극적인 삶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에서의 비유가 적극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평소에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에게 신뢰를 쌓아, 서로를 존중하게 만들면 예배와 제사로 인한 충돌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08.09.13 13:38
행복한당신 아멘 08.09.13 13:30

 

모세 오경의 기록에 대하여

순복 안녕하세요?...말씀을 가르치다가 제가 모르는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올립니다. 흔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 5경이라 하여 모세가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같은 경우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이였는데 어떻게 창세기를 쓸 수가 있나요? 고대 부터 들어왔던 구전을 편집한건가요?...아니면 성령의감동가운데 창세기를 쓴건가요?..좋은 답변 부탁드립니다. 09.06.26 19:06

바로미 이미 답을 알고 계신데(고대 부터 들어왔던 구전을 편집한건가요?...아니면 성령의감동가운데 창세기를 쓴건가요?..), 둘 중하나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를 위해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어느 것을 믿느냐가 순복님의 열매가 되겠습니다... 09.06.26 22:44

사랑나누기 왼쪽 [양무리마을 기독자료실]의 <전신갑주(성경사전)> 게시판에서, 30번 <성경(聖經, bible)에 대한 이해> 자료 <5. 성경의 기록에 관한 견해(見解)>를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09.06.27 08:13

grace 당연히 성령의감동가운데 모세가 창세기를 쓴것입니다, 09.06.27 19:12

holyjoy 두개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마시고, 두 개가 모두 옳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지...?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들을 편집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09.06.27 10:58

cris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썼다는.. 안녕하세요?^^ 09.06.27 16:07

순복 음...깊이 생각해 보게되는군요^^ 09.06.27 19:49

사랑나누기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들을 편집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는 식의 표현에는 몇가지 문제성을 내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09.06.27 22:23

사랑나누기 1.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들을 편집하는 중에 >는 인간의 행위(의지)가 먼저 작용하였다는 표현이 되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과 상치됩니다. 09.06.27 22:27

바로미 그것이.. 모세의 경우는 이스라엘백성의 정체성을 400년간의 오래된 노예생활로 인해 변질 혹은 퇴색된 것을 다시금 확실히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잡기 위한 사명감(궁극적으로는 모세오경기록) 자체를 하나님이 주셔서 이스라엘조상들의 구전들을 편집하는 중에 성령께서 영감을 주셔서 그 사명을 완성하게 함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보셔도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기록했다고 쓰지 않고 교회를 위해 서신서를 쓰다 보니..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써 기록한 것 처럼 보시면 위 두가지 사항이 어느 정도 아구가 맞을 것입니다. 09.06.27 22:41

사랑나누기 2.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들을>에서 <이야기>라는 어휘의 뜻은 '없는 사실을 꾸며낸 말' 또는 '지난 날을 회상하여 나누는 말'의 의미로 성경에서는 대화(출33:11,눅24:17), 유조치 아니한 이야기(욥15:3), 공교히 만든 이야기(벧후1:16), 이야기거리(대하7:20;욥17:6;왕상9:7), 허탄한 이야기(딛1;14,딤후4;4) 등으로 사용되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성경>(딤후3;15)의 본질과 동떨어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09.06.27 22:58

사랑나누기 3. 성경의 기록에 관한 여러 견해(성경무오설,기계적 영감설,역동적 영감설, 유기적 영감설,완전 영감설,축자영감설 등)에서도 일관되게 동일한 것은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權威)는 성경의 영감성(딤후3:16;벧후1:21)과 주님의 보증(마5:18,24:35;눅16:17;요10:35)과 심판의 능력에 대한 주님의 증거(요12:48)입니다. 09.06.27 23:18

사랑나누기 4.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구전>이란 용어에 내포된 의미입니다. 이런 표현은 성경의 창세기가, 전해내려오던 설화를, 신화를 배낀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단 또는 안티 기독인들의 먹잇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정경으로 결정된 동기는, 이단이 발생하여 마음에 맞는 것을 골라 성경을 만들어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09.06.28 09:32

반석1 구전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자료라는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요? 기록된 자료도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담이나 하와는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과 같은 자녀들에게 에덴동산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적으로 잘 교육을 시켰으리라 봅니다. 09.06.28 15:23

사랑나누기 '구전'이란 말 그대로 '입으로 전함'을 이야기 합니다. 구전도 자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에 기록된 자료도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그러나 창세기는 모세가 스스로 의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감동>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08:51

순복 사랑 나누기님의 말은 결과적으로 모세가 어떻한 외부적 자료나 이야기를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창세기를 썼다는 말씀이신데...그렇다면 천지창조 부터 범죄, 노아 이야기 바벨탑등..이러한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이 다 가르쳐 주시고 사람 이름이라든지..지명등도 하나님이 다 가르쳐 주신건가요??..이렇게 받아들여도 될른지요? 09.06.28 23:42

사랑나누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순복님이 말씀하신 구체적 사례들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문제로 되돌아가면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들을 편집하는 중에 >가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가 먼저라는 의견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에 의하여 전승되어온 말씀들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기록하였다(딤후3:16)는 것입니다. 08:39

사랑나누기 저는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눅12:6,7)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저가 댓글을 단 동기는 성경 기록에 대하여 한계가 있는 인간의 사고 능력에 의한 접근을 지양하자는 것입니다. 08:37

반석1 하나님이 다 가르쳐 주신 것과 외부자료를 꼭 분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중 나는 새를 하나님께서 먹이지만 사람이 닭모이 주는 것 처럼 모이를 뿌려주지는 않으시고, 새들에게 일정한 지혜를 주셔서 흩어 자연 속에 널려있는 것들을 찾아서 먹는 방법으로 하셨거든요. 중요한 것은 새가 알아서 잡아 먹는다고 인식하는 것과 창조주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섭리하신다고 믿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09.06.29 12:33
반석1 여기서 외부자료라 함은 사단에 의해 변개된 어떤 자료가 아니라 하나님백성들을 통해 성령으로보호 되어온 자료이어야 겠지요. 일반은총에 속한 자료들가운데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보호된 자료가 있고, 사단의 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인해 변개된 자료가 있다고 봅니다.(사족같은 얘기: 저는 새로 발굴되었다는 옛역사적 자료나 유물들에 대해 상당한 의심을 갖는 편입니다. 예를 들자면 선사시대유물, 삼국시대유물 등등 사람들의 명예욕 때문에 변개될 가능성이 높은 것들...) 09.06.29 12:32
사랑나누기 저의 견해는 '성경'이라는 제한성입니다. 성경은 일반은총이 아닌 특별은총이며 특별계시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을 성경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을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증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가설은 어디 까지나 가설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09.06.29 19:24
반석1 사랑나누기님의 의견에 공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성경 기록에 혹시 나타난 부분이 있는지요? 출애굽기는 예수님이 모세의 글이라고 인용한 내용이 "가시나무 떨기의 불가운데 나타난 천사 부분"으로 아는데.... 09.06.30 00:36
사랑나누기 수천년 내려오면서 오경(창,출,레 민,신)은, ①모세의 율법(왕상2:3,스7:6;눅24:44,요7:23). ②모세의 책(스6:18;느13:1;막12:26). ③모세의 율법책(수8:31,23:6,왕하14:6). ④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단9:11;말4:4,내종 모세에게 명한 법) 등으로 불리우며 모세의 기록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어떻게 천지창조 때와 그 이후 모든 사실을 전부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령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고 모세를 도구로 이용한 것입니다. 09.07.01 17:39
사랑나누기 첨언드리면 성경이 성경 되는 것은 ‘성령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답변은 아래 답글 <창세기도 모세가 기록했는가요?>로 대신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09.06.30 17:33
순복 반석님과 사랑나누기님의 진심어린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성경이 우리들의 손에 쥐어지기 까지의 역사성을 두 분이 조금 다르게 해석하시지만 본질은 하나님의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완전하심 속에서 성경이 써내려 왔다는 것을 두 분의 글 속에서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09.06.29 23:11
반석1 "<모세 오경 안에는> 그가 저자임을 알려주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세오경중 창세기를 제외한 네 책에는 > 그가 저자임을 알려주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해야 맞을 것 같군요. 제 생각에는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정확한 근거가 없다.> 고 주장한다해도 그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창세기의 정경성여부나 영감성여부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성경에는 없고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했다는 성경의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09.07.01 14:20
반석1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근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09.07.01 14:21
사랑나누기 예수님과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가리켜 ‘율법과 선지자'(마5:17,7:12;눅24;44)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오경'(창세기,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경' 즉 '율법서'를 ①모세의 율법(왕상2:3,스7:6;눅2:22,24:44;요7:23). ②모세의 책(스6:18;느13:1;막12:26). ③모세의 율법책(수8:31,23:6,왕하14:6). ④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단9:11;말4:4,내종 모세에게 명한 법)으로 명시하였습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모세의 기록이라는 근거가 확립됩니다. 09.07.01 17:42
문제는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주장들은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가지신 성령님의 사역을 도외시(무시?)한체 우물안의 개구리 같은 한정된 인간의 사고능력 안에서 해답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09.07.01 17:41
반석1 율법에 "창세기"가 포함된다고 하는 성경적근거는 특별하게 없지 않은지요? 그냥 그렇게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수용하는 것일 뿐것은 아닌지요? 저는 모세가 창세기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적인 확실한 지지 구절은 없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①~④까지 내용중에 창세기를 직접 언급한 구절도 있는지요? 09.07.02 08:46
사랑나누기 '창세기 저자는 모세'라는 명시적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댓글에서 밝힌대로 <오경(창세기 포함)=율법서=모세의 율법책>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니 믿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도 저자가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통하여 저자를 확인 또는 유추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설명력이 부족하여 반석1님을 이해시켜드리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09.07.03 19:28
반석1 어찌되었던 사랑나누기님의 수고로 말미암아 모세 오경이라고 규정한 내용의 근거구절들을 확인 정리가 되어 감사합니다. 09.07.02 10:37
사랑나누기 저도 반석1님과의 댓글 나눔으로 좋은 공부하였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쁜 하루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09.07.03 13:25

 

목사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1. <목사 제도는 언제부터 생기게 됐나요?( 도입 배경과 시기 > → 목사(pastor)는 종교개혁으로 로마 천주교에서 기독교(개신교)로 회복하면서 천주교의 사제 대신 등장한 직분입니다. 영국의 경우는 감리교, 침례교가 영국의 국교인 영국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등장했습니다. //1)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1901. 5.14. 김창식, 김기범) //2)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 선교사 33명모임, 한국최초의 목사 7명을 장립) 그러나, 진리를 선포하는 ‘목사’의 역할은 열 두 제자들의 사역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합니다.  23:09
사랑나누기 2.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전도 과정을 거치며 일정 기간이 지난 자만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 교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장로교(합동)에서는 다음과 같이 시행하고 있습니다. ①해당 교단의 신학대학원(* 재학 중에 교육전도사로 종사함) 졸업 ->②노회의 강도사 고시(면접, 필기) ->③노회의 강도사 인허 ->④1개년 이상 교역종사 ->⑤노회의 목사고시(면접, 필기) ->⑥노회의 안수 ->⑦교회의 청빙 ->⑧노회에서 임직식 -> ⑨교회에서 위임 예식 ->⑩위임(담임)목사  23:13
사랑나누기 3. <전문 또는 정규 신학대학 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사람은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는 것인가요?> → 안수 받을 수 없습니다(위 2항 참고).  23:14
사랑나누기 4. <목사의 권위는 주어진 것인가요? 주어지는 것인가요?> → 목사는 예배를 집례하고 설교를 할 수 있으며, 예식 집전(집례), 축복권(축복기도와 안수)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하는 직무는 개인 설교자의 종교적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교회적 사역입니다. 따라서 지교회의 위임목사로 시무하는 순간부터 권위는 주어진(완료형) 것입니다. 목사의 권위는 목회하면서 점진적으로 주어지는(진행형) 것이 아닙니다.  23:16
사랑나누기 5. <목사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인가요?( 성도의 입장에서 ) > →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교회 가운데 그 생명의 양식을 진설하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경 말씀에 합치될 때에만 절대적입니다. 성경과 위배될 경우 최선의 방법으로 목사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목사가 혹 실수를 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23:21
사랑나누기 6.<목사의 사례금은 어떻게 이루워지는 것인가요?> →//1. 성경의 근거 : ①기업이 없이 성소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생활비(민18:21-24;신12:5-19,14:22-27;히7:5-9) ②양떼를 기르고 양떼의 젖을 먹을 수 있음(고전9:8) //2.도입동기: 자비량 하는 바울의 예를 주로 인용합니다만 바울도 협동목회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비량으로 설교 준비에 전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사례금의 책정 : 일반적으로는 청빙 시 계약에 의하여 결정되고, 변경 사항은 당회의 의결을 거쳐 결정되고 있습니다.  23:27
사랑나누기 7. <십일조는 꼭 교회에 해야만 하나요 ? 아니면 장애자 단체, 봉사단체 등에 무기명으로 보내면 안 되는 것인가요?> →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사용처를 정하여(다른 단체) 드린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행위입니다. 다른 단체를 돕고 싶다면 구제금으로 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무기명은 좋습니다. 이름을 적는 것은 교인 수가 많은 교회에서는 개별 면담이 어려워 성도의 신앙상태를 확인하는 자료로 쓰이고 있음도 유념하여야 합니다.  23:35
 agok 사랑나누기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나누기님이 이런 문제에 정통하신 것 같아서 제가 또 몇가지 질문으로 사랑나누기님을 번거롭게 하게 되었네요. 노회같은 상급기관이 따로 없어서 감독을 받지 않고 개 교회의 완전 독립성이 주어진 교회(침례교)의 경우, 공동의회에서 가결하여 청빙한 목사님은 따로 그 교회에서 위임목사 결정을 하지 않는 한 일단은 무조건 임시 목사로 간주하는 것인지 또 임시목사에 대해 신임투표를 통한 해임이 성경적으로 교회법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원로 목사님과 담임 목사님간의 갈등과 분쟁시에 성도들은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하는지도요 ?  03:55
사랑나누기 과찬이십니다. 이런 문제에 정통하지 못합니다. 질문하신 것에 대하여 의견을 좁은 소견을 올리니 한심하다 생각않으시길 미리 부탁합니다. //1. <공동의회에서 가결하여 청빙한 목사님은 따로 그 교회에서 위임목사 결정을 하지 않는 한 일단은 무조건 임시 목사로 간주하는 것인지?>- → 미국 침례교회의 경우 교회마다 목사 청빙에 관한 교회법이 조금씩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질문의 상황으로는 청빙한 목사님의 목사 위임 예식을 교회에서 거행하지 않은 이상 임시목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임식 전의 목사의 지위는 임시목사이기 때문입니다.  07:16
사랑나누기 //2. <임시목사에 대해 신임투표를 통한 해임이 성경적으로 교회법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 임시목사에 대하여 장로교단에서는 그 시무 기간이 되면 공동의회에서 신임을 묻고 있습니다. 부결 시에 임시목사로 시무하거나,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침례교회에서도 비슷하게 운영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직임을 제비뽑아 주었고(대상25:8), 해임이 아닙니다만 추천 받았던 <요셉>이 제비뽑기에 뽑히지 않아 사도 수에 가입하지 못한 경우가 있고(행1:25), 투표도 하였습니다(행26:10).  07:18
사랑나누기 3. <원로 목사님과 담임 목사님간의 갈등과 분쟁 시에 성도들은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하는지요 ?> → 인간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입장입니다. 그러나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담임 목사의 입장에 있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담임 목사를 청빙할 때 교인들이 법적인 동의를 하여, 청빙의 책임이 교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로 목사님은 자신의 영향력을 교회에 행사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 원로 목사님은 새로 취임한 담임목사님을 배려하여 타지방, 심지어 외국으로 이사한 경우도 있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는 미련 털고, 물러나서 기도의 무릎으로 사시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07:32


방언에 대하여


상수리
저는 윗글이 십분 이해됩니다. 늘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는 한가지를 사랑님께 여쭈어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가지 신학에 대해 공부하고 잘 알고 신실한 분이 방언을 아주 호평을 합니다. 널리 권장하는 차원에서라기 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혼자 기도할 때에..기도가 잘 안될때..오래 기도하고 싶을 때..방언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많은 이들을 보았습니다. 상식이 있고 인격이 있는 분들이 다만 -지절거림-에 불과한 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합니다. 마음으로는 자기의 생각을 기도하고 입으로는 방언이 나오는 것인지요? 08.08.26 19:44
사랑나누기 올바른 기도는 자신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으로 기도 인도를 할 때 중언부언 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문을 미리 써서 읽으려 해도 달리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 마음 속으로 준비한 기도를 하려는데 막상 기도할 때에 성령님께서 달리 인도하시는 경험을 종종 하였습니다. '기도가 잘 안 될 때, 오래 기도하고 싶을 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성령님을 조종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흥분상태는 중독 현상과 같다고나 할까요. 세상에서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이 중독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지적인 수준으로 잣대를 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08.08.27 00:21
상수리 고전 14:15 에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한다는 말이 무슨 내용인지요? 08.08.26 19:50
사랑나누기 여기서 말하는 ‘영’은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감정’, 즉 ‘흥분될 수 있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고전14:15)의 말씀은 감정적으로 흥분된 기도나 찬양보다 남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기도나 찬양이 더 좋다는 표현입니다. 08.08.27 08:16
상수리 고전12장에 보면 방언과 함께 통역의 은사도 같이 언급합니다. 그 때는 방언과 통역이 같은 비율로 은사가 주어진것인가요? 지금 방언하는 사람은 많이 볼 수 있지만 통역하는 사람은 별로 못 보았습니다. 08.08.26 19:52
사랑나누기 '각종 방언'(고전12;10)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방언의 형태는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까지 다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고전14:28)이란 말로 보아 같은 비율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르다면 그 때는 메세지가 있는 방언이 많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글쎄요? 08.08.27 00:27
상수리 한번씩 간증 같은데서 방언과 통역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거나 읽게 됩니다. 참 놀랍게 여겨지지요. 그와는 반대로 엉터리 통역에 대한 예화도 있습니다. 엉터리 통역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 할까요, 정말 그렇게 되어져 나오는 것일까요? 제 질문이 좀 유아틱하지요? 08.08.26 19:57
사랑나누기 이 카페에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방언 하신 분의 방언을 녹음했다가 통역하신 분한테 통역을 부탁했더니 같은 방언을 부탁할 때마다 통역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가 옛날에 겪은 경우는 자기가 방언을 하고 그 자리에서 통역을 한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여 얻었다는 말이 토정비결 보는 수준이었습니다. 40대가 되면 자수성가하고 크게 쓰임 받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자기 최면이죠. 일종의 환각상태라고 할까요? 저의 대답이 더 유아틱하지요? ^^ 08.08.27 00:36
agok 질문도 대답도 전혀 유아틱하지 않고 제게는 판타스틱합니다.^^ 너무 듣고 싶었던 대답만 듣게 된 것 같아서요 08.08.27 12:52
상수리 사랑나누기님 감사합니다. 방언 문제로 신경쓰기 보다 그 시간에 제 기도나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08.08.27 00:44

 

