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순서와 내용에는 각각 그 의미와 역사와 신학적인 근거가 있다. 우리가 음악목회자이면서 예배 순서의 의미를 알지 못한채 예배에 참석한다든가, 또는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될뿐 영적인 예배가 되지 못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의미와 역사적인 유래와 신학적인 근거를 알아야만 영적인 예배로 인도 될 수 있다. 예배의식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형식에 흐를 수가 있고, 그것 차체가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회가 일반적으로 갖는 순서, 또는 가져야 할 순서와 내용의 의미를 찾아 볼려고 한다.
1. 오르간 전주 (Organ Prelude)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 되었을 때,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예배문화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들면, 교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잡담을 하고, 잡담을 하다 보면 언성이 높아져 큰소리로 떠들게 되어 상당히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 였었다. 거기다가 시간을 지킬줄 몰라서 아무때고 시작하는 시간이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이와같은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예배의 분위기로 바꾸기 위하여 목사는 강대상 위에 종을 준비해 놓았다가 종을 치므로써 교인들의 주의를 환기 시켰고, 이때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겠다고 광고를 한 다음 1분 미만 눈을 감고 명상을 함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해진 다음 예배를 시작 하였다. 이제 한국 교회에 종을 치므로 예배시작을 선포하는 교회는 많이 줄어 들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오르가니스트가 오르간 전주를 하는 도중에 임의로 사회목사가 나와 종을 치고 예배를 시작하겠다고 선포를 하므로 부득이 전주를 중간에 그만 둘수 밖에 없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목사님들이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주에 대한 인식이 없고, 또 전주음악이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써 이는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의 교육이 충분치 못하고 잘못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예배전에 예배시작을 알리는 종은 역사에도 없고, 신학적으로도 그 의미를 찾아 볼 근거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 어느곳에도 없다. 한국적인 특수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임의로 치는 종소리에 의하여 음악을 중단하게 되면, 오르가니스트는 모욕감을 느끼게 되고 오르간 연주를 듣고 조용히 명상하든 교인들은 올바른 종지형태(Cadence)도 없이 불시에 음악이 중단되고, 곧이어 조성이 다른 묵도송을 듣게 되므로 인해 이들 또한 불쾌감을 갖게되어 예배 전체가 불쾌감으로 시작하게 된다. 불쾌감속에서 시작되는 예배에 은혜가 있다든지 하나님께 최상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배를 이런식으로 인도하는 사회목사를 보면 그가 딱해 보이고, 그 교회가 딱해 보이고, 그 교회 교인들이 딱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예배 자체가 은혜가 없고 영적인 예배가 되지 못한다. 이런 경우 오르가니스트 또는 지휘자는 목사님과 사전에 상의하여 오르간 전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드리던가 아니면 오르가니스트가 연주할 전주곡의 시간을 재서 알맞는 시간에 음악을 시작하여 음악이 끝나면 예배시작 시간이 될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요즘 시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3부, 4부, 5부의 예배를 드리게 됨에 따라 한 예배가 끝나고 다음 예배가 시작 될 무렵에는 나가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이 밀고 밀쳐서 남대문 시장바닥 처럼 혼잡을 이루고, 미처 자리도 정돈되지 않은채 다음 예배타 시작된다. 주차장이 혼잡하여 주차를 하고 급히 달려와도 예배시간에 지각하기 일수이다. 이럴 경우 우리의 몸은 예배당에 와 앉아 있으나 마음은 아직도 어수선하여 예배를 드릴 경건한 마음, 즉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가 되지 않은 채 예배가 시작 되는 경우가 많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르간 전주는 필요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예배내용의 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15분 이상의 오르간 전주가 예배시작 전에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는 오르간의 전주로 시작 된다. 오르간 전주를 흔히 예배가 시작되기 까지 기다리는 교인들의 지루한 시간을 메꿔주는 흥행음악(entertainment) 내지는 오락음악으로 생각하는 목사와 장로 혹은 교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오르간 전주는 그런것이 아니고 예배의 한 부분으로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교인들은 오르간 연주를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따라서 오르간 전주는 교인들의 잠자는 심령을 깨우고,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 해 주어야 한다. 교인들은 자신의 혼잡했던 마음을 가다듬고 정돈하여 하나님을 맞아 들일수 있는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바꿀수 있어야 한다. 교인들의 혼잡한 마음이 경건한 마음으로 바뀌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교회의 사정에 따라 10분 정도의 전주를 가질 수도 있겠으나 한국적인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15분의 전주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오르간 전주의 이상적인 연주는 처음에 조용히 시작해서 메조폴테로 발전한 다음 차츰 스탑(stop)을 증가하여 소리를 증폭시키고 크레셴도(crescendo) 되어 스웰 올간(Swell organ)에서 그레이트 올간(Great organ)으로 옮겨 풀 보이스(full voice)를 내어 연주하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평안한 마음을 가질수 있도록 디미뉴엔도(diminuendo)되어 30초전 내지 1분전에 음악을 끝내고 입례송이나 사회자의 예배시작 선포가 있기까지 임프로바이스(improvise)하여 시간을 연장하다가 다음순서로 넘어 갈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예배자들은 예배시간 정각에 와서 예배에 참석 할려고 하지 말고 미리와서 준비하는 것으로부터 예배가 시작 되어야 한다. 예배시작 정각에 맞추어 참석 할려고 할 때 요즘과 같이 교통이 혼잡한 때에는 보통으로 5분 내지는 10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 것이 상례이다. 필자가 미국 Chicago의 Moody기념 예배당에 갔을 때와 New York의 Riverside 교회에 갔을 때 그들의 예배시작 시간이 10시 45분으로 되어 있어 늦었다고 놀라서 급히 들어 갔다. 그런데 그 시간이 바로 오르간 전주가 시작 되는 시간인 것을 알았다. 이들 교회에서는 명실 공히 오르간 전주를 예배의 시작으로 공인하고 있었다. 예배는 오르간 전주로 부터 시작 된다는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2. 입례송 (Choral Introit)
교회마다 다르지만 예배가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입례송”을 찬양대가 노래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에서 사회자가 강대상의 종을 침으로 예배가 시작 되는 것을 알리는 일은 찬양대의 “입례송”이나 “예배에의 부름”으로 대치 되어야 한다. 본래 입례송은 초대교회에서 찬양대원들이 성전에 들어오기 전에 성전 밖에서 시편을 한 두절 부르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개신교에 들어 와서는 하나의 음악순서로 발전 하였다. 개편 찬송가에는 566장 부터 570장에 이르기 까지 입례송이 소개되어 있으나 현재의 통일 찬송가에는 546장 하나 밖에 없다.
입례송이란 예배자들에게 예배가 시작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개역 찬송가의 566장의 입례송은 “천하만민 잠잠하여 주를 경배하여라, 헛된일을 생각 말고 주의 축복 바라라, 복을 주시는 구주께 온갖 충성 다 하라”라고 노래한다. 같은 개역 찬송의 568장을 보면 “주 성전안에 계시도다, 온 땅은 잠잠하라, 주 앞에!”라고 되어있고 통일 찬송가의 546장은 “주 성전 안에 계시도다, 온 땅은 우리 주님 앞에서, 잠잠 할 찌어다”라는 가사로 되어있다.
그러나 반드시 찬송가에 소개 되어있는 것만 입례송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입례송이 될수 있는 좋은 모텟(motets)이 많