사도신경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agok님, 반갑습니다. 혹 저가 <기독교 자료실> 게시판에 올린 <569 '사도신경'(使徒信經, apostle's creed)에 대한 이해>란 글을 읽으셨는지요? 읽어 보셔도 같은 생각이신지 질문해도 될까요? 08.08.22 05:01
agok 예! 어제 읽었고 변론 글을 달려다가 또 논쟁이 일어 날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자극하지만 않으면 그런 견해도 있다는 것을 읽는 선에서 좋다고 여겼습니다. 또 그런 견해에서 바른 마음을 가지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는 줄을 알기에 저는 그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구요 그렇지만 제가 이미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기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는 것은 제게 걸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08.08.22 05:13
agok 그 나오게 된 배경이나 목적을 떠나서 좋은 관점에서 보고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면 유익이 있지 않겠냐 하는 분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신앙이고 그 나오게된 배경과 목적 그리고 일부 구절들 때문에 또 그것이 완벽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제 신앙양심을 위해 먹지 못하는 저는 그냥 연약해서 채소만 먹겠다 라는 신앙으로 치부하셔도 됩니다. 다만 채소만 먹는다고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지는 말라는 것이죠 08.08.22 05:17
사랑나누기 그런데 위의 '사도신경의 검토'와 '결론'의 글에서 많은 변론의 덫이 놓여진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글만 읽는 분들은 한쪽 주장만 읽고 편견을 가질 수 있는 소지가 많거든요. 사실 저도 바른 신앙(?)을 갖기 전에 위의 자료와 같은 글을 읽고, 쾌재를 부르며 기독교인을 공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08.08.22 05:28
agok 적극적인 해명을 넘어서 변론의 덫이 놓여졌다고 생각하고 공격성 글로 받아들이신다면 다시 변론에 들어 갈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사실 글을 어젯밤에 작성해 놓고 올릴까 말까 망설이며 기도하다가 오늘 아침 일어나서 결정을 내리고 올린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배경이나 깊은 것을 모르는 분들이야 제 글로 인해 편견을 가질 소지가 다분히 있겠지만 제 글에 변론을 하실 분들은 사도신경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있고 강한 소신을 가지신 분들이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방어 차원이 아니라 제가 쾌재를 부르며 공격할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글 진작에 신학 질문코너에 올려 놓았을 것입니다. 08.08.22 05:37
사랑나누기 agok님의 믿음이 옳고 그르다는 변론이 아니라, 위의 글(새교회사/정수영)에 대한 변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사도신경'이란 이름이 지어질 때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위에서 정수영씨가 이 책을 언제 발간했는지 모르지만 이미 오래 전에 종결된 논의도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소신'이라 하고 '착각'이라 단정하였기 때문입니다. 08.08.22 05:48
agok 저는 제가 퍼온 글이 다 맞는 것 같으니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지 말자 라는 입장에 서 있는게 아니라 이런 견해도 있고 저런 견해도 있으니 다른 견해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양심상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는 것이 걸릴 수도 있음을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이 이루어져서 더 나은 신앙고백을 개신교 자체적으로 만들어 신앙고백 하였으면 하는 바램도 조금은 가미되어 있구요. 정수영님의 글에 대한 변론은 저에게 댓글로 하시기보다는 그 글쓴 분에 대해 반론글을 논거를 들어 자세히 써 올려 주시면 두 견해를 비교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외출할 일이 생겼으니 댓글에 바로 반응보이지 못해도 이해해 주세요 08.08.22 06:11
grace 저는 아곡님이 사도신경을 안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단에서 사도신경을 공격하고, 또한 교회를 제도권 벽돌교회라고 굳이 칭하는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사탄신경이라고 하는 글을 얼마 전에도 또 보았습니다, 이미 아곡님이 주장하는 글들도 보았었고 그 글이 잘못이라는 글들도 보았었습니다,아곡님이 사도신경을 안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제 댓글이 아곸님에게는 자극이었을 수 있었겠네요 08.08.22 18:03
grace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그런것들을 주장해 왔던 분들이 칼빈을 공격하는 분들이 주였고 별로 건전한 신학사상을 가진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사랑하는 자유를 이해해주는듯이 말하시는데 그 사상은 개혁신학의 정통적인 사상일 뿐입니다, 아곸님이 이해안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성경적이냐가 중요하지 어떤 사람이 이해해주느냐는 토론가운데에 생기는 감정의 문제이고 카페운영자로서 대부분의 회원들에게, 리안에서 올바르게 알려야 하는 사명 때문이기도 합니다, 08.08.22 08:28
agok 성도간에 진실된 사랑으로 서로 교제하고 용납하기 위해서는 자유함이 있어도 그 자유함을 절제하고 또 수고로이 이해를 구하고 이해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내 견해가 하나님 앞에서 옳고 바르면 되었지 다른 사람들의 이해가 무슨 필요가 있나 싶어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할 의무도 있고 그 의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상호 이해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하지요. 바울도 서신서에서 그렇게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이해를 구하고 설명하고 복음전파를 해나갔구요 . 운영자로서의 사명 때문에 쓴 댓글로 인해 제가 자극을 받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하시지만 저를 대상으로 해서 쓴 글이 아니라는 설명만으로 저는 족합니다 08.08.22 08:05
agok 덕분에 칼빈의 신학설을 지지하고 바른 신학사상을 가진 분들도 사도신경을 가지고 기존교회를 비판하기 보다는 개혁의 긍정적인 희망을 품고 개인적으로 사도신경을 수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남침례교가 지금 타락의 길로 가고는 있어도 그 시작은 건전한 신학설에 바탕을 두고 가장 성경적으로 해나가려는 교파중의 하나라 생각하며 장로교인 제가 다니는 교회도 기존의 전통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수정할 것 수정하고 수용할 것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개혁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08.08.22 08:04
grace 아곡님이 사도신경을 안하는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합니다, 당연히 정죄는 없습니다, 다만 요즘 신천지에서도 사도신경을 공격많이 합니다,그리고 다른 이단에서도,,, 08.08.22 08:33
agok 그리고 제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분들이 어느 성경적인 논거를 들어서 잘못되었다고 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저 전통에 대한 반란으로 보고 잘못이라 한 것이지 비성경적이라고 한 것은 아니지요. 카톨릭에서 시작된 비성경적인 유아세례를 가지고 루터와 칼빈마저도 그것을 옹호하는 사상을 자신의 신학안에 넣어 두었고 오늘날까지 장로교에서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한 신학설을 무조건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만 취하고 옳지 않은 것은 개혁해나가는 것이 오늘날에도 필요한 개혁이라고 봅니다. 사도신경이나 유아세례는 성경에 없는 것이니 꼭 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이니 고수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08.08.22 08:46
grace 저도 다시 사도신경에 대해서 글들을 보면서 아곡님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을 하든 안하든 본질적인 면에서 올바른 가치관으로 선택한다면 무리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아세례에 대해서는 조금 견해가 다릅니다, 08.08.22 12:18
agok 제가 다니는 장로교회에 개혁은 일고 있지만 아직도 유아세례는 남아 있더군요 어른들은 강가에 가서 침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지난 주에 알고 내가 정말 장로교 다니는 것 맞아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나씩 전통을 바꾸어 가고 있는데 교인들 대다수가 연로한 노인들이고 두 분의 목사님이 각 33년씩 담임 목회를 하고 은퇴한 뒤 다음 달부터 새 담임 부임하는 상황입니다. 제가 침례교에서 쫓겨나 이 미국교회를 다니게 된 것을 제 축복으로 본 것은 이 교회가 예배부터 성경공부 선교 구제 성도간의 교제들이 너무 모범적으로 행해지는 교회라는 사실을 매주마다 목격하고 매주마다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08.08.22 09:10
agok 저도 오늘 글을 올리면서 검색해보니 신천지에서 마귀신경이라고까지 비판하였더군요. 어쩌면 꼬투리를 잡아 자신들을 이단시하는 기존교회들을 공격하고 역으로 이단으로 몰고가 자신들이 더 바르게 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픈 불순한 목적이라고 보여집니다. 08.08.22 09:17
agok 유아세례대신 그냥 예수님처럼 축복기도해주고 부모들이 자녀를 신앙안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도록 권고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보지만 칼빈이나 루터는 나름대로 교리를 펴서 이 유아세례를 정당화 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유아세례도 카톨릭에서 나왔고 개혁은 했어도 일부 전통을 한꺼번에 죄다 개혁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무엘 이후로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던 율법을 다시 복원시키고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요시야 왕처럼 카톨릭에서 나온 구습을 완전히 타파했으면 하는 바램이 개인적으로 있습니다. 08.08.22 09:24
grace 거룩한 카톨릭교회를 믿습니다는 성령께서 세우신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의미이며(캐톨릭이라는 말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또한 이는 지상과 하늘의 한 교회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을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예수는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 위해 선고되어야 했던 엄격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과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08.08.22 08:39 grace 그런데 사도신경을 이렇게 결론하신 목사님도 계십니다,사도 신경라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변형되어 왔으며 카톨릭적인 냄새가 지하게 배어 있으며 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 합니다. 사도 신경을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08.08.22 08:49
grace 만약 사도신경에 명시한 어떤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다르게 가르친다면 어쩌면 이단일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경(the Apostles Creed)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경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08.08.22 08:49
agok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나와 있지 않아도 그런 견해에서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행하기 때문에 카톨릭과 무관하게 개신교 나름대로의 교리를 가지고 신앙고백하는 것임을 알고 있어서 저 역시도 이해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더 나은 개신교 자체의 신앙고백을 만들어 암송하고 신앙고백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사도들도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은 빌라도와 동정녀 마리아 이름을 매 신앙고백때마다 올려야 하나 싶을때도 있습니다. 08.08.22 08:53
agok 카톨릭의 구습에 반대하고 개혁을 외쳤던 개신교도 처음에는 세례가 아닌 침례를 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침례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핍박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 정죄하면 정말로 유대 바리새인과 개신교와 카톨릭이 다를 바 하나도 없지요. 08.08.22 09:02
사랑나누기 진리 안에서 자유를 찾기 위하여 두서 없이 의견을 드립니다. 성경에 '사도신경'이란 말이 없으나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라'는 말을 예수님께서도 하셨고(마10:32), 사도들도 하였습니다(롬10:10;요일4:15). 사도신경의 내용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낸 신앙 요약문입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걸림돌이 될까요? 또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는 없으니 '삼위일체'를 빼놓고 성경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논할 수 있을까요? 08.08.22 11:00
agok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으로 하는 것이 걸린다는 것이지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감사기도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고 주기도문 역시도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저도 사도신경이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요약했다고 만족해 했지만 다시 여러 견해를 접하고 나니 더 이상 명확하지도 간단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와 절대주권이 성경에 맞지 않고 애매모호하거나 미씸쩍거나 불완전한 것이라 생각되고 또 그것 없이도 충분히 성경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08.08.22 13:28
agok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일부 신학자들은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것이 가장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바른 단어나 교리라면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신경하고 삼위일체는 같은 선에서 비교할 대상이 아니지요 08.08.22 13:30
사랑나누기 '사도'(使徒)라는 용어 때문에 저항이 오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 외에는 거의 '사도'(使徒)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고, '사도신경'(使徒信經)의 내용이 신약 성경에서 신앙고백의 요체를 드러낸 것이니 이왕이면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기 보다 권위를 부여하는 의미도 갖자고 해서 '사도신경'(使徒信經)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작명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내용이 '사도신경'에 축약되어 있는데,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이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데요? 08.08.22 13:46
agok 삼위일체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설명하기에 다른 대체 교리가 필요 없을만큼 완벽하게 성경시작부터 끝까지 성경에 부합되는 단어요 교리이지만 사도신경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이단을 제외한 모든 기독교에 진리로 인정받고 있지만 사도신경은 그렇지 않기에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명칭보다 그 배경과 내용이 걸린다는 것이죠 08.08.22 14:11
사랑나누기 agok님께서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논거를 들어서 잘못되었다고 하신 분이 없다'는 말씀은 위의 글이 '정수영님의 글에 대한 변론은 저에게 댓글로 하시기보다는 그 글쓴 분에 대해 반론 글을 논거를 들어 자세히 써 올려 주시면'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이 성경적이라는 것은 저의 글에서 밝혔습니다(관련 성경 요절 제시함). 그것에서 비성경적인 것을 먼저 지적하시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08.08.22 11:22
agok 한글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성경에서 나오는 진리와 역사적 사실에 위반되는 것이 없어 보임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영어로 된 부분은 논란의 소지가 있을 부분이 있고 저에게는 사도신경이 완벽한 신앙고백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절 사실을 언급할 뿐이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화목제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통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진리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카톨릭에서 나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고백문이기에 카톨릭의 신앙고백으로 충분할지는 몰라도 사도들이 진짜 신앙고백문을 만든다면 그리 만들지 않았을 거라 자신합니다. 08.08.22 13:55
사랑나누기 agok님의 생각과 같은 의견이 있어 '사도신경 연구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개정하여 지난 2004년 12월 3일에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정된 것도 교단 또는 신학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많아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한 인간의 힘으로 완전무결한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논의에서도 성령님께서 개입하시고 있으시며, 하나님의 사역은 진행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08.08.22 14:22
agok 그것은 금시초문이네요 그래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교계가 개혁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은 있었구나 생각되어 희망이 보입니다. 08.08.22 14:42
사랑나누기 '사도신경'(使徒信經, apostle's creed)의 이해>라는 저의 글에서 로마천주교의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면이 다르고, 해석이 다름을 드러내었습니다. 예를 들어 문면에서의 다름은 기독교에서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나'로 시작하나 천주교에서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해석의 다름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있으나 천주교에서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고' 있습니다. 08.08.22 13:32
사랑나누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심’ 의 바른 의미를 이 카페에서 coldblooded 님이 밝힌바 있습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 명령을 따라 주님을 죽인 사람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와 로마 병사들이었습니다(눅23:23-25). 빌라도에 의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8.08.22 11:03
agok 제가 하고픈 신앙고백은 단순 사실 열거가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나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부분에 더 촛점을 두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강조하는 신앙고백입니다. 08.08.22 14:12
agok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행 3장 13-15)/ 이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 27:24-25) 08.08.22 14:20
사랑나누기 님의 의견을 수용하려면 성경 그대로 신앙고백 해야 하는 데, 어떻게 하죠? 성경을 다 읽으려면 우와! 몇 날이 걸려야 하는데요. 신경(?)을 많이 쓰셨으니 서로 웃자고 한 말입니다. 08.08.22 14:51
사랑나누기 개인적인 감정은 '성도간에 진실된 사랑으로 서로 교제하고 용납하기 위해서는 자유함이 있어도 그 자유함을 절제하고 또 수고로이 이해를 구하고 이해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agok님과 동일합니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주님의 뜻을 찾아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리 안에서 자유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승리하는 agok님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08.08.22 11:13
grace 공감합니다, 08.08.22 12:19
agok 제가 제 주장을 변호하는 데만 급급해 하느랴 이 부분을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 토론을 넘어서 감정적인 논쟁으로 치닫지만 않으면 저 역시도 이런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의견이 달라 공방전을 벌여도 그것을 견해나 주장에 한정하고 상대의 신앙관이나 인격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서로 노력한다면 유익이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항상 먼저 덕담을 해주시는 사랑나누기님의 자세에서 진한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신앙경륜을 느끼게 됩니다. 제게 빌어주시는 그 평안과 복이 사랑나누기님에게 곱절이 되어 돌아가기를 저도 기원합니다. 08.08.22 16:11
agok 그래서 제가 처음에 전제를 했습니다. 사도신경이 비록 주기도문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어도 그 배경이나 목적은 상관없이 성경에 부합되는 긍정적인면을 보고 별 문제가 없는 신앙고백으로 인정하고 매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전통을 고수하는 것을 이해는 한다구요. 그렇지만 저 같은 경우 그 배경이나 완성되어가는 과정 , 취지가 걸리고 고백문에 애매모호한 부분들 카톨릭 성향이 느껴지는 부분들은 아무리 우리나라 번역이 그것을 완화하려고 노력했어도 어쩔 수 없이 의식되기 때문에 굳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하기에 걸린다는 것이며 그점을 이해해 달라고 이리 수고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08.08.22 14:33
사랑나누기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데 agok님께서 인용하신 자료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는 성도에게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의 글에서 사도신경이 '계속 보완되고 첨가되었다'고 하면서 왜 지나간 시대의 천주교와 연관시키는지? 또한 계속 보완되고 첨가되면 '신앙의 요약이라고 하는 말은 할 수가 없다.'는지? 논리의 모순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추출하여 신앙의 요체로 인정한 신앙고백이 필요를 못 느낀다면 난처해지는군요. 08.08.22 14:11
agok 원래의 사도신경에 없었던 것들이 후대로 거쳐가면서 천주교에서 그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보안되고 첨가되었고 전파되어 전통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도신경과 천주교는 당연히 연관이 있지요 그리고 제가 위에 달은 댓글을 읽어 보시면 왜 어떤 신앙인들에게는 사도신경이 불완전하고 걸림이 되는 신앙고백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깨달은 마음으로 사도신경보다 더 나은 더 성경적인신앙고백을 할 수 있고 차라리 성경에 걸릴 것 하나 없고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사도신경보다 더 완벽한 신앙고백 기도문으로 더 낫다고 봅니다.아니 완벽한 신앙고백기도문이라고 생각합니다. 08.08.22 14:32
사랑나누기 참고로 인용하신 정수영 목사/지금은 선교사(?)의 글이 교회사를 하신 분으로서 교단의 입장 때문인지 객관성이 결여된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의 글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이만 접으면 어떻겠습니까? 08.08.22 14:53
agok 예^^ 믿음으로 걸림이 없이 하는 사도신경 신앙고백도 주께서 인정하실 것이고 또 걸려서 그것으로 안하고 다른 것으로 해도 주께서 그 믿는 마음을 아실테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부활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안에 거한다면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사랑나누기님과 그레이스님이 제 입장을 배려해 주신 덕분에 이 정도 선에서 끝낼 수 있게 되어 한시름 덜었습니다. 08.08.22 15:51

 

삼위일체에 대하여  


석천 안녕하세요 사랑나누기님. 님의 글을 읽고 맺혔던 그 무엇이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전 신앙생활이 짧아 때로는 궁금한 것이 많아도 스스로 깨닫아야만 하는 ..위의 글처럼 삼위 하나님에 대해 비유가 많고 내 생각과 달라 말하고 싶어도 말도 못하는 그런 심정을 사랑나누기님께서 풀어 주셨습니다. 감사 합니다.제가 공감을 하는 부분은 ( 아직은 잘 모를수도 있으니 지적해 주세요)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삼위라는 말이 없었을 것 같아요. 예수께서 오시면서 사람들은 비로서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이라 부르기 시작하고 각자의(사도)의 관점에서 한분의 하나님을 표현 속에 비유하다보니 뜻과 표현이 다르게 표현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08.09.20 13:33
석천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문제이기에 문제가 아닌양 위의 표현처럼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나누기님 전 처음엔 항1번 한사람의 비유를 보며 어떻게 이런 억지가 다 있나 싶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항들도 어떻게 이런 일이 ..모든 비유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알겠지만 논리가 맞지 않기에 ...반박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지만 아직은 애송이라..하면 삼위 하나님을 어떻게 한 분으로 받아드릴 수 있었느냐 가 문제인데 제 경우에는 피조물인 인간이 한나님을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표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마음, 정신, 육체가 하나가 되어 존재함을 느끼듯 08.09.20 13:53
석천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따라서 2번항 나무의 비유처럼 뿌리가 있어 줄기가 생기고 가지가 생기고 잎이 생기고 열매가 생기고 ...때문에 윗글과 비슷한 비유들의 뜻은 알겠지만 바르다고는 볼 수 없으며 순위적인 개념이 아니라 원 개념, 하나인 것이라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전 그렇게 염려 하지는 않았는데, 윗글을 보며 인간관점의 개념이 잘못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르침을 받고자 댓글 올렸습니다. 말씀을 부탁 합니다 08.09.20 14:08
사랑나누기 석천님께. 저도 잘 모르지만 질문을 바탕으로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죠. 첫째,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삼위라는 말이 없었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one person)만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근거는 확실히 언급되어 있었습니다(참조: 본 카페 성경사전 <전신갑주> '삼위일체론의 근거') 나아가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성경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의(敎義)입니다(성경사전, 삼위일체 참조). 08.09.20 17:23
사랑나누기 둘째, '삼위 하나님을 어떻게 한 분으로 받아드릴 수 있었느냐 '는 문제에서 님께서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마음, 정신, 육체가 하나가 되어 존재함을 느끼듯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는 삼분설(三分說: trichotomy)을 의미합니다. 삼분설은 크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전신갑주: 삼분설 참조)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구분하는 이분설(二分說, dichotomy, 전신갑주 참조)이 지지를 받고 있기에 마음, 정신, 육체에 성부, 성자, 성령을 대입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충돌합니다. 08.09.20 17:24
사랑나누기 셋째, '인간관점의 개념이 잘못일 수도 있다'는 문제는 잘못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위의 사례가 부적당한 이유 중의 하나가 양태론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입니다(성경사전, 양태론 참조). 따라서 세 분 하나님이면서 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성령론으로 접근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의 영도 성령이고(요15:26;고전2:10), 성자 하나님의 영도 성령이고(요14:26) 성령 하나님도 성령입니다(고전2:10;행1;8), 따라서 삼위 하나님이 성령으로 일체가 된다는 신학입니다. 08.09.20 17:35
사랑나누기 석천님. 혹자는 '삼위일체론을 명확히 설파하면 신학을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저의 답변도 궁색합니다. 이 글을 접하는 다른 분들께서 더욱 본질에 접근하는 신학을 개진하여 주시기를 고대합니다. 08.09.20 17:40
석천 제가 질문을 잘 하였습니다.저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사랑나누기님의 말씀을 듣고 혼란은 없으며, " 성부 하나님의 영도 성령이고(요15:26;고전2:10), 성자 하나님의 영도 성령이고(요14:26) 성령 하나님도 성령이다(고전2:10;행1;8), 따라서 삼위 하나님이 성령으로 일체가 된다 " 는 말씀을 믿고 따르며 좀더 말씀을 새겨 보겠습니다.감사 합니다 08.09.20 18:47
grace 이 신학이 위험하다고 사랑나누기님이 말하신 것 같은데요? 바로미님이 이에 대해서 글을 올리셨으니 참고바랍니다, 08.09.22 08:28
바로미 위에서 사랑나누기님이 이런 신학도 있다는 것을 석천님께 알려드렸는데..그 신학은 상당히 위험한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사랑나누기 성령의 다른 이름으로, //1) 성부 하나님과 관련하여 : 하나님의 신(출31:3), 여호와의 신(삼상16:13), 하나님의 영(롬8:9) //2) 성자 하나님과 관련하여 : 주의 영(행5:9) 예수의 영(행16:7) 그리스도의 영(롬8:9;벧전1:11) 아들의 영(갈4:6) //3) 성령 하나님과 관련하여 : 성신(시51:11) 보혜사(요14:16)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한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는 세 분 하나님을 명백히 전제하면서 이 세 하나님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있다.'는 삼위일체 도식에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일체'를'영'으로 접근하는 것도 무리일까요 08.09.22 12:49
agok 저도 사랑나누기님과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나 봅니다. 위에 인용하신 위트니스 리의 설명은 이해하기 힘들고 또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할하시는 것이 성령이고 예수님의 영도 성령이니 각각 독립적으로 나타나시지만(삼위)가 한 영으로 한 본체로 하나의 주가 되는(일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접근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요./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주도 하나이요..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 그런 접근마저도 무리가 된다면 삼위 일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지혜로 입에 올리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08.09.22 13:00
바로미 위 덧글에서 사랑나누기님이 제시하신 성경구절에 나오는 단어의 <영>은 본체를 뜻하는 <영>이 아니라 제3 위격을 뜻하는 <영>입니다. / 그런데.. 영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08.09.22 16:49
바로미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가 본체를 말하는 <영>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상호내재의 개념으로 위의 단어들이 말하는 <영>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삼위격 중에 제3위격만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08.09.22 16:52
바로미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할때 위격과 본질을 말합니다. 그 중에 위의 단어들에서 나오는 <영>혹<신>은 삼위를 포함한 <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제3위격하나님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삼위를 소개할 때 각 위격들의 사역을 토대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즉 각 위격들이 어떠한 사역들을 중점으로 하시는지를 통해 성경에서 삼위일체하나님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요. 상호내재와 상호침투는 위격간의 관계이지.. 위격과 본질과의 관계는 아닙니다. 각 위격들의 실체는 본질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08.09.22 16:57
바로미 그래서 우리가 제3위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이지.. 제3위 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논술을 하려면 성경적 단어에서 <영>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 각 위격들을 지칭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여야 합니다. 참고로 성령은 위격이 빠진 순수한 본질(본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위의 단어의 영이 제3위를 치칭하는 한 제3위를 순수한 본체로 대체하여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08.09.22 17:00
바로미 지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제3위 성령으로 해석하지 않고 <부활하신 제2위 성자>로 해석합니다.즉 단어를 잘못 해석하고 있어서 큰 오류에 빠진 경우입니다. 만약 위의 제3위격을 지칭하는 <영>을 본체적으로 접근하면 윗트니스 리와 같은 오류에 빠질 위험이 다분히 큽니다. 08.09.22 17:03
석천 바로미님의 말씀은 " 삼위로 인해서 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삼위로 나타낸 것이라 "라는 말씀이다라는 생각이 들고요. 사랑나누기님의 '하나님의 한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는 세 분 하나님을 명백히 전제하면서 이 세 하나님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말씀은 세분 하나님이 계시면서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라는 말씀으로 생각 됩니다.두분 말씀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소견으로는 일체가 삼위로 나타내심이니 곧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결론에 이름니다.제 생각의 무리가 없다면 제가 좀더 하나님 말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남겨 주셨으면 합니다. 08.09.22 16:42
석천 바로미님,사랑나누기님,agok님 말씀 감사 합니다. 08.09.22 16:41
사랑나누기 <삼위일체론의 도식인 하나님의 한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는 세 분 하나님을 명백히 전제하면서 이 세 하나님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있다. 즉 세 하나님의 신성에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고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 신성의 교류를 통한 하나 됨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는 김명용 교수의 삼위일체론을 읽고, '한 본질' 즉 '동일한 신성'을 어떤 용어로 표현한다면 성령이 아닌 신성의 개념으로 '영'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였습니다. 08.09.22 17:53
사랑나누기 <상호내재와 상호침투는 위격간의 관계이지.. 위격과 본질과의 관계는 아닙니다. 각 위격들의 실체는 본질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이해는 되는데, 물질사관에 세뇌 당한 머리라 실체가 잘 잡히지 않는군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이 큰 믿음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보이는 것을 구하는 저의 작은 믿음에 서글픔을 느낍니다. 깨우쳐주신 바로미님께 감사합니다. 댓글로 참여하신 분들께도 바로미님의 신학적 견해가 바르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08.09.22 18:01
바로미 성경에서는 <영>이란 단어가 한 본질을 뜻하는 단어로도 쓰이는 구절도 있고 성령을 뜻하는 단어로도 쓰이는 구절도 있기에 문장을 통해 그 <영>이 본질을 말하는지 성령을 말하는지만 구분하시면 됩니다. 08.09.22 17:46
바로미 그리고 그다음은.. ㅎㅎㅎ <물질사관에 세뇌당한 머리> ㅎㅎ 재미있는 표현이십니다. 하긴 물질적 개념에 익숙한 우리들이 순수한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죠.. 그래서 오류에만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성령께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 그 단어 쓰임과 문장 구성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08.09.22 18:01
석천 전 어리벙벙 하기만 합니다..........사랑나누기님 ! " 물질사관에 세뇌 당한 머리" 이거 유행어 되는 거 아닙니까...고마우신 말씀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08.09.22 23:05
이도홍 바로미 님의 명괘한 해석에 감사드립니다, 08.09.22 20:49
agok 댓글 하나 올려놓고 자고 일어나니 다음날 결론이 화평스럽고 아름답게 나왔네요.^^ 물질사관에 세뇌 당한 머리라.. 성령의 감동에 의하지 않으면 삼위일체의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니 석천님의 어리벙벙에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상태에 놓여 있지 않나 싶습니다. 08.09.23 03:14

 

선악과 해석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사람이 늙으면 신경계 조직이 흐트러지고, 일부 끊어지거나 망가져 건강하던 때의 생각과 논리와 다르게 전개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노망이나 치매 등이 그 사례라 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날'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마6:1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08.09.04 23:50
agok 바로미님이나 사랑나누기님 생각에도 예수님을 은혜의 선악과로 표현한 것에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올바른 표현도, 바른 성경해석도 아니라는 것이군요. 08.09.05 02:02
바로미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저렇게 해석을 해도 크게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단지 <언약의 대상>과 <언약의 상징>을 구분하셨음 더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딴지를 좀 걸었습니다. ㅎㅎ 08.09.05 08:44
사랑나누기 비유는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데 그 비유에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가지치기 해석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에 이런 경향이 많아서 교단, 교파가 많아진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글쎄요?"라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08.09.05 09:12
grace 저도 사랑나누기님과 동일한 생각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입니다, 더 이상 영해나 자의적 해석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은 안이숙씨 남편 김동환(?)목사한테 배웠다면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석하면서 선악과를 사랑으로만 푸는데 억지가 좀 많았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다른 성경구절도 해석에 무리가 너무 많아서 좀 답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08.09.05 10:00

 

성가대에 대하여

 

제이 jay 질문이 있습니다. //1. 성가대가 성경에 어디에서 비롯됬습니까? //2. 성가대가 왜 교회에 필요한가요? //3. 저희 성가대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별개의 질문이지만 //4. 제가 어느 목사님께 들었습니다. 마귀가 타락하기 전에는 루시퍼(빛나는 자)였다.그리고 음악장(천사장)이었다.위의 말이 맞나요? 맞다면 출처는?

라벤더 성가대보다는 찬양대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09.06.17 22:17

사랑나누기 1-1). <성가대의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 ‘성가대'라는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습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으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성가’라는 말은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합니다. 09.06.18 00:41

사랑나누기 1-2) <찬양대가 성경 어디에서 비롯 되었습니까?> -->레위인으로 구성된 성전 찬양대(대상15:16;대하20:21;왕상10:12)로, 다윗은 레위지파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하도록 지명하였습니다(대상6:31-47,16:4-7). 이 음악가들 곧 노래하는 사람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구원과 사랑의 행동을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시78,81,105편). 09.06.18 00:46

사랑나누기 2.<성가대가 왜 교회에 필요한가요?>--> 찬양대의 찬양은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자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함께 끌고 가는 헌신의 경험을 줍니다. 또한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준비시켜 줍니다(시149:1,150:1-6). 09.06.17 23:30

사랑나누기 3. <3. 저희 성가대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찬양은 온 마음을 다하여(시9:1) 영으로(시103:1) 기쁨과(시63;5) 감사로(시147:7) 행하여야 합니다. 왼쪽 <전신갑주>게시판의 116번/ '찬송, 찬양, 찬미에 대한 이해' 자료에서 13항 '찬양의 올바른 자세'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09.06.17 23:48

사랑나누기 4. <루시퍼에 대하여> -->루시퍼(Lucifer, 빛을 지닌 자)는 ‘계명성’(사14:12)으로 번역되었으며, 찬양천사로 하나님께 반역하여 쫓겨나 사단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왼쪽 전신갑주(성경사전) 게시판에서 157번/ '천사에 대한 이해'를 찾으시면 도움자료가 있습니다. 09.06.18 12:18

박범식 역대상 9장 33절에 보면 레위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따로 거주하며 찬송하는 일에 전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회중찬양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기 15장 20절에서 보듯이 미리암의 선두로 찬양이 시작된 것을 보면 찬양대의 역할은 교회에서 회중찬양시 찬양을 이끌가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09.06.17 23:32

박범식 어떻게 변해야 할지는 교회마다 특색이 있기 때문에 꼭 찝을 수는 없으나 일단 지휘자나 찬양대를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분의 인식이나 태도가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09.06.17 23:35

박범식 루시퍼에 관해서는 보통 에스겔 28장에 나오는 두로왕에 대해 하신 말씀을 통해서 음악에 능한 천사였음을 유추합니다. 09.06.17 23:41

천로역정 사랑나누기 님께서 너무 답변을 잘 해 주셔서 저는 '3번'만 답해 드리겠습니다. 찬양대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지휘자님이 바뀌어야 합니다. 저도 찬양대 베이스 파트를 맡고 있는데 저희 지휘자님 때문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분이 솔로를 하다가 소위 말하는 '삑사리'가 났었고 사람들이 웃자, 지휘자님은 조용하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육의 소리를 들으니까 그저 웃을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시자, 다들 숙연해지게 되고, 어떤 찬양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양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저희는 연습을 하다가 눈물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09.06.18 00:15

천로역정 찬양곡이 쓰이게 된 배경과 곡과 가사에 대해서 성경적인 입장을 말해주며 연습을 하는데, 꼭 소리 내지 않아도 찬양할 수 있다고...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찬양을 하게 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면서...굳이 육적인 소리를 발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항상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기 위해서 단원들이 같이 기도부터 하도록 인도합니다. 심지어 찬양대가 연습 시간을 쪼개서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매번 따로 가질 정도입니다. 부득이하게 저희 찬양대를 자랑하게 되었네요. 09.06.18 00:16

천로역정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지휘자가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어느 단체라도 그렇겠지만 리더의 위치는 단원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찬양대의 변화를 원하신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도 님께서 느끼신 것과 동일하시다면 진정한 찬양을 지휘할 새로운 사람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기도하니까 많이 바꿔주시더라구요. 우리 모두 무너진 성벽의 한 귀퉁이들을 책임지며 보수하는 자세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까요. 샬롬! 09.06.18 00:18

상수리 그 지휘자님 참 존경스럽습니다. 역시 기도가 관건이군요. 09.06.18 00:29

상수리 질문 1.2.3.4 는 사랑나누기님께서 답변을 하셨고요.. 제이님의 상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저도 예전에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찬양대 형편이 좋아졌나 하면 그렇지도 못하구요, 아마 여러 교회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찬양대원들의 예배와 찬양에 임하는 모습도 성실하지 못한 모습이 많지요. 제가 겪어 본 지휘자 중에는 참 신실하신 분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찬양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습도 많구요..특히 목회자께서 이 문제는 잘 몰라서인지 지휘자에게 일임하는듯 했습니다. 09.06.18 00:22

상수리 연습시간에 쫒겨서 찬양에 대한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가 없는것도 문제고, 찬양 자체도 충분한 연습이 안된 상태에서 찬양대에 선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저희 교회만 해당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09.06.18 00:28

제이 jay 많이 조언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음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네요... 축복합니다... ^^ 09.06.18 09:17

석천 역시 도움의 많은 분들이 계셔서 감사 합니다 09.06.21 22:52

 

성령에 대하여

 

RPTministries 문법에 관한 부분이라 조금 난감하기도 하고 성령의 내주 하심이 본질적으로 떠날 수 없음으로 오해하면 안된다고 하니 여기에 대해서, 문법과 성령의 내주에 관해서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0.03.26 09:38
사랑나누기  성령의 내주(-內住)란 성령이 믿는 자의 영혼에 임하여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것을 말합니다(요일4:13).
구약 시대에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제사장, 선지자, 왕, 성막 일꾼, 장로 등)에게만 성령이 주어졌지만,
신약 시대의 경우에는 예수를 구주와 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주어집니다.
구약 시대에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그 일에 충성하지 못할 때에, 그 직분과 함께 성령을 거두어 가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를 믿을 때에 임하신 성령이 떠나시는 일이 없습니다(행1:8).->/ 성경 관용어 사전 /생명의 말씀사
10.03.26 10:05
사랑나누기 그리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의미의 차이가 큰데 윗 글에서는 동일 선상에 올려놓았군요.
1. '성령세례'(聖靈洗禮) ->성령이 사람의 심령에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회개하여 중생케 하는 성령의 사역(고 전12:13)을 말하고, 성령 안에서 능력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눅24:49;행1:8). 구원과 성령 세례는 동시에 일어납니다(행2:38,39;고전12:13). 성령세례는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으며(엡4:5) 소실되는 일이 없습니다.
10.03.26 10:25
사랑나누기  2. 성령충만(聖靈充滿)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내주하신 성령(롬8:9;고전12: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눅1:15,41,67,4:1;행2:4;엡5:18). 심령 속에 다른 더러운 것이나 악한 것이 자리 잡지 않고 오직 성령만 가득 차서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해 나가는 상태를 말합니다(행4:31;엡5:18). 예수를 믿은 후에 일생에 걸쳐서 받게 되며, 헌신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행6:3,5). 일생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며, 성령을 근심케 할 때에 소멸될 수 있습니다. 10.03.26 10:20
사랑나누기 고린도전서 12:13에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 중에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에밥티스데멘, ; were baptized; 세례를 받았다)는 밥티조(; to baptize; 세례를 주다)의 부정과거(aorist)시상으로 과거에 있었던 한 단일 사건으로 결코 반복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는 물세례의 영적실재(靈的實在)이므로 죄 씻음과 죄 사함이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이다(롬 6:3-5, 고전 12:13, 갈 3:27-28) 성령세례는 보편적이며, 비경험적이며, 단 일회적이므로 경험적 · 반복적이 아니다.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상이하다.->조영엽 교수 /계신대 10.03.26 10:51
 RPTministries  사랑나누기님~ 너무 감사드립니다~이렇게 세세히 설명해 주시고 찾아서 말씀해 주시기 너무 감사합니다~문법들고 나오니 갸우뚱했지요^^ 10.03.26 15:29

 

십일조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구약에서의 십일조의 용도(用度)는 ①기업이 없이 성소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생활비(민18:21-24;신12:5-19,14:22-27;히7:5-9) ②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바침(민18:26;느10:38) ③일 년에 삼 차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데 쓰이는 경비(신14:23-26,16:16,17) ④삼 년에 한 번씩 오는 구제년의 구제비(신14:28,29;26:12-15) 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기간 적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쓰임입니다. 08.09.10 23:51
사랑나누기 그리고, 우리는 십일조를 드릴 때에 우리 소득에서 1/10을 드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9/10나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10/10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우리에게 1/10만 드리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일조가 성경적이냐? 율법적이냐? 등 따지는 자체가 무의미한 일입니다. 08.09.10 23:54
grace 동감합니다, 하나님이 십일조정도로 청지기정신을 인정해주시는 그 사랑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08.09.11 09:06
정야베스 예향에서는 십일조가 뜨거운 감자입니다!!~개혁방의 분위기는 거의 폐지로 가자는 쪽입니다!!~제가 거기 들어가서 십일조옹호의 댓글을 썻다가 완전히 왕따 당했습니다!!~저도 이괄호 목사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한국교회의 부패성을 들라면 그중의 하나가 십일조 제도라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폐지하자는것은 아니랍니다!!~헌금제도는 의무사항이 아니라는쪽에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그런데 의무사항이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헌금내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 입니다!!~무기명식으로 한다면,.모르긴해도 재정난에 부딪힐겁니다!!~이게 오늘날의 교회현실이라고 봅니다!!~ 08.10.29 00:12
사랑나누기 저가 개척 교회에서 일을 도울 때, 50여명의 신자에게 십일조, 연보 구별을 하지 않게 하고, 이름도 무기명으로 1년을 시행하여 보았습니다. 기명으로 할 때와 차이를 못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신자들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습니다. 지금 저가 다니는 교회는 주일 출석교인이 장년부만 5천명가까이 됩니다.목사님께서 헌금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합니다. 그런데도 매년 결산을 보면 헌금액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라면 의무사항이 아니어도 문제가 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08.10.29 10:06

정야베스 그러시군요!!~그야말로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우리 모두가 이러한 교회가 되야 합니다!!~저희교회도 얼마전까지 이름을 강대상에서 불렀습니다!!~듣기가 민망하더이다!!~새로온 사역자 때문에 이름 부르는 일은 없어 졋습니다만,.아직도 고쳐야 할게 많이 있지요!!~ 08.10.29 11:48
사랑나누기 교회에 하는 연보는 결코 기부금이 아닙니다. 기부금이란 남을 위해 사용하는 돈을 의미하지만 연보는 남을 위해 기부하는 돈이 아니라 <자신이 포함된 거룩한 주님의 몸된 교회에 고백적으로 드려지는 돈>입니다. <예배시간에 연보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에 대한 성도들의 공동고백>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2004.9. 이광호 목사의 다른 글에서).....위에 제시된 글과 같은 맥락일까요? 08.10.29 10:20
사랑나누기 십일조를 다른 교회에 드리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가 진실로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인지, 개척교회의 재정을 돕고자 하는 마음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개척교회의 재정을 돕고 싶다면 십일조는 성찬을 떼는 본 교회에 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 허락하신 열의 아홉 중에서 구제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예물에 대한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08.10.29 10:22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복음을 믿은 후에 율법은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의 표준이 되는 율법'으로 남아 성도의 삶을 인도합니다(롬7:12;딤전1:8). 즉 인간은 율법의 고발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 복음을 통해 율법의 의무를 이루게 됩니다(갈6:2). 이런 점에서 율법과 복음은 모순된 존재들이 아니며 서로 보완의 관계입니다.  16:37
사랑나누기 많은 사람들이 율법하면 구약과 모세의 율법만 생각하고, 복음하면 신약의 복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새기신 법에서부터 구약의 율법, 신약의 교훈 등 선악의 기준으로 주신 모든 법을 다 포함합니다. 그리고 구약에 예수의 구원과 관련된 모든 내용 즉 에덴 동산에서의 ‘여자의 후손 언약(창3:15)’ 이후 각종 언약 내용들, 선지자의 예언들도 다 복음입니다. '율법 속에서 복음을, 복음 속에서 율법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해야 한다'는 이유가 일차적으로는 이것과 같지 않을까요?  16:50
agok 광의적인 측면에서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언약,규례,법도가 구분되어 명칭되고 있고 신명기에서(4장) 하나님께서 율법을 정의해 놓으셨으니 일단 토론안에서 율법은 그냥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받은 법으로 보고 복음도 때가 이르러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어 비로소 그 언약의 효력이 발하게 된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한정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17:31
grace 율법=복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사용되면 율법도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문맥으로 다 해석해주었는데도 말꼬리를 잡는듯하군요, 앞뒤문맥, 말다 떼고 율법이 복음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수준인지요?  17:39
grace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 관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17:39
사랑나누기 우리 민족은 이분법(흑백논리)에 지나치게 익숙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논리에서 좀 비켜설 필요가 있습니다. 논리의 제한을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출발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가리키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 율법이 성령으로 인하여 사용될 때에 그것이 복음이 된다>는 제한적 논리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8:00
grace 적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18:01
사랑나누기 더 좁혀서 '율법'과 '복음'으로 이원화 시켜도 '율법'이 '복음'으로 사용된 예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율법)이 주님으로 인하여 복음이 되었습니다(마19:17-19) 그리고 율법이나 계명을 잘 지키라는 복음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갈5;14,15;요일3:23,24).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다면 좀더 넓게 '그럴 수도 있다'는 용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표현이 겸손하지 못했다면 사과합니다.  18:13
정야베스 <우리 민족은 이분법(흑백논리)에 지나치게 익숙합니다>.....정말 공감 합니다!!!....그야말로 진리문제가 아니라면 대충 넘어가는 아량도 보이셨으면 합니다!!~  20:11

 

이단을 정죄하다가 이단이 되는 경우와 신유의 문제


사랑나누기 어떤 영화를 보았다고 합시다. 어두운(?) 영화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두운 장면이 수시로 재생되어 자신을 유혹합니다.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지요. 어두움을 치워야하는 수고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 수고를 진리를 밝히는데 투자한다면 어두움은 저절로 물러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단을 정죄하다가 이단이 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사단의 지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해가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08.08.11 17:53
사랑나누기 신유의 문제 입니다. 병 고치는 능력은 모두 다 하나님의 능력은 아니고, 때로는 마귀적인 것도 있고, 과학적인 것(딤전5:23)도 있습니다. 불교에도, 유교에도, 굿판에도 병 고침을 받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정통 기독교의 증거로 오인해서는 안됩니다. 참고로 1925년 카우만 선교사를 편집인으로 하여 길보른(E.A.Kilbourne) 선교사가 출판한 성서지침(A Guide to Holiness)이라는 책에서 우리말로 ‘신유’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뜻으로 처음 사용되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08.08.11 17:54
grace 사랑나누기님의 댓글이 참 좋습니다, 08.08.11 18:26 
이도홍 사랑 나누기 님의 적절하신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든든한 신학적 바탕없이 호기심반으로 이단들에게 접근했다가는 매우 위험합니다, 경계 또 경계할 일입니다. 08.08.11 20:09
이도홍 저는 무당이 굿하는 것을 적은 귀신 쫓아내고 큰 귀신 들여 놓는 것이라고 꼬집고 있습니다만, 통일교에서의 병고침 역시 저들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요

 

이분설과 삼분설에 대하여


agok 신령과 진정/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육신을 제어하는 마음(또는 정신)이 때로는 육신의 정욕을 따를 때가 있고 때로는 성령을 따를 때가 있는데 이 마음을 이분설에서는 영(또는 혼)으로 보는지요. 삼분설보다 이분설이 더 일반적인 설인가요? 08.09.15 13:07
grace 일반적으로 개혁신학은 이분설을 지지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대부분 삼분설을 주장하는것 같고 지방교회가 삼분설을 주장하는걸로 압니다, 08.09.15 13:30
agok 아멘넷의 케이 목사님께서 온 복음이 영,혼,육의 복음이라고 분류했기에 삼분설이 정설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네요.케이 교회 비 목사님도 그래서 영안과 마음의 눈을 분리시켜놓고 그런 설교를 하셨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08.09.15 13:29
겸손 오정현 목사님의 설교에 의하면 현재 대부분이 이분반설을 인정한다고 하시던데요. 너무 영,육,혼으로 구별하지말자. 그러나, 너무나 영,육,혼을 동일시해서도 무리가 있다고 하시던데요 08.09.15 14:36
사랑나누기 인간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일원론은 오직 물질 한 가지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들의 견해입니다. //2.이분설의 경우는 육신(몸)과 영혼(혼과 영을 별개가 아닌 동일한 존재에 대한 다른 명칭)으로 구분합니다. //3. 삼분설은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혼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동시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요소이며, 영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으로서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유일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08.09.15 13:56
사랑나누기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인간을 물질적인 요소인 몸과, 비물질적 요소인 영혼(영 또는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2:7,35:18;왕상17:21;마6:25,10:28;요12;27;고전5:3,5). 성경은 이 둘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어서,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분설의 문제점은, 창조의 불합리성이 내포되게 되고, 사람의 인격을 둘로 나누는 모순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 사람은 한 인격(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체가 둘이면 의식도 둘이 되니까요. 현재 신학교에 따라 가르침이 달라 신학자들은 이분설과 삼분설 중에서 하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08.09.15 13:59
agok 저도 이분설로 알고 있다가 삼분설 주장을 접하니 그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싶었는데 ..성경이 일반적으로 육과 영혼으로 구분하니 이분설을 따라야겠네요. 심층분석 답변 감사합니다^^ 08.09.15 14:37

 

자살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자살에 대한  토론에 많은 참여를 부탁합니다.  08.10.03 08:42
행복한당신 자살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성도라고 표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뜻으로요 여러분들 잘 들으세요 자살하면 지옥갑니다 그러므로 자살한 사람은 성도라고도 부르지 않습니다 라는 뜻이라면요 //그러나 구원얻은 백성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얻은 성도는 자살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남아있는 가족들과 그를 사랑하는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성도라 함으로서 혹시라도 천국가면 만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위로를 주는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 남은 생애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내가 사랑하는 xxx지옥갔다 ㅜㅜ 괴로워할 것입니다 연약한 자들의 위로를 위하여  08.10.03 13:16
행복한당신 성도라 표기 해야 할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제사를 지내면 안되는걸 알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가 어쩔수 없이 일을 도와 주듯이요 절은 하지 않지만 ..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때로는 믿음으로 이해하고 덮어줄수 있는 그런것처럼요 ..저는 성도라 표기하는것에 대하여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맞다 틀렸다만 따진다면 제사도 절대로 못지내게 막아야 합니다 목숨걸고 가정파탄을 내고서라도 제사못지내도록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사지내는건 분명히 하면 안되는거니깐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가정파탄을 원하지 않으시니까요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며  08.10.03 13:20
 행복한당신 주님의 위로를 얻으며 남은 가족들이 구원얻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도라 불러도 무관합니다 저의 맘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서 적어봤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댓글을 보며 배울 생각이니 좋은댓글들 부탁드립니다 글을 적어놓고 비유가 맞나 안맞나도 헷갈리네요 ;; 그리고 교회장으로 하는것을 찬성합니다 교회 출석한 성도가 자살했다고 해서 넌 자살했으니 성도도 아니야 그러므로 교회장 하지말고 일반 세상 불신자 장 해라 이건 사랑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가 어떻게 되던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가족들을 위로하며 교회장을 치루어 줘야 한다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살한 성도들의 가족에게 너 가족중에 누가 자살했네  08.10.03 13:27
행복한당신 그건 성도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녀는 남편 마누라 동생 사촌은 지옥갔으니 성도도 아니며 교회장을 치룰수도 없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남은 가족 모두가 주님의 사랑을 느낄까요 ? 그가 지옥에 갔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에게 성도라고 불러줘야 할것이며 그가 믿음이 있던 없던 사랑으로 교회장을 치루어 줌으로해서 남은가족들이 구원을 얻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해야할건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죽은자를 향함이 아닌 남은가족들의 구원을 위하여 ... 그들이 주님을 의지할수 있도록 그들이 주님품을 떠나지 않도록..안타깝네요 무슨 말이 필요 하겠습니까 위로해주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지금 그 가족들의 마음이 어떨지  08.10.03 13:32
행복한당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 슬프겠다 ~ 제 3자가 소식을 접하고 슬플 지경인데 그 가족들은 얼마나 슬플까 으~아~ 그 가족들도 신자라면 자살하면 지옥간거 알텐데 얼마나 아플까 그런데 거기다가 성도들이 자살했으니 성도 아니군요 라고 한다면 으아~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거기다가 교회장 안됩니다 세상장 치루세요 라고 한다면 우아 ㅠㅠ믿음이 연약한자들은 성도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말 것입니다 사랑이라곤 눈꼽만큼도 못 느낄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자살을 잘했다고 이말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남은자들을 생각하자는 뜻에서 적은 글입니다  08.10.03 13:42
상수리 사후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권한이 아니니, 그래도 남아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가 품고 있음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서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적극 찬성이라기 보다 찬성입니다.  08.10.03 14:45
사랑나누기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롬1:7) 존귀한 자(신33;3)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자살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출20:13;창9:6)과 예수님의 믿음(요1;12,3;16)을 져버렸습니다. 이 말을 되짚으면 자살한 사람은 성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자살한 사람의 영정에 '성도'라고 표기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여야 죄 정함을 면한다(약5:12)고 하였습니다.  03:47
사랑나누기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할려면, 바른 신앙의 전통을 확립하려면, 모든 기초가 신령한 반석(고전10;4) 위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눅6:49). 근래의 교회가 심히 어지러운 것도 인본주의 사상(흙 위에 지은 집)이 그럴듯하게 꾸며져 성도를 현혹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랑으로 감싸 주기를 희망합니다. 자살을 정죄하면 사랑이 없는 자로 몰리게 됩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성도(?)의 자살 릴레이가 되고 있습니다  05:04
사랑나누기 우선 달다고 먹는 설탕은 변질이 되지만, 우선은 쓰나 소금은 부패를 막아줍니다. 성경에 하나씩 하나씩 세상을 넣으면 우선은 달지만 나중에는 성경이 아닌 세상으로 변질합니다. 우선은 마음이 아프지만 죄를 도려내고 소금을 칠 때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줍니다.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는 말씀이 신앙의 반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05:24
바로미 위의 문제는 아마도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례(세례와 성찬식)를 같이 다루어야 제대로 된 논쟁이 될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 성도가 아닌 구도자라 하고 그 구도자가 회심을 한 표지가 나타났을 때에 세례를 행하여 그제서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인데, 요즘 교회에서는 회심의 표지가 세례 받는 기준이 아니고, 1년 정도 출석하는 것이 세례의 기준으로 바뀐 것도 문제이고.. 또한 교회에만 출석했다 하면 무조건 <성도>라고 부르는 그 습성 또한 큰 병폐라고 생각됩니다. 최진실은 그런데 언제부터 교회 다녔었나요? - -? 저는 몰랐네요..  08:00
사랑나누기 4년 전부터 강남중앙침례교회(담임목사 피영민)에 출석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08:24
바로미 그리고 자살로 성도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성도라 불리워지는 신앙의 모습이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겠지요... .. 그리고 돌아가신 분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는 것 보다는 <자살>에 대한 제목으로 하고.. 누구의 실제 이야기를 두고 이러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망자의 살아남은 가족들을 시험들게 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08:03
사랑나누기 토론의 제안 취지는 망자 개인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의 자살이라는 사례를 통하여 자살에 대한 바른 신앙관을 확립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실제 사례가 가족들을 시험들게 하는 소지가 있다고 하니 본문을 수정하겠습니다.  11:43
행복한당신 동감입니다 살아남은 가족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언급이라 생각합니다  16:52
grace 저도 요며칠 맘이 착찹합니다, 워낙 유명한 탑탈렌트이기도 하지만 교회출석한 교인의 자살이라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자살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지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성도라고 쓰고 교회장으로 해주어야 하겠지만 주님의 공의를 생각한다면 성도라는 말이라든지 교회장은 좀 그렇습니다,왜냐하면 불신자들도 교회는 자살한 사람도 구원받은 백성으로 인정한다고 오해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자살했으니 우리는 장례를 못치루어준다고 하기도 힘든 상황일것입니다. 교회장으로 하되 소천이라든지 천국으로 갔다고 하는 말들은 조심하고 삼가해야 할것입니다,  10:45
grace 10년전쯤 제가 다니던 교회에 교회는 다니지만 우울증(정신병수준) 의 한 부인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고 그 가족이 다 교회에 다니니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어주었는데 부목사가 설교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천국으로 가신이라는 말을 해서 그후에 그 목사님께 제가 따진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애도와 남은자에 대한 위로의 말만 하셨으면 좋을텐데 너무 오버하시면서 그렇게 말함으로 한 여집사는 저보고 자살도 구원받는것 맞다고 빡빡 우기던 것이 생각납니다,그러면서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은 자기마음이 아니니 자살이 아니라고도 우겨서 답답했던 적이 있습니다,  11:50
grace 교회들이 중생의 교리를 잊어버리고 성도의 개념도 정립이 안되어 있고 세속화에 물들어서 진리와 비진리의 구분이 모호해진 현실에 이것보다 더 잘못된일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교회들인데 이 일만을 따질수도 없는 상황인것 같습니다,정말 진리의 진리됨의 회복이 절실하다는 생각입니다.  10:30
grace 교회장은 남은 자들을 전도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지내 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살이 큰 죄라는것은 교회가 바르게 선포해야 합니다,성도라는 말은 자살한 사람에게는 합당하진 않지만 진실로 합당하게 성도인 사람이 얼마나 될런지요? 그런 맥락에서 그냥 이해할려고 합니다,일반적으로는 성도를 그냥 교회에 출석한 사람이라고 정의해주고 실제로는 정말 구원받은 백성만이 성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교회만 나가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맥락으로 성도를 표현한것으로 이해할려고 합니다,  11:43
사랑나누기 저가 토론을 제안한 이유가 성도의 대상에 대하여 신학적인 교리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데도(계14;12;롬1:7), 대상이 아닌 사람을 성도로 칭호하는 것을 수용 또는 이해하게 되면 성경이 변개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입니다.  11:58
grace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문제가 교회나 교단 차원에서 논의하면서 어떤 룰을 정하는것이 시급한 것 같습니다, 자살은 교회장이 안된다고 하는 정해진 룰이 있다면 가족들도 섭섭해하지 못할것입니다, 자살에 대해서는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표현의 한부분이라고 볼 때 우울증을 앓고 있는 교인들을 포함하여 올바른 교리와 회심으로 인도하여 항상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가지는 신앙인으로 양육해야 할것입니다,  12:03
사랑나누기 전통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아, 자살한 이들의 장례를 교회가 치러주는 것을 거부한 사례가 많습니다. 信者이었던 전태일의 장례식을 교회에서 치루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거절당했던 사실이 한 사례입니다. 그것은 자살이 매우 심각한 범죄인데, 자살자의 장례를 교회에서 치러주는 것이 자살 행위 자체를 용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음을 염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의 적용을 보면 자살이 마귀의 짓이라 하였고, 교회장이 금지되었으며, 성찬예식과 기도도 금지시켰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2:08
행복한당신 그레이스님의 댓글에 동감입니다 주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가지는 신앙인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저는 고인과 상담했던 그 목사가 도대체 어떤 상담을 했는가 궁금합니다 복음을 알고 있기는 한지 의문입니다 과연 그 교회 설교는 어떤 설교 인지 궁금합니다 그 교회성도들은 심방을 할때 무슨목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의문입니다 근데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향하여 주님께서 제발 좀 바로 가르치라고 경고하시는것 같은데요 왜  한국교회가 듣지 않고 바로 가르치지 않습니까  왜 부흥 부흥 만 외치고 말씀을 바로 가르치지 않습니까  주님이 부흥을 원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회개 합시다  17:40 agok 우리나라 사망률 4위가 자살이라고 하고 이리 교인들의 자살이 유행처럼 보여지는 현상에 너무 우려가 되다보니 이미 죽은 자보다 또 남은 가족들에 대한 인간적 위로보다 총 교인들, 신자들의 신앙적 유익 측면을 중시하는 방침으로 교회가 결정을 내려야 하되 ... 사울왕의 죽음이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었음을 다윗이 알았더라도 다윗과 그 백성들은 여전히 울며 금식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윗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슬퍼하며 금식했을 것 같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으로 의욕과 판단력을 상실한 아론의 다른 두 아들들이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분깃으로 거듭확약한 정당한 분깃을 먹지 않고 태어 버렸고 그것은  15:07
agok 명백한 불순종으로 또 다른 징계사유가 되는데 그 내면적 동기의 순수성을 변호한 아론의 변론에 의해 묵인됩니다.(레 10장) 이것이 꼭 자살한 교인의 교회장과 성도지칭과 연관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저는 이 사건 때문에 자살한 교인의 교회장과 교인들의 애도를 하나님께서 허용하실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당신님의 내면적 순수하고 선한 동기와 그레이스님의 해석에 따라 구원 여부 판단 이전에 함께 신앙생활한 교인에 대한 정리와 예우차원으로 교회에서 장례를 치루어 주는 것 다만 천국이니 성도이니 하는 언급대신 교인의 사망을 애도해 주는 선에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장은 찬성 성도지칭 대신 교인  15:28
우아 본질적인부분부터 진리가 회복된다면 나머지를바꾸는데는 힘들지않을것으로 봅니다. 교인으로 등록만하면 얼마안되어서 세례를주고 성도로 인정받는 요즘세대에서 이해가 될지모르겠네요. 오히려 다른종교가 관대하다고 할것입니다. 교회장을 치루는것이외에도 평소 교회에서 다루는 '성도'의 범위에대해 고찰해봐야 할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부분에대해 제대로 선포하고 가르쳤더라면 저런모습은 당연히 제재가 되지않겠습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자살한 사람을 사랑으로 교회장으로 치뤄주기 때문에 자살이 계속 일어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교회장으로 치뤄주지 않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을까요?결국은 회심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5:36
행복한당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살한 사람을 향하여 성도라 부르는걸 싫어하실까요? 교회장을 치루는것을 싫어 하실까요? 주님은 제가 자살한 사람에게 성도라 부르던 교인이라 부르던 뭣이라 부르던 상관 안하실거 같은데요! 제가 그를 불쌍히 여기며 가슴아파하며 남아있는 그들의 가족들을 불쌍히 여기며 같이 울어주고 같이 아파하면서 그들의 영혼이 잘되기를 바라며 말씀으로 권면하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사는것을 기뻐하실거 같은데요 저는 이런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이렇게 살랍니다 제가 틀렸다해도 저는 이렇게 살랍니다 욕하면 욕 얻어먹고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17:33
행복한당신 갑자기 옛생각이 나서 한글자 더 적습니다 제가 세상을 포기했을때 죽지 못해서 살때 믿음이 연약할때에 자살을 택하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드라큐라 라는 영화에서 봤던 자막중에 자살한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가기 싫어서 자살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포기한 상황에서도 지옥은 가기 싫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구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점에서 볼때에 자살은 지옥간다라고 확실히 못박아서 한국교회 전체가 선포할때에 구원얻은 신자라면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17:57
이도홍 시의에 적절하신 주제입니다, 여러분들의 좋은 글에서 많이 배우게 되어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다, 연예인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직분자들이 남은 이들을 잘 양육하고 섬기고 보살펴야 겠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왜 이러는지,,,,  18:58
사랑나누기 자살하면 안되는 이유가 성경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 성도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고전6:19). 주께서 값으로 산 몸(고전6;20,7:23)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교회(행20:28)입니다. 또한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자살은 고의적으로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민35:31). 그런데도 성도로, 교회장으로 예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논의할 때 토씨 하나, 어미 한 글자에 칼날을 세우던 예리함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관대한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기 그지 없습니다.  20:44
사랑나누기 본 카페의 '교회개혁 성경적으로 하자'에 가족 모두가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혁'은 성경을 다른 모습으로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진리를 성경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하자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K교회의 신학에 대하여, 각종 이단 신학에 대하여, 교회 용어 바로쓰기에 대하여 등등 교회개혁을 위하여 열띤 토론과 토의를 해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자살자 문제도 성경적으로 좀더 접근하여 논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웅변조가 되어 읽기 거북하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08.10.05 00:08
agok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다 자살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고 자살시도를 한다고 다 성공하여 죽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단이 아무리 인간을 절망으로 충동하고 자극시켜도 그 결과 생사는 하나님 소관입니다. 자살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자유의지로 하는 것 같아도 그 결과는 하나님 뜻안에 있는 것이지요. 자살시도하자 마자 죽게되는 경우도 있고 시도후 실제로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시간이 걸리며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어찌 역사하실지 모르겠기에 신앙인의 자살은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면서도 그 구원여부, 거듭난 성도 여부에 대해서는 100% 확언을 못하는 모순을  08.10.05 03:24
 agok 저 자신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자살시도하는 죄는 성령훼방죄요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라는 구절이 있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유추해석을 하여 결론을 내리게 되는 부분이기에 일부 목사님들마저도 이 자살에 있어서는 절대안돼 입장이면서 다소 모호하게 결론을 흐리는 것으로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모호한 태도가 자살을 더 방조할까 우려가 되어 자살하면 절대 천국 못간다고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얻어지고 바뀌어지고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자살로 생을 마감시킨, 신자로 보였던 사람의 거듭난 성도 가부성과 ,구원유무성을 단언하기에는  08.10.05 04:08
 agok 100% 확신이 서질 않네요. 성도대신 교인이라고 해야하는 이유는 교인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성도였는지는 불확실한 상태이고 성도라고 하면 혹시라도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살을 해도 성도라고 하는구나 자살해도 구원받은 자로 여기나보나하는 생각을 조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고 또 그것을 가지고 문제삼을 이도 있을까 봐서이며 교회장의 이유는 교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으로 장례를 치루어 주는 것이 자살을 이유로 정죄하는 것보다 더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사무엘하에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동하겠다는 신앙을 가지고(22:10,15) 거짓말을 하고(21:2) 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습니다.(21:6)  08.10.05 04:12
 agok 그리고 그 사건을 예수님께서는 마 12:1-8절에서 긍정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성도라는 표기대신 교인으로 수정 표기하는게 더 바람직할 것 같고 교회장은 긍휼과 사랑으로 해석하여 허용하였으면 하는데 이것도 그레이스님 말처럼 아직 교계의 통일된 결정과 공고, 교육이 미비한 상태에서의 허용이고 (초대교회에서 할례문제를 비롯하여 다른 변론거리를 가지고 예루살렘회의에서 논의를 거쳐 어떤 결정을 내려 편지하였듯) 우리 교계에서 이 자살과 자살한 교인의 교회장 문제를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심사숙고하여 어떤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교회에 공고하여 교인들을 교육하게 되면 개개인의 견해야 어떻든 그 결정에 순복해야겠지요  08.10.05 04:57
사랑나누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자살이 부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첫째, 자살 행위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자연법을 거역하는 행위며, 둘째, 자살은 공동선과 단체에 손해를 끼치거나 모독이 될 수 있으며, 셋째, 자살은 생명에 대해서 절대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하나님의 권위를(신32:39) 침해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세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자살은 감상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음은 오히려 사람이 최종적으로 당할 수 있는 최대의 악이라는 것입니다.  08.10.05 08:48
사랑나누기 전통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로 첫째,자살은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창1:27;고전6:19). 둘째,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창9:6;롬8:29;골3:10). 셋째, 기독교의 신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요1:12;롬1:16). 넷째,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망을 거부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엡2:8;롬5:8;고전13:13). 그렇다면 위와 같은 것을 어떻게 수용해야할까요?  08.10.05 09:36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제가지의 토론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찬성과 반대 의견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의견은 사례에서 제외되었음을 유념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또한 가급적 편견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표집의 문장을 고려했으나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아량을 베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드러난 의견 중에 반론의 여지가 많은 의견도 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1.영정 앞에 < 故 성도 0 0 0 >라고 표기하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의 이유는, //1)가족에게 성도라 함으로서 혹시라도 천국가면 만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위로를 줄 수 있으니 //2)남아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가 품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3)자살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지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1.영정 앞에 < 故 성도 0 0 0 >라고 표기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의 이유는, //1)자살한 사람은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2)바른 신앙의 전통을 확립을 위하여 //3)주님의 공의를 생각한다면 //4)성도 지칭 대신 교인으로 //5)자살은 고의적으로 살인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6)자살은 생명에 대해서 절대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동이어서 //6)기독교의 신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7)교인으로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인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해서
2. <장례식을 교회장으로 하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의 이유는, //1)믿음이 있던 없던 사랑으로  교회장을 치루어 줌으로 해서 남은 가족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2)남아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가 품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3)자살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지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4)남은 자들을 전도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5)하나님께서 허용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서 //6)교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자살을 이유로 정죄하는 것보다 더 유익할 것 같아서 //7)긍휼과 사랑으로 해석하여 허용하였으면 //7)교회를 드나들었다면 교회장으로 치루는 게 맞을 것 같아서
2. <장례식을 교회장으로 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의 이유는, //1)자살한 사람은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2)바른 신앙의 전통을 확립을 위하여 //3)주님의 공의를 생각한다면 //4)전통적으로 자살한 이들의 장례를 교회가 치러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5)자살은 고의적으로 살인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6)자살은 생명에 대해서 절대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동이어서 //7)기독교의 신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기타 의견으로, //1)교회에서 행해지는 성례(세례와 성찬식)를 같이 다루어야 제대로 된 논쟁이 될 것 같다 //2)교회에만 출석했다 하면 무조건 <성도>라고 부르는 그 습성 또한 큰 병폐라고 생각된다 //3)교회들이 중생의 교리를 잊어버리고 성도의 개념도 정립이 안되어 있다 //4)교회나 교단 차원에서 논의하면서 어떤 룰을 정하는 것이 시급한 것 같다 //5)어떤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교회에 공고하여 교인들을 교육하여야 //6)성경적 근거를 통해서 자살은 절대 아니 된다는 교육과 더불어 자살한 경우의 장례문제를 교회서 공식적 공고를 해야 할 것이다.


저는 이상원 교수와 조심스레님의 견해와 달리합니다.
첫째 이상원 교수님은 <자살이 구원의 논의에서 제외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극히 주관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은 심각한 죄>이며, <하나님에게 엄중한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구원의 논의에서 제외되는 죄>라는 논리는 모순이 됩니다.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엄중한 문책)가 그 위에 머물러 있고(요3:36), 구원은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다(롬5:9;살전1: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은 여호와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삼하12:14). 그런데 구원의 논의에서 제외될 수 있을까요?
둘째, 조심스레님은 자살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다윗의 타살을 사례를 들었습니다. 자살과 타살은 동일한 살인이나 죽음의 대상과 목적이 다릅니다. 여기에서 꼭 유념하여야 할 것은 시간의 량과 죄의 종류가 아닙니다. 회개의 여부가 관건입니다. 다윗은 음욕(삼하11:2), 간음(삼하11:4), 궤계(삼하11:8), 살인(삼하11:15) 등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의 충고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습니다(삼하12:13).
셋째, <새생명이 확실히 있다면 자살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은 어딘가 좀 어색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새생명에 대한 값어치를 놓치고 하신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새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인데 자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고서라도 얻고 싶은 것입니다(마13:44-46).
넷째, <유독 자살한 성도에 대해 중생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별다른 근거가 없다.>는 댓글을 읽었습니다. 자살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출20:13;창9:6)과 예수님의 믿음(요1;12,3;16)을 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확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자살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으려할 때 살려주셨습니다(왕상19:4-8).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허물로 인하여나 어떤 경우든지 즉, 사단의 힘이 그를 방해하더라도 그 구원을 상실하게 할 수도 빼앗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요6:39,54,10:28,29).
다섯째, <자살이 더 이상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표현이라는 것은 근거 없는 얘기지요.>“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창 9:6)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여섯째, <구원은 회개 안했다고 못 받는 것은 아니지요>.라고 하셨습니다. 무언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구원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죄를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죄사함을 얻으려면회개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눅24:47;행5:31). 회개는 주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처음 명령이요(마4;17), 하늘로 올리우시기 전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눅24:47).
일곱째, <평생 진지한 자세로 신앙하던 사람이 말년에 불우한 가운데 자살했다면 이건 우리가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경우를 밝히셨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회계를 맡았습니다(요13:29;행1:17). 회계는 모임 중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맡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팔아넘김으로써 배반자가 되었고(마26:14-16;막3:19;요6:71). 자책감으로 결국 자살을 선택했습니다(마27:5;행1:18). 겉모습을 보고 영혼을 분별한다는 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잘못된 잣대입니다. 그 열매로 판단해야겠지요."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6)

사랑나누기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주시면 수정하여 바른 신앙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데까지 다듬어지기를 소망합니다. 08.10.09 12:58
agok 자살에 대해 성경적으로 접근하여 결론을 내림으로 개개인에게 바른 신앙을 심어주고 신앙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랑나누기님의 마음이 글 전체에서 잘 전달되어 오네요.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삼손의 경우를 굳이 자살의 범주에 넣어야 할까요. 살신성인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 든 장수가 용감히 싸우다 죽었을 경우 자살했다고 표현하지 않듯 살신성의를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다 생을 마친 삼손을 자살했다고 하는 것이 걸리네요.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를 행하려다가 죽은 것이니 성경상의 다른 불의한 자들과 함께 (선의든 악의든) 자살한 범주에 넣는 것은 쫌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08.10.09 13:13
사랑나누기 삼손의 죽음에 대하여 성경 어디에도 살신성인을 이루기 위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살 전까지 하나님은 나실인으로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방탕한 생활로 계명을 지키지 않은 삼손을 버렸었습니다(삿16:20). 누구못지 않게 불의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살 직전의 기도에 응답을 주셔서 원수를 갚게 한 것뿐입니다(삿16:28). 삼손에 대한 애정은 알겠습니다만 조금 주관적인 판단을 하신 것 같습니다. 08.10.09 20:50
얼굴 삼손의 경우는 자살이 아닙니다. 그건 희생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08.10.10 03:15

석천 " 자살에 대한 성경적 이해" 자살한 대한 토론을 보며 몇 번이나 댓글을 달려다 자살한 이의 심정을 ..또한 그런 생각을 갖게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하는 많은 고민에 망설였는데 사랑나누기님의 일목요연한 글을 보며 새롬을 압니다. 감사 합니다 08.10.09 18:06
grace 삼손의 자살은 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08.10.09 19:15
사랑나누기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삼하17:23;마27:5), 생명을 잃는 일(출10:17;잠14:32;고후4:11;요8:51)'을 자살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 정의가 잘못되었나요? 삼손의 죽음은 분명히 이 개념을 충족합니다. 삼손은 자살이지만 위 본문 <9. 자살과 구원의 관계>의 가운데 부분에 <자살로 구원받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허락으로(삿16:28-29, *삼손의 사례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을 성경에서 예외로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즉 순교와 순직의 경우이다.>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 본문 5-5)-(1)처럼 후세에 삼손과 같은 자살의 유형을 <순교>로 분류한 것입니다. 저의 분류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08.10.09 19:57
grace 대신 희생을 하는 것을 자살로 정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차에 뛰어든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아이를 건져내고 대신 죽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살로 정의하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자살의 정의는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거라고 하면 어떠할런지요. 그렇다면 삼손은 자살의 범주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08.10.09 20:09
석천 삼손 = 자살 = 순교 = 하나님의 허락 ( 정의론에 입각 한다면 : 오로지 논제에 대해서만 ) 08.10.09 20:31
사랑나누기 삼손은 대신 희생한 것도, 義死도 아닙니다. 자기의 두 눈을 뺀 원수를 갚으려고 그들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삿16:28,30).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자기 의사에 의하여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하나님이 삼손이 강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죽음을 순교라고 분류한 것입니다. 현재 통용되는 언어 질서에 '자살'이 아니라면 '타살'이 됩니다. 분명히 삼손이 타살된 것이 아니니 자살입니다. 제안하신 자살의 정의도 저가 내린 정의 속에 내포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집이 아니라 바르게 알자는 것이니 저의 주장을 양해하실 줄 믿습니다. 08.10.09 20:36
바로미 삼손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데요... 그의 행동이 자살이라는 명목으로 기도를 했다면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을리가 없지요. - -; 전쟁터에서 죽을 상황인거 뻔히 알면서 수천만의 적군과 나가 싸우는 수백명은 그럼 모두 자살의 행위일까요? 그러나 결과는 승리! 입니다. 삼손도 역시 승리라고 기록되기를 <살아 생전 죽인자보다 더 많다>라고 평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삼손의 죽음이 어떠한 죽음인지를 평가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삼손의 기도의 내용도 참고해야 합니다. 즉 삼손은 마치 자신의 눈을 뽑은 개인적 분노에 대한 기도 같지만 그런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08.10.09 23:29
바로미 삼손의 기도가 자신의 눈을 빼낸 것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는 기도라면.. 대머리라고 놀리던 동네 아이들을 향해 저주해서 곰에 의해 찢겨 죽은 경우인 엘리사의 저주도 역시 개인적 분노로 인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삼손의 눈을 빼내고 그를 조롱하는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세운 종을 조롱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 의가 아닌 주의 의로 구원을 받듯이 삼손을 조롱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 부분을 해석해야 하며 이러한 삼손의 기도 역시 자신의 감정적 분노보다는 상실했던 거룩한 복수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08.10.09 23:33
사랑나누기 삼손이 눈을 빼인 상황은 사사로서 책무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삿16:1,20) 삼손의 경우와 엘리사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손의 자살은 다른 사례와 같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08.10.10 04:36
조심스레 사랑나누기님은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주관적인 인본주의’ ‘인간적인 해석’ 이라고 저한테 무례한 표현을 하시더니 여전히 강력하게 나가시는군요. 사랑나누기님이 말씀나누기 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런 표현나누기까지 하려는 자세는 보기 안좋다고 생각됩니다. 상대에게 모욕이 될만한 표현을 상당히 쉽고 대담하게 남에게 할 수 있는 사랑나누기님의 모습에 좀 적응이 안되는군요. 그리고 여기서 누가 삼손에 대해 애정이 있다고 주관적인 해석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애정이 있어 삼손에 대해 주관적인 판단을 하고, 사랑나누기님은 스스로 말씀하시듯이 ‘객관적이고 성경적인’ 판단을 하신다는 듯이 제 귀에는 들립니다. 08.10.09 22:02
조심스레 그리고 삼손을 누구 못지 않게 불의한 자라고 평가하는 사랑나누기님의 모습은 조금 성급한 것 아닐까요? 우리 신앙의 위대한 선배 삼손에게도 사랑을 좀 나눠주면서 보다 면밀하게 평가해보십시오. 보통 영웅주의 신앙위인전(?)에 빠진 한국사람들은 삼손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지요.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분명히 삼손을 신앙의 용사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부터 읽고 있는 목사님의 책을 한번 참고하십시오. 아시는 분일 수도 있겠군요. 김홍전 목사의 <신앙의 자태1-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후반부와, 김홍전 목사의 <사사기 소고2>에서도 삼손시대 배경과 삼손의 신앙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08.10.09 22:05
조심스레 퀄리티가 괜찮은 책이니까 시간낭비, 돈 낭비는 안될 겁니다. 얄팍한 도덕주의 설교와는 다르게....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각성과 관점을 갖고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를 신앙의 용사로 평가하는 해석을 할 줄 아는 것도 개혁주의 신학의 탁월한 장점이라고 보고 싶군요. 단순히 칼빈주의 5대교리만 달달 외우거나 결론에 짜맞춰 인위적으로 성경을 줄줄 인용한다고 훌륭한 성도, 개혁주의자는 아니겠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영광을 기준으로 삶의 많은 면모들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적용하고 나누는 예리하고 충만한 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개혁주의자겠지요. 그런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군요. 아멘! 08.10.09 22:11
사랑나누기 조심스레님에게. 무례한 표현으로 느껴졌다면 사과합니다. 그 때 상황은 성경적 근거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기에 한 표현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저는 사사기에 드러난 기록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지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내면을 표출된 사실보다 우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08.10.10 02:01
조심스레 사과를 하시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군요. 어제 그제 토론하면서 밝은 부분과 칙칙한 부분이 있었지만 밝은 부분에 해당된 분들이 바로 님과 같은 분들이었음을 밝혀둡니다. 표현이야 약간 섭섭했지만 님 같은 분들과의 토론에서 전체적인 느낌은 좋았습니다. 그리고 웨신 고백서 1장 성경 편에 의하면 성도가 성경에서 바르고 필연적인 결론을 연역, 추론해낼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게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개혁주의가 원칙으로 삼는 것이라고 봅니다. 08.10.10 02:26
조심스레 사사기에 드러난 삼손에 대한 기록도 성경의 기록된 의도와 목적, 여러 가지 측면들을 사려 깊게 살피면서 일관된 관점으로 해석하다보면 훌륭하고 풍성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많이 잡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개혁주의 전통에 있는 청교도의 설교들도 모두 그렇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에 깊은 설교가 나오지 않았나요? 성경에 ‘표출된 사실’을 근거로 삼손의 ‘내면’이나 ‘신앙’을 유추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된 결론을 두고 굳이 ‘자의적인’ 것이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영감된 히브리서에서 삼손을 높이 평가하잖아요. 08.10.10 02:27
사랑나누기 저도 조심스레님의 접근 방법으로 삼손의 내면이나 신앙을 여러 가지 주석이나 여러 목사님의 설교를 대충은 살펴보고 정리하였습니다. 자살로 분류한 자료와 아닌 자료가 있었는데, '자살'이란 표출 개념에 충실하자는 생각에서 삼손을 자살의 사례로 포함시켰으며, 그러나 삼손의 자살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이기에 죄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저의 분류가 드러난 사실에 충실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고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의 편집자인 저를 성경을 근거로 설복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듬어질 때 오류가 적은 자료로 탄생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08.10.10 03:06
얼굴 삼손의 경우를 자살로 본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그럼 군인은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성립됩니다. 08.10.10 03:22
사랑나누기 얼굴님께. 삼손은 군인이 아니고 사사였습니다. 자료를 찾아보시면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분류한 신학자와 목회자를 많이 만납니다. 그리고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는 견해를 성경으로 밝혀주시면 좋겠습니다. 본 주제에 충실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08.10.10 04:42
사랑나누기 <6. 성도가 자살을 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의 항목들을 대폭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에 대하여 성경적인 근거로 많은 자료를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다만 표현된 자료에 대한 성경을 근거로 한 토론, 토의가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08.10.10 03:12
agok 사랑나누기님의 토론 방식에 찬성입니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어야 설득되고 견해의 수정을 가하고자 하는 명분이 비로소 주어진다고 저 역시도 보니까요. 그래서 불충분하더라고 나름대로 시도는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방여인에게 배신당해서 머리를 밀리우고 힘의 근원인 여호와 하나님께서 떠난 상태에서 적에게 사로잡혀 눈이 뽑히고 옥중에서 맷돌이나 돌리는 절망가운데에 처한 삼손이 불신앙적인 자살을 하고자 했다면 옥중에서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 봅니다.(그래도 자살하지 않았죠) 삼손이 죽은 날은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자랑하며 자기 신을 찬송하고 08.10.10 06:50
agok 그 신 다곤에게 제사를 드리며 즐거워하는 날이었습니다. (삿 16:23-24)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집을 지탱하는 기둥을 찾아서 의지하게 하라고 부탁했을 때 삼손의 마음은 불신앙이 아니라 밀리운 머리가 자라나는 것 만큼 회복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었을 것이고 자기백성들을 괴롭히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우상숭배하는 블레셋인들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 곧 사사로서의 마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로 주로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 군사적 지도자 역활을 하였습니다.(삿 2:16-18) 군사적 싸움으로 친다면 삼손이 홀로 죽어가면서 08.10.10 06:07
agok 일구어낸 승리는 사사로서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많은 블레셋 방백들과 블레셋 백성들이 그날 죽었으니까요. 사사로서의 그의 업적이 삿 16:30절에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최후의 순간에 회개함으로서 그 죽음의 결과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는 사실로 히 11:32에서 믿음의 용사로 평가되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자살이 아니라 다곤 신전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삿 16:28)과 사사로서의 책음을 가지고 생명을 건 사투의 결과 순직 또는 순교로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죽고자 다가오는 기차를 피하지 않는 것과 십자가에 죽을 것을 알고도 피하지 않은 것과의 차이점을 생각하면 삼손의 죽음을 08.10.10 06:52
agok 불의한 자들, 불신앙 상태에서 자살한 자들과 같은 자살로 치부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적인 평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삼손을 자살자로 분류하면 하나님이 인정한 믿음이 조상이 명분이야 어떻든 결국 자살한 것으로 비추어지고 그것은 신자의 자살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놓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사랑나누기님의 <자살은 용서받지 못 할 죄, 거듭난 성도는 절대 자살할 수 없다>라는 주장과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진 성도의 자살> 은 양립할 수 없기에.. 타살 아니면 자살의 고정된 두 분류방식보다는 사랑나누기님이 위 댓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부터 순교,순직으로 평가하고 세개로 분류하는 것을 제안해 봅니다. 08.10.10 07:17
사랑나누기 agok님의 자살의 유형(분류)을 자살, 순교, 순직으로 분류하자는 제안에 동의합니다. 이 문제도 좀더 논의가 되었으면 합니다. 구체적인 진술을 제시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회원님들께 다시 알립니다. 저의 자료를 고치지 않겟다는 고집을 세우는 것이 아님을 유념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또 삼손의 죽음을 믿음 없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삼손의 믿음에 대해서는 히브리서에서 확인되었으니(히11:32) 더 이상 거론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08.10.10 08:29
grace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살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울증이든 충동이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면에서 ~때문은 괜찮다고 말하기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성경은 정말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지 우리 신앙을 점금하라고 하고 영혼의 의사코너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자살은 구원의 증거를 역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가집니다, 08.10.10 07:35
grace 어제 토론 중에 조심스레님이 기분 상하신 표현, 즉 절대주권을 믿지 않는군요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일반적인 면에서 말한것이니 기분나빴다면 사과를 합니다, 또한 합리화가 지나치면 다원주의로 간다는것 또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지만 님이 기분나빴다면 사과를 합니다, 하지만 님도 무례하군요라는 표현보다는 무례한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이 더 좋았을겁니다.넷상이지만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무례하군요라는 표현도 무례한 표현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조심스레님을 인신공격한적은 없음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전 저의 일방적인 마음으로는 조심스레님에게 인신공격당한 기분이 08.10.10 08:54
grace 드는 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합리화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조심스레님은 말하시지만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은 일반자살과는 다르다는 것이 합리화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자살은 우울증 생활고비관등입니다,멀쩡한 마음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런지요? 알미니안주의나 웨슬레신학에서는 자살을 구원의 취소로 말하기때문에 구원취소를 믿지 않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는 중생자의 선택이 아니라고 배웠고 저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만일 중생자도 자살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극단적으로 회심의 표지 이런 글들도 전혀 필요가 없겠지요,그냥 믿으면 무슨 죄든 다 용서되고 다 용납되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오해가 08.10.10 08:55
grace 생길까 우려를 했던 것입니다, 지정의로 주님을 영접하는 회심을 동반한 중생이 개혁신학의 중심이라면 이 회심에서 자살은 가능하다는 말이 과연 가능할런지요. 그런 면에서 구원파적인 구원에서는 구원받은 자도 자살이 가능하다고 볼수 있지만 개혁신학적중생론을 볼때 자살은 불가능하다는것이 제 견해였고 그런 토론중에서 구원파가 언급되어 기분상하신것 같은 조심스레님에게 그 부분도 조심스레님을 향한 말이 아니었음을 변명해야 하는군요ㅡ앞으로 조심스레님께는 조심스럽게 댓글을 달든지 가만히 있든지 할것입니다, 글이라는것이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교훈을 배웠으며 운영자를 하는것이 나에게 합당한가하는 회의가 올정도 08.10.10 08:57
grace 입니다, 물론 저도 제가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에 편협한 생각일수도 있지만 성경적이나 신학적 토론에서는 보수신앙 신학일지라도 실제로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를 많이 배려할려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부족한점이 많고 실수가 있는 사람임을 알기에 이런저런 일들을 통하여 주님이 저를 다루어가시는구나 생각합니다,어째튼 운영자하는일이 참 조심스럽습니다, 슬프기도 합니다, 08.10.10 09:01
agok 그레이스님만한 운영자님이 어디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운영자님으로서 자격은 오히려 차고 넘치기에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운영자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운영자님도 회원이고 회원으로서 의견을 개진하다 오는 마찰은 우리 모두 겪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무리 의식하고 조심해도 완벽한 사람이 아닌데 어찌 그것을 피할 수 있겠어요. 이 토론 주제가 다른 주제보다 우리 모두에게 더 민감하게 작용해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기운 내시기를... 08.10.10 10:12

사랑나누기 토론, 토의의 원만한 진행을 위하여 함께 생각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드러난 견해에 대한 견해의 충돌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즉 충돌에서 표현되는 언어는 글 쓴이의 인격에 대한 것이 아니고, 견해 차이에 오는 언어로 표현하시고, 또 그렇게 받아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고상하게(?) 쓴다는 것이니 까다로운 표현이 되었습니다. 다시 간추립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정 충돌이 없기를 서로 노력하자는 말입니다. 뒤의 글이 저의 본래의 표현 능력이랍니다. ㅎㅎ^^ 주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한 하루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08.10.10 09:03
조심스레 그레이스님을 보고 그냥 별다른 신경을 안 쓰고 지나치려 했는데, 공적으로 지적해야 할 문제가 보여서 지적하겠습니다. 그 전에 기본적으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인 것 같습니다 라는 표현보다는 ~이군요 라는 표현이 국어학적으로 더 좋은 표현입니다. 전자의 애매모호한 자기주장의 표현보다는 후자처럼 명확히 말해놓고 그 말에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라고 배웠거든요. 그래서 그레이스님이 희망한 무례한 표현인 것 같군요 보다는 제가 말한 무례한 표현이군요 라는 것이 더 바르고 명확한 국어 표현입니다. 어제는 한글날이었는데.. 08.10.10 15:54
조심스레 그런 점에서 무례하군요가 무례한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그레이스님의 주장은 궤변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판단하고 사과하면 그걸로 끝이지.. 사족을 붙여서.. 잘못된 말을 향해서 상대가 항의한 그 표현 자체도 역시 잘못된 말이라고 양비론식으로 덮어씌우는 것은 말장난입니다. 그런 말장난은 사양하겠습니다. 자신이 잘못해놓고서도 상대의 말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상대도 잘못했다고 몰아갈 수 있다면 이런 우중충한 방식은 좀 그렇겠죠? 사과를 하려면 확실히 하시고 잘못한 게 없다는 양심의 판단이 들면 그냥 넘어가시면 됩니다. 어정쩡한 사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08.10.10 15:58
조심스레 그리고 오늘도 한가지 더 무례한 그레이스님의 행동을 지적해드리겠습니다. “넷상이지만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금 나이를 지적하셨는데 갑자기 나이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설마 나이가 벼슬이라는 전근대적 유교 사고방식을 씻어내지 못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제가 나이든 사람들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 뜬금없이 나이를 꺼내는 것은 그레이스님의 무례한 비본질적 얘기라 생각되고, 특히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운영자는 회원의 개인정보를 사적으로(그게 토론이든 다른 것이든)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데 08.10.10 16:05
조심스레 지금 그레이스님은 분명히 제 개인정보의 나이를 클릭해보고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확인하고(물론 저는 그레이스님 나이를 모르지만 님의 말로 추측해보건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신 것으로 강력히 추측됩니다. 뜬금없이 나이를 들고 나오시는 것은 매너없는 행동입니다. 며칠전부터 지금까지 그레이스님의 연이은 행동에 실망스러움을 느낍니다. 넷상에서 명시적으로 토론자들이 각각 나이를 자발적으로 밝혔다면 그때는 서로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조금 더 그 점을 고려해보자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08.10.10 16:05
조심스레 지금처럼 넷상에서 각자 나이를 밝힌 적도 없고 서로의 나이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냥 토론하면 됩니다. 그런데 나이란 요소를 거론하며 상대에게 말을 조심해서 하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운영자의 공적 매너에서 벗어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밌는게요. 그레이스님의 저런 말 자체가 회원정보를 상당히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보통 회원들끼리는 서로 회원정보를 볼 수 없으니까 서로 나이를 모르는 상황이고 그래서 나이 때문에 기분이 불쾌할 리는 없잖아요? 만약에 상대가 나에게 심하게 말했다면 그 심한 말 자체 때문에 기분은 나쁠 수 있어도 상대가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08.10.10 16:09
조심스레 어린 사람한테 그렇게 공격당했다는 차원에서는 불쾌하고 말고의 가능성이 아예 원천봉쇄되어 있습니다. 서로 나이를 모르니까요. 아예 불쾌함의 요소에서 고려대상이 될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지금 나이 얘기를 하는 것은 회원의 나이를 볼 수 있는 운영자 그레이스님이 사적으로 나이란 요소를 거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요. 운영자 그레이스님이 조심스레의 회원정보를 클릭해보니까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인 것이 확인되고 그래서 그레이스님이 그런 말을 하신 것이겠지요. 넷상에는 나이 많은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나이 어린 그대가 말 조심 하라고 말이지요. 운영자 말고는 누구도 조심스레의 나이를 알 수가 없고 그러므로 08.10.10 16:11
조심스레 토론할 때 기분 나쁘더라도 ‘나이’란 요소 가지고 기분 나쁠 가능성은 있을 수가 없는데 운영자 그레이스님은 운영자 권한으로 나이를 확인한 후에 그것 때문에 지금 조심스레의 말에 기분 나빠서 저런 충고를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운영자로서 자신의 이용권한을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깨닫길 바랍니다. 저는 운영자가 이렇게 자신의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보면 큰 불쾌감을 느낍니다. 책임감이란 덕목이 그리운 시절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08.10.10 16:18
바로미 저는 조심스레님이 상대방의 글을 잘 독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저의 글도 자신의 심중의 추측에 맞게 해석한 것도 그렇고요. 저의 글을 보면 분명한 원리인 중생후의 자살과 구신들림이라는 공통적 원리를 언급했음에도 님은 저의 글을 논점을 마치 딴 것으로 옮기려고 한다는 상대방이 전혀 생각지도 않는 추측을 섣부르게 언급합니다. 위의 덧글에서도 조심스레님의 닉네임에 맞지 않게 너무 성급한 추측으로 그레이스님을 평가하고 있는데요.. 추측은 추측으로 끝내셔야지요. 제가 조심스레님에게 묻겠습니다. 몇 가지.. 08.10.10 16:29
바로미 첫째) <그레이스님은 분명히 제 개인정보의 나이를 클릭해보고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확인하고(물론 저는 그레이스님 나이를 모르지만 님의 말로 추측해보건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신 것으로 강력히 추측됩니다>-> 이것이 무례하고 나쁜 것일까요? 그레이스님이 토론하는 분들의 대략적 나이를 확인하고 그 나이에 맞게끔 중재를 한다면 그래서 이 회원정보를 확인한 것이 무례하고 기분 나쁜 것일까요? 08.10.10 16:33
바로미 조심스레님은 사람을 사귀고 또한 토론을 할 때에 나이 불문하고 초등학생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마음과 문장력으로 임하십니까? 저도 나이가 어립니다. 물론 조심스레님보단 많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을 굳이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님의 회원정보를 봅니다. 그 이유는 운영자로서 어쩔수 없는 운영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토론하시는 분들의 심중과 그들의 신앙경력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나이를 통해서 그의 지적이해력이나 삶의 경험등을 어느정도 감지를 해야지만 전체적 토론이 가능합니다. 만약 이론만 무성한 토론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겠지요. 탁상토론이 될테니까요. 08.10.10 16:37
바로미 저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간혹 무례한 문장을 구사합니다. 그 이유는 그 나이 먹도록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확인을 하지 않을 경우... 그가 어떤 상태인지 분산된 마음과 정리되지 않는 마음 뿐일 것입니다. 아마도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 모르나 보다.. 라고 생각하겠지요. 넷상에서 오가는 토론이지만 넷상의 토론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나이와 그의 신앙의 정도도 엄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정보를 더 빨리 알아내면 토론이 더 원할하게 상대방 모두에게 유익이 되게 할 수 있지요. 08.10.10 16:42
바로미 또한 원래 그러한 신학을 지향하시는 분이 아님을 타카페의 글을 통해 알았을 경우 그가 만약 어쩌다 오해나 상대방의 실수나 왜곡된 편향에 의한 독해력으로 그의 신학의 의심을 회원들이 한다면 그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것도 역시 운영자의 일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운영자는 회원들에 대한 여러 정보를 수집해야 하지요. 그것이 일반 회원들에게 무례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이 밖에서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거나 말거나 아들놈의 말만 믿고 있는 미련한 짓을 하는 것으로밖에 저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즉 그 아버지의 가정 운영은 한마디로 빵점이지요. 스토커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가정을 리드할 정도의 정보는 08.10.10 16:44
바로미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버지로서 아들놈의 친구 이름도 모르고 아들놈의 취향과 좋아하고 소망하는 것도 모르고 아들놈 학교 선생 이름도 모르고 그야말로 아들놈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들아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는단다>라는 말은 결코 아들을 신뢰하는 아버지로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08.10.10 16:47
grace 제가 나이를 지적한 것은 사랑나누기님이 연세가 있으신 분인 것은 우리 회원님들이 아시는 분이 많습니다, 사랑나누기님 한테 하는 표현이 민망해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저는 님한테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님이 그렇게 기분 나쁘다면 사과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조심스레님은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전 조심스레님 때문에 참 기분이 나쁘지만 님보고 뭐라고 안합니다 08.10.10 16:49
grace 제가 조심스레님의 글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 것이 나쁜 일입니까? 저는 고의로 조심스레님에게 잘못 한 것 이 없습니다,반론을 전개하는 가운데에 상대가 절대주권을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여서 쓸 수 있는 표현이고 자신은 절대주권을 믿는다고 반론하면 됩니다, 정말 이해하면서 용납할려고 하는데 매우 무례합니다, 전혀 조심스럽지 않는 분이군요, ㅡ님은 신학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인신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공격당한것처럼 느끼면 길길이 야단이신 분이 상대에게는 참 함부로 공격하네요 08.10.10 16:58 
 바로미 사랑나누기님이 사과할 때는 보기 좋다고 하시더니.. 08.10.10 18:35
조심스레 보기 좋은 모습은 보기 좋다고 평가하고 보기 안 좋은 모습은 보기 안 좋다고 평가하는 것이 상식이지요. 나는 사랑나누기님과 최소한 의견은 달라도 서로 좋게 이야기를 나누어서 아주 기분이 좋았는데 운영자 두 분은 아주 감정적으로 나오시는군요. 차라리 사랑나누기님이 운영자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08.10.10 18:38
사랑나누기 "어떤 경우에도 감정 충돌이 없기를 서로 노력하자는 말입니다."라는 부탁을 드리고 부득이한 개인 사정으로 이곳에 들리지 못하였다가 이제 처음 들어왔습니다. 저의 글이 감정 충돌의 도화선이 된 점에 대하여 사과합니다. 또 삼손의 죽음에 대하여 의견을 수용하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저의 생각은 다른 견해에 대하여 좀더 깊이 있는 토론, 토의를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어쨓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저로 인함이니 당분간 자숙하는 뜻에서 글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운영자님께서 지우셔도 됩니다. 의견주시면 저가 지울 수도 있습니다. 양무리 마을 회원님께 거듭 사과합니다. 08.10.11 17:57
grace 사랑나누기님 때문이 전혀 아닙니다, 좋은 주제를 주셔서 함께 생각하고 성경적으로도 알아보아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제가 운영자로서 미숙하여 일어난 일이니 개의치마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더욱 좋은 글을 올려주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섭섭한 마음을 가질겁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마음믈 깨닫기도 하고 목사님들의 어려움도 잠시 생각해볼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08.10.14 08:53
 agok 사랑나누기님의 글을 늘 기대하며 까페에 들어오는데... 자숙하지 마시기를 강력히 권고해 봅니다.(죄송)^^ 제가 사랑나누기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서요. 인터넷에서 어느 목사님들(전대복 ,주안에 살으리랏다 카페주인)이 사탄의 기원에 대해서 기존의 설을 완전히 부인하고 개신교를 비판하던데 사랑나누기님이 전에 천사의 기원과 분류에 대해 좋은 글을 올려 주셨던 것처럼 사탄(마귀)의 기원에 대해서 자세한 글을 올려 주시면 안될까 하구요. 바쁘실테니 천천히 시간나시는 대로 사랑나누기님 마음 내키고 편하실 때에..이렇게 부탁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08.10.14 04:35
사랑나누기 부족한 자료이지만 agok님의 강력한 권고를 순종하여 <사단, 마귀, 귀신에 대한 이해>라는 제목으로 올렸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신갑주>를 많이 참고하였답니다. 08.10.14 18:44


정죄와 비판에 대하여

 

저차원 사전적인 의미만으로는 분간이 안갑니다.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 잘잘못을 가릴때 비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그런말이 없는데 대상이 교인이라면 정죄네 그게 아니고 비판이네 말들이 오가거든요. 비판과 정죄를 같은 의미로 알고있는 사람들도 있는거 같구요. 저도 딱히 이게 비판인지 정죄인지 분간을 못해서 나름 비판한다고 하는데 이게 혹 정죄는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갈성렬씨 언행이 도마에 올랐을때 이걸두고도 비판과 정죄라는 단어가 오갔잖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눈에 들보도 빼고 상대방눈의 티끌도 빼주는 상호 발전을 위한 비판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취지로 비판 하는것까지도 정죄로 몰아붙이는건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똥묻은개 겨묻은개 하는 식으로만 해석하고 있는 문제로도 보인단 말이죠. 정죄와 비판이 도대체 뭐 어떻게 다른것인지 개념을 좀 확실히 잡아야될 필요가 잇을거 같습니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달리 생각하면 사람들이 마리아의 행위를 율법에 비추어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비판을 했다고도 보이거든요? 

사랑나누기  '정죄'(定罪, purgation)는 객관적인 법에 근거하여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으로 유죄선고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법정용어입니다(롬8:1).그리고 '비판'(批判,criticism)은 주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 판단하거나 지적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비판'(마7:1)은 '재판','송사','심판한다'는 뜻을 가진 말로,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재판관의 판결처럼 '정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0.04.03 17:17

따라서 위에 예시를 든 제갈성령씨 문제는 비판이지 정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형제를 심판(judgement)하고 정죄하는 일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마7:1). 10.04.03 17:20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간음행위를 사람들이 정죄했다고 말씀하셨지만>이란 성경 어디에 있는 내용인지요?
혹 '간음 중에 잡힌 여자'(요8:2-11)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율법의 기준에서는 비판을 넘어서 정죄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자의 죄를 가볍게 보신 것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아시고, 함부로 재판하는 행위를 옳지 않으며, 정죄하게 전에 먼저 살피는 심령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주신 장면입니다(갈6:1).
10.04.03 18:11
저차원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말하는거 맞습니다^^ 그리고 (마7장 1~5)에 나오는 비판은 제가 가진 톰슨주석을 요약하면 비판하는것을 무조건 금지하는것이 아니라 남을 비판하기전에 자기에게 먼저 적용을시키라는 의미로 서로의 잘못을 고쳐가는 발전적인 비판을 하라는 의미라고 나와 있거든요...단어도 그냥 '비판'이라고만 하지 '정죄'라는 단어는 없고요... 정죄라고 한다면 그 구절들은 무조건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야 되는데 말이죠... 주석과는 틀리네요. 10.04.03 19:32
객관적인 법이라면 율법을 뜻하는건데... 정죄가 율법에 근거하여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라면...그럼 예를 들어서 교회에 다니는 매춘부에게(실제로 교회에 다니는 매춘부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간음죄를 짓고 있으니 직업을 바꾸라 라고 말하는것도 정죄가 되는건가요? 10.04.03 19:49
사랑나누기  제한된 공간이라 요약하다보니 의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 전체에서 '비판'을 어떻게 적용하는 가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님의 질문에 '비판하지 말라'(마7:1)를 사례로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비판'(마7:1)은 헬라어 '크리노'의 번역으로 '재판','송사','심판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마7:1)는 '심판하지 말라'(표준새번역)는 표현이 더 적절한 번역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의 '심판'(審判, judgement)은 하나님에 의해 내려진 판단 또는 판결(벧전4:6;롬2:12)로 불의한 사람에게 심판은 정죄입니다(유1:15;요12:48).
10.04.03 21:43
사랑나누기  정죄(定罪, condemn)는 죄를 판단하여 결정함을 의미합니다(요3:19). 정죄는 심판 때에 이루어지며(눅11:31,32), 그 때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가 없고(롬8:1),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막16;16). 예수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고(요8:11),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눅6:37). 따라서 남을 정죄하는 자체가 죄가 됩니다. 10.04.04 09:45
사랑나누기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말하는 것이라면 위 본문의 내용을 '간음 중에 잡힌 여자'로 수정하여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본문만 대충보고 가는 회원이 있기에 혹 오해의 소지(마리아가 간음?)가 있어 그렇습니다.
10.04.04 09:45  매춘부에게 간음죄를 짓고 있으니 직업을 바꾸란 말은 정죄가 아니고 권면이죠. 왜냐하면 매춘이 죄라는 것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고, 모르는 사람이라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04.04 09:42
사랑나누기  참고로 '주석'은 개인의 의견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유념하시고 참고로 활용하셔야 합니다.'성경은 성경으로'해석해야 바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톰슨 주석이 중요한 부분(비판->심판(마7:1)=>습관적인 정죄성향(눅6:37)을 놓쳤네요. 10.04.04 10:01
사랑나누기  객관적인 근거에 의한 비판(批判,criticism)은 권장되어야 할 분야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비난'(욥17:5)을 '비판'으로 오용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인 판단으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례가 인터넷 상에 넘치고 있더군요. 지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것은 토론문화에 대한 미숙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양무리 마을에서는 이런 문제가 야기될 때마다 슬기롭게 비켜가더군요. 10.04.03 18:05
저차원  지적하신 부분은 수정을 했습니다... 전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알고 있어서 그냥 마리아라고 했네요... 간음하다 걸린여자가 막달라 마리아가 맞죠?... 저는 마7:1~5 를 옳바른 비판을 하라는 뜻으로, 그리고 간음 중에 잡힌 여자 일화에서는 정죄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네요... 전 비판을 좋은 의미로 알고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10.04.04 21:55
저차원  심판 때에 이루어지는 정죄라면 예수님을 믿고 안믿고에 대한 심판인데... 그럼 정죄라는게 구원에 속한사람이냐 아니냐를 판단 결정하는 행위를 뜻하는건가요?... 그러니까... 매춘부에게 "간음죄를 짓는것을 보니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결정하는것이 정죄가 되는건가요? 10.04.04 21:59  근데 그렇게 보니 법정승려는 지금 지옥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정죄가 되는거 같은데... 아~막 헷갈리네요 ㅡ.ㅡ; 10.04.04 22:05
사랑나누기  1. 간음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간음한 여자와 동일인이 아닙니다.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인으로(눅8:2),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긴 여인입니다(눅8:1-3). 안티들이 예수님을 흠집 내기 위한 엉터리 정보입니다.10.04.04 22:12
2. <정죄라는게 구원에 속한사람이냐 아니냐를 판단 결정하는 행위를 뜻하는건가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결정하는 행위는 심판(마25:32,33;요3:18)이지 정죄가 아닙니다. 위에 밝혀드렸는데, 다시 옮깁니다. 정죄는 심판 때에 이루어지며(눅11:31,32), 그 때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가 없고(롬8:1),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막16;16). 10.04.04 22:26
3. <매춘부에게 "간음죄를 짓는것을 보니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결정하는것이 정죄가 되는건가요?>-> 정죄가 됩니다. 정죄(定罪, condemn)는 죄를 판단하여 결정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요3:19). 10.04.04 22:29
4. <근데 그렇게 보니 법정승려는 지금 지옥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정죄가 되는거 같은데..>->정죄가 됩니다. 분명하게 하실 일은 '지옥에 가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죄하지 말라고 하신(눅6:37)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0.04.04 22:35
사랑나누기  참고로 성경에 대하여 기초적인 의문은 <전신갑주> 게시판의 <성경사전>과 <성경과 신앙의 이해>를 보시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답변 자료의 출처가 대부분 거기에서 인용하였습니다. 10.04.04 22:40
전상진  역시 ~ ~ 사랑나누기님 많이 배우고 갑니다 빵긋 10.04.05 00:03
저차원  갈수록 더 헷갈리네요 ㅡ.ㅡ; 죄를 판단하여 결정한다는 의미라면 매춘부의 행위를 "간음죄다"라고 판단 결정하는거죠? 그럼 매춘녀인 A씨에게 "당신 짓고 있는것은 간음죄다" 이렇게 하면 정죄가 된다는건데 "당신은 간음죄를 짓고 있으니 직업을 바꾸라"이렇게 하면 권면이라고 하시니... 권면에 벌써 정죄하는 내용이 들어있잖습니까? 10.04.05 18:14
저차원  불교는 구원이 없다(A) 법정승려는 불교인이다(B) 고로 법정승려는 구원받지 못하였다(C)... 여기서 (C)가 정죄하는거라면 마땅히 (A)도 정죄하는것이 되는거 아닌가요? (A)같은 말은 흔히 쓰고 있는건데... 10.04.05 18:09
전에 오인용 목사님 글에서 "지옥불에서 타고 있을 김수환 추기경~"의 표현을 본적이 있는데 이게 정죄를 한 것이군요... 막달라 마리아는 자주 들어오던 거라서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간음 중에 잡혀 돌맞아 죽을뻔한 것을 예수님이 구해주시던 장면이 나오데요. 10.04.05 18:06
저차원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사랑나누기님께서 정죄에 속하는 예와 권면에 속하는 예를 몇가지씩만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단어 의미의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안되니 예들을 보면 상당한 도움이 될것 같은데요... 10.04.05 18:14
또한가지... "안00씨 최00 남매 이들의 자살은 성경에 비추어봤을때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봐야한다" 이렇게 성경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도 정죄가 되는가요? 10.04.05 18:49
사랑나누기  저가 쓴 글을 정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글의 일부만 입력하시니 헷갈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저의 댓글을 다시 옮깁니다. < 매춘부에게 간음죄를 짓고 있으니 직업을 바꾸란 말은 정죄가 아니고 권면이죠. 왜냐하면 매춘이 죄라는 것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고, 모르는 사람이라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글에서 매춘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직업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권면이라는 말입니다. 정죄가 아닌 이유를 뒤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10.04.05 20:03
사랑나누기  사례1) <너는 나쁜일을 하고 있으니 그 일을 그만둬>는 죄를 깨닫게 해주는 권면의 표현이고, <너는 나쁜일 을 하고 있으니 지옥간다>하는 것은 정죄하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사례2) <너는 생명책에 기록되도록 노력해라>는 권면이고 <너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여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정죄입니다.
10.04.05 20:44
사랑나누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오는 장면과 대사는 대부분 상상이고 연출일 뿐입니다. 성경에 근거를 두지 못하는 그 어떤 것도 성경의 우위에 둘 수 없습니다. 성경에 한 구절을 인용하였더라도(이단들이 가장 애용하는 방법임) 성경의 다른 말씀으로 보증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이고 바른 믿음입니다. 10.04.05 19:46
사랑나누기  <성경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도 정죄가 되는가요? > -> 신약시대에는 정죄가 수시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심판 때에 있습니다(눅11:31,32). 무엇보다 누구나 정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죄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눅6:31)10.04.05 20:42
저차원  그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있는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 라는 것도 정죄가 되겠네요? 저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뎁... 또 주변사람들한테 개인적인 문제로 자살한 사람은 구원이 없다는게 성경이 말하는 진리니 안00 최00남매는 구원받지 못한걸로 믿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그것도 정죄한 거네요 ㅡ.ㅡ;
그러면 어떤식으로 말해야 됩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걸 내 입으로 옮기는건 정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말 못한다" 뭐...이렇게 해야 하나요? ㅡ.ㅡ;
10.04.05 21:04
사랑나누기  문제의 성격에 따라 큰 덩어리로 마무리 지을 것을 세세하게 따져들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두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쉽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정죄하는 것을 분별하셨으면 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저가 위에서 여러번 답글로 올린 '정죄'의 개념과 방법, 시기 등을 꼼꼼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0.04.05 21:24
사랑나누기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니 단정하기 어렵다는 신중론도 있습니다. 저 개인은 전자에 속합니다.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걸로 믿어야한다>->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표현은 정죄가 아닙니다. 진리를 드러낸 것이지요. 10.04.05 21:35
저차원  흠... 범위가 많이 좁혀졌습니다...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는것 같네요... '천주교는 구원이 없는 종교다(진리)'.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인이었다(상태)'. '고로 김추기경은 구원을 못받았다(정죄)'. '못받았을 것으로 믿는다,생각한다(바른 표현)'.
'매춘은 간음행위이다(진리)'. '김씨는 윤락녀이다(상태)'. '고로 김씨는 간음죄를 지었다(?)'. '간음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 이 부분은 좀 이상한데 바로잡아 주십시오.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 라는 표현은 교황의 자리에 있는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니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뭐 이렇게 되어야 바른것 아닌가요?
10.04.05 23:54
사랑나누기  범위가 좁혀 지셨다니 기쁩니다. 대화가 복잡하게 얽힌 것은 처음의 질문에서 곁가지가 많이 생기고 논지는 대상에 따라 달라짐을 간과한 탓입니다. 삼단논법에서 대전제의 명제가 진리라면 논리로서는 정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심판하는 정죄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보적인 표현을 하자는 것입니다 10.04.06 08:20
사랑나누기  1. <김추기경은 구원받지 못한다> --> <김추기경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삼단논법도 추리의 형식으로 개념에 따라 모든 부분에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 천주교에는 구원이 없다(대전제: 참)->김추기경은 천주교인이다(소전제: 참) ->김추기경은 구원받지 못한다(추리적 결론).] 따라서 결론은 '참'으로 성립합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구원 여부는 하나님 뜻에 달려(우리의 판단과 다를 수 있기에)) 우리로서는 단정적 선언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추기경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로 유추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란 견해입니다.
10.04.06 08:31
2. <김씨는 간음죄를 지었다> --><김씨는 간음죄에 해당한다>
'매춘, 간음행위, 윤락녀, 간음죄'란 용어는 쓰임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집니다. 대전제 앞부분과, 소전제의 뒷부분의 용어가 일치하여야 삼단논법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매춘은 간음죄다(참) -> 김씨는 매춘을 했다(참)-> 그러므로 김씨는 간음죄를 지었다(참)]일 경우에 성립합니다. 여기서 학문적으로나,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할 경우에는< 김씨는 간음죄를 지었다>라고 쓰더라도 우리가 적용할 때에는 <김씨는 간음죄에 해당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른 표현입니다.
10.04.06 10:35
3.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 -->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란 명제는 기독교 안에서는 신학적으로 검증된 '참'입니다. 그러나 '심판'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서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가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심판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일 것이다>, <해당한다>, <생각한다> 등으로 유추하는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10.04.06 08:35
저차원  아~하 ! 그렇군요... 삼단논법~~
대전제 ( 명제가 진리라면 정죄가 아니다 )
소전제 ( 대전제와 소전제간의 용어가 일치하여야 한다 )
결론 ( 단정적 선언이 아니라 추정의 원칙이어야 한다 )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네요... 그리고 (~라고 믿는다)라는 단어는 의미로 봐서 추정이 아니라 단정적 선언에 해당되겠군요... 정죄와 비판의 개념도 모르는 상태였다보니 객관적 비판의 내용에 정죄하고 있다는 반박이 있을때마다 혼란스러웠는데 앞으로는 분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10.04.06 12:34
저차원  사랑나누기님께 너무 많은 수고를 끼쳐드려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도 인간인지라 배우는 학생이 이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면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낼 수가 있는데 사랑나누기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군요^^ 덕분에 저는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되니 죄송하면서도 기쁘기 그지 없네요 ㅡ.ㅡ; 10.04.06 12:41
사랑나누기  이해하셨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세상학문은 왜(?)로 시작해서 왜(?)로 끝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왜(?)로 시작하더라도 어느 시점에 가서는 멈추어야 되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왜(?)의 방향이 잘못되면 이단으로 흐르거나 실족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저차원님의 신앙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으로 자라나길 기원합니다. 10.04.06 16:38
 

죽음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5. 죽은 후의 세계(世界)>는 성경에 표현된 기준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더욱 느낀 것은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정류장인데, 영원히 사는 곳처럼 아둥바둥하는 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안쓰러워졌습니다. 도통한 소리. 죄송. 08.08.27 01:32
행복한당신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08.08.27 01:44
grace 저는 복중에서 죽음의 복을 가끔 구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주안에서)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들림받으면 제일 좋지만 주님께 영광이 되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08.08.27 08:29
agok 공감 ^^제 바램은 우리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일날 저와 제 가족을 포함하여 온 성도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주님이 재림 했으면 하는 것. 08.08.27 14:08
사랑나누기 고종명(考終命,세상: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음/ 성도: 주님 안에서 살다가 영생을 얻음)은 누구나 구하는 귀한 복이지요. "주님께 영광이 되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아멘!"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08.08.27 08:38
석천 좋은 글을 봅니다. 제 생각에 죽음이란 육과 영을 얘기하고 있으나 죽음에는 영의 죽음만 있다고 봅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냐 못받았느냐 천국으로 가는냐 영원한 음부로 가는냐만 있다고 봅니다. 그 옛날 염세주의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알려고도 했지만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하고 싶은 것은 육신은 소모품이며 쓰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굳이 죽음이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육신을 쓰라고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육신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현실에 집착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갖고 살아가면 행복과 기쁨이 늘 충만되어야 하는데 08.08.27 08:48
사랑나누기 석천님의 뜻은 헤아립니다. 그러나 '육신은 소모품'아라는 표현은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으로 살아있을 동안 귀히 관리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그릇에 아름다운 영혼을 담으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실 것입니다. 08.08.27 09:03
석천 옳으신 말씀입니다.소모품이라는 표현이 좀 그러네요. 뜻은 귀하게 주신몸, 귀하게 관리하며 잘 사용하라 주신 생명의 은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표현은 그랬지만 육신에 대해 넘 집착하지 않는다는 제 생각의 표현이..죄송하며, 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08.08.27 09:50
그피 죽음에 대한 교리와 재림에 대한 소망을 생각하노라면 내 처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나누기님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8.08.27 10:13

 

청소년 문제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아이들 탓이 아닙니다. 모두 물질 만능주의 탓입니다. 부모는 가정교육을 포기하고, 자녀의 관리(?)를 학교와 학원에 위임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오늘도 무사히', 학원은 '내일도 나오렴'으로 시간 관리를 합니다. 사회는 유해 환경에 아이들을 몰아넣습니다. 그리고는 "요즈음 청소년들이 문제야."합니다. 서로 "네 탓이야!" 하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나의 탓이요!" 반성하며,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유산으로 남기는 부모와 사회가 되기를, 이 연사~ 강력히~ 강력히~ 소망합니다!! 08.09.05 22:22
바로미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로서는 아이들 탓이 아니라는 말씀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 -; 어른과 비교하면 그 지성적 사고력이나 생각만 좀떨어질 뿐 그 마음의 성향은 동일합니다. - -; 08.09.05 23:33
사랑나누기 저도 30여년 교직에 있었습니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보면 아이들의 사악함의 근원지가 부모이고, 사회의 기성세대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즉 유전인자보다 환경인자의 영향이 다문화 시대에서는 그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른 아이(?)를 양성한 동인이 여기서 연유한다는 것입니다. 08.09.06 20:56
상수리 바로미님과 사랑나누기님의 의견이 다 받아들여집니다. 요즘 주일학교 아이들 얼굴보기가 겁납니다. 심방 및 전도를 가야할 시간이 되면 압박감을 가집니다. 이 말이 이해되시는지요....(회의를 느낄 때도 많습니다) 08.09.06 21:41
행복한당신 우리모두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먼저 바로 가르쳐야 할것입니다 파이팅입니다 당장 시작합시다 08.09.06 01:14

 

축도에 대하여

 
한우리 저는 축도를 말씀강도와 깊이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복의 개념이나 단순히 복을 비는 개념 정도가 아닌,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설교자가 그 말씀을 받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그 말씀의 복이 임하기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일단 정의하고 싶네요, 그렇다면 축도는 설교자가 해야 되는 것이 원칙이겠죠. 09.08.07 17:13
포커스 한우리목사님 말씀의 대언자라는 구절이 요일2:1절 하단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그리스도라"하셨는데 목사님에게 대언자 라는 것이 합당한것인가요? 궁금하네요 그리고 축도는 설교자가 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엑서 벗어나면 잘못된것 인가요? 09.08.10 00:59
한우리 '대언'이란 말 그대로 대신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위에서 한 표현도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도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아서 하셨다고 했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의식으로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언하지 않으면 자의로 말하지 않겠습니까?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대신 전하는 시간이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축도가 설교자가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렇지 못할 상황이 될 때에는 융통성 있게 고려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09.08.10 15:56
포커스 목사님의 유연 하심에 이해가 됩니다^^ 09.08.10 15:58
나다나엘 그러고보니 저희교회 설립예배때 많은 목사님들이 오셨었는데 기도 따로, 말씀 따로, 축도 따로였던것 같은데, 그리고 어느 결혼예식에서도 주례목사님 따로, 축도는 또 다른 목사님이...왜 이리 일관성이 없는건지.. 보는것만으로도 배움이 되는 그런 신앙생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09.08.07 17:47
사랑나누기 축도는 성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복을 베풀어주심을 설교자가 선언하는 예전 행위입니다(고후13:13). 따라서 사도가 복음을 증거하고 마지막에 축복했는 것처럼 오늘날 설교자가 사도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한 후 사도가 선언한 복을 그대로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이 성경적인 바른 예전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09.08.09 20:26
사랑나누기 축도 순서가 예배에 정착된 시기는 4세기로서 성찬성례전이 있기 직전에 행하여졌는데, 6세기에는 이 축도가 교회에서 한 때 생략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세에 와서는 예배의 끝 부분의 순서로서 정착되었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가들 중에 루터나 칼빈 같은 이들은 예배의 끝 부분에서 전통적으로 민수기 6장 24-26절의 아론의 축도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고후13:13을 쓰는 것이 보통이나 달리 히13:20-21;빌4:7등도 사용합니다. 09.08.07 22:45
상수리 말씀 감사합니다. 09.08.08 03:03
포커스 사랑나누기님 저는 님의 댓글도 옳다고 봅니다 헌데 오늘 저두 고전13:13절을 읽으면서 그러면 이 구절은 목사님에게만 축도자에게만 준 말씀일까요? 성도들이 이구절을 읽거나 기도시에 이구절을 쓰면 안되는 건가요 하는 의구심이들었습니다 축도자에게만 이구절을 쓰라거나 말하라고 주신것일까요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09.08.10 00:53
사랑나누기 포커스님 반갑습니다. 저의 앞의 댓글은 '축도'라는 예전행위에 대한 제한된 범위에서의 글이었습니다. 고후13:13 절의 <너희와 함께 >는 여러 사람(고후1:1)을 대상으로 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1:1의 관계에서도 쓸 수 있는 말씀이며, 자신에게 삼위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묵상하셔도 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축도'라는 선포적인 예전 행위라면 교회 관습을 따르는 것이 좋겠지요. 09.08.10 09:07
 
축복에 대하여

1. 다시 에서에게 축복할 수 없는 이유?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은, /첫째, 장자권(창27:2-4)의 상속에 대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창25:33,). /둘째, ‘복의 근원자’로서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창27:27-2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창12:3). /셋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창27:20;민23:20)

2. 축복권이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지위의 상하를 떠나 누구나 서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수14:13;삼하8:10;왕상1:47;롬12:14)그러나 제한적일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는 경우입니다(레9:22;신10:8,21:5), 둘째, 왕이나 족장으로서 백성을 축복하는 경우입니다(신33:1;삼하6:18대하31:8;). 셋째, 가장으로서 가족을 축복하는 경우입니다(창49:26,28;삼하6:20;히11:21).

3. 자손에게 축복하는 의미는?

복이 자손대대로 이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 때문이고(창49:26)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49:25).

4. 축복이란?.

'축복(祝福)'이란 '내가 누군가를 위해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복을 비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계에는 이 말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축복하다'라는 말을 마치 '복 주다'라는 말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개념이 분명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사...."(창1:28). -> 하나님께서 사람들(그들)에게 말씀하신 경우이다.

*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27:4). -> 이삭(나, 내)이 아들 에서(네게)에게 말하는 경우이다.

*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창27:27). -> '복'과 '축복'을 구별하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미련한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궁금합니다. 송인규 교수님의 책을 읽다가 이광호 목사님의 책을 읽었더니,

무엇이 옳은 것인지 헷갈려서요 예수님의 재림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두 분의 의견이 틀려서요..두 분다 좋으신 분들인데,,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해야 하나요? 지금 우리가 밟으면서 살고 있는 곳이 정화되서, 여기에 우리가 발전시킨 문화들도 정화된 상태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 그러고..또 한분은, 지금 살고 있는 이 곳과는 상관없이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된다고,,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요.

바로미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정화>되어, 우리가 발전시킨 문화도 <정화>된 상태가 된다??? 그 <정화>가 어떤 개념인지 모르겠지만 그 개념에 따라서 두 분이 같은 말이 될 수 있고, 혹은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될 수 있겠군요.. 위 부분에 있어서는 이광호 목사님의 견해에 한표를 주고 싶네요.. 현재의 하늘과 땅은 불타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되어 있으니.

grace 당연히 새로운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봅니다 09.08.29 08:54

미련한자 감사합니다. 09.08.29 08:56

강릉예명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 문제에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중생 또 부활,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화된 삶이 '나 아닌 나'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유토피아'를 말하는건 아닐까 고민하고 그때문에 무서워하기조차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자기의 모든 창조물 중에 '인간'만 자기 정체감을 잃지않도록 하시고 다른 모든 것은 홀라당 '새 것'으로 바꾸실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앞에 바울적인 겸허함을 가져야만 하리라고 늘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너무 길어질 것같습니다. 09.08.29 11:42

tiger :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할 때 보통 우리의 관념이 지구를 떠나서 우주의 다른 행성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창조(지구) 그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즉 지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신성한 불로 완전히 정화시켜 새로운 하늘과 땅으로 변형시켜 도래케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 자신의 존재(혹은 개성이)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시에 영광스럽게 변형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되네요~~

사랑나누기 <지금의 하늘과 땅은 타서 없어집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막13:24,25) //2.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벧후3:12) 사라진다(사50:6) //3. 체질(해, 달, 별 등)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벧후3:10), 녹아버린다(벧후3:12) //4. 땅에 있는 모든 것들도 타버리고(벧후3:10), 멸망할 것이다(히1;11)

사랑나누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합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라고 만물의 갱신을 밝히고 있다(행3:24) //2.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다(사65:17) //3.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여호와) 앞에 항상 있다(사66:22) //4.구원받은 자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벧후3:13) //5.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계21:1,20:11) //6.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왔다(계21:2,10) //7. 새 예루살렘성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계21:26,27)

 

헌금에 대하여


grace 십일조를 교회에 드림은 당연한 일이고 특히 소속한 교회에 드림이 가장 바람직하나 경우에 따라 다른 교회에 드림도 가하다고 자는 생각합니다만....왜냐하면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고 십일조를 율법이 아닌 십일조정신으로 드린다면 본교회만을 고집할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봅니다,  07:24
사랑나누기 grace님의 말씀 중에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고>에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그냥 준 것이 아니고 예배 중에 준 것을 간과하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 멜기세덱은 예배 인도자(제사장,창14:18)로 기도하고(창14:19), 말씀으로 찬송하라고 권면하였으며(창14:20), 이에 아브람이 찬송하였을 것이며, 그리고 아브람이 십일조를 준 것입니다(창14:20). 이것은 예배의 요소를 다 갖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만나서 준 것이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14:23
사랑나누기 그리고 <십일조를 다른 교회에 드림도 가하다>는 의견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것은 지원하고자 하는 교회에 가서 예배하면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또는 헌금, 연보)는 그 쓰임의 방향을 떠나 예배의 일부입니다(고전16:1,2;눅21:1-4;신23:18). 예배할 때에 십일조를 내지 않고 유기한다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말3:8,9)이란 비판을 받지 않을 까요? 아브람이 멜기세댁이 주관하는 예배에 십일조를 드린 것처럼(창14:17-20) 예배할 때 드려야 합니다. 즉 헌금하는 곳과 예배하는 곳을 이원화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4)  14:41
grace 연보를 자기교회에만 드려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당연히 자기가 예배드리는 교회에 드림은 기본이지만 예배드리는 교회 아닌 곳에 드림도 당연히 헌금이요 언보이며 따라서 십일조도 포함됩니다, 자기교회에 헌금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헌금을 하는 거지 자기소속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나누기님이 적으신 교회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자기 교회에만 헌금을 해야한다는 법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15:32
grace 사랑나누기님의 논리라면 자기가 출석하거나 그곳에서 예배드리지 않고도 시골교회나 선교지 같은 곳에 드리는 헌금은 헌금이 아닌건지요? 십일조도 당연히 헌금에 포함된다고 보면 그렇게 말하는것이 성경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질서적으로는 본 교회에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고집할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15:27
grace 헌금이 예배를 드릴 때에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삶속 에서도 나누고 구제하고 또한 예배드리지 않고도 연보를 필요한 곳(교회포함) 에 보낸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향기로운 예물이 아닐까요?  15:33
사랑나누기 grace님께서 저의 글에 대한 오해하신 부분과 다른 의견에 대하여 그 부분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1.<자기 교회에만 헌금을 해야한다는 법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성경적이라고 고집할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 → 저는 자기(?) 교회에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 적이 없는데요? 다만 예배 시에 드려지는 것이 헌금이란 개념임을 말씀드렸습니다.  21:31
사랑나누기 //2.<예배드리지 않고도 시골교회나 선교지 같은 곳에 드리는 헌금은 헌금이 아닌건지요? > →교회에서의 ‘헌금’ 개념은 예배 시에 나와 내 소유를 주님께 드리며, 주님께 헌신하겠다는 예배자의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회를 통하여 쓰여질 때 선교헌금, 장학헌금, 구제헌금 등 ‘헌금’이란 용어와 함께 하고, 교회를 통하지 않고 쓰여지는 돈은 선교 지원금, 장학금, 구제금 등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은 이런 용도를 ‘성금’이라 표현합니다.  21:32
사랑나누기 //3. <헌금이 예배를 드릴 때에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 문제는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고립된 개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행위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회중은 부름과 응답이라는 상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때부터 예배에는 기도(행12:5), 찬양(히2;12), 말씀(행20:7), 연보(고전16:1,2)의 네 가지 요소가 있어왔습니다. 이 때 드려지는 연보(헌금, 현물 포함)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눅21:1;고전16;1). 개인적인 구제는 하나님께서 별도로 기억하시고(행10:4,31),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마6;4)  21:41
사랑나누기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 교회의 주인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친히 자기 피로 값 주고 성도들을 사서 이 땅에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 한 분밖에 없으며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에서 개인적 기득권을 주장한다면 주님의 뜻에 앞서고자 하는 오만한 자리에 앉게 됩니다.

 

회개에 대하여


사랑나누기
<회개만 하면 안되니 속죄로 1000만원 헌금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 얻는 은혜로 자기 죄를 원통히 여기고 미워함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암4:6-11;겔3:18-21;33:11-20) 마음과 힘을 다하여 새로이 순종하는 것입니다(행11:18,2:37;고후7:10,11;롬6:18).그리고 헌금은 받은바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여 바치는 것이지 속죄의 대가가 아닙니다(신23:18;눅21:1,4).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08.09.04 00:29
예수피 맞습니다. '회개'는 '회개'이지, 속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것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08.09.04 12:45
사랑나누기 <회개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면 몸에 병이 생긴다.> ->병은 생리적, 정신적 기능이 손상된 상태(레13:3;창48:1;마9:35;요11:4)를 말합니다. 그리고, 병 고침과 죄 용서가 내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마9:1-8;약5:14-16). 그러나 몸에 생기는 병은 물리적 환경요인이 더 큽니다. 또한 병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 병도 있습니다(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요11:4). 08.09.04 00:30
사랑나누기 <가난의 옷을 버리고 부의 옷을 입어야 한다.> ->성경에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잠23: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를 선한 사업에 쓴다면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이나(신28;2-11;전5:19),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데 쓰면 부자는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시73:12;렘5:27-30;딤전6:9). 뿐만아니라 천국의 소망이 없어집니다(마19;23;눅18: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눅18:25). 08.09.04 00:32
사랑나누기 <예수님과 요셉이 만들었던 가구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예수님은 가난하지 않았다고 부유했다.> ->성경에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 거짓 목사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눅9:58;마8:20).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갈 쌔 그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마12:1;막2:23;눅6:1). 예수님이 부유하셨다면 사서 먹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08.09.04 00:32
사랑나누기 <회개하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가난의 저주를 끊어라. 가난은 저주다.> -> 가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대물림도 아닙니다. 가난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으로(삼상2:7) 또는 자신의 게으름(잠6:10,11,10:4), 놀이 즐김과 방탕(잠21:17,28:19), 술 취함과 탐식(잠23:21), 잠자기(잠20:13), 인색(잠11:24), 훈계를 저버림(잠13:18), 가난한 자를 학대함(잠28:3), 눈이 악함(잠28:22), 일하지 아니함(엡4:28)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잠28:6)고 말하고 있습니다. 08.09.04 00:32
상수리 덕분에 또한번 돌아봅니다. 감사합니다. 08.09.04 00:45
agok 사랑나누기님은 그냥 아니다가 아니라 이러이러해서 성경적으로 아니다 하며 관련 성경구절을 구체적으로 많이 인용해주시니 정말로 좋습니다. 저들이 어떻게 반박하겠습니까. 성실하신 답글들에 감사합니다. 08.09.04 03:28
사랑나누기 <회개하고 난 뒤에 주님이 기도를 듣기 위해 자신에게 다가오더라며, 처음에는 주님의 발만 보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무릎까지 보였다고 말했다.> ->주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롬1:20). 하늘에 계시며(마6;9), 우리와 함께 하시는(마1;23),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시115:3;요1:18;계22:19). 그런 분이 처음에 발만 보이고 나중에 무릎까지 보였다니, 얼토당토 않는 에스겔서(겔47:1-5)를 흉내내면서 요한복음 15장은 읽지 아니 한 모양입니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a) 08.09.04 00:48

행복한당신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08.09.04 02:41
예수피 저도 감사드립니다. 08.09.04 12:45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이지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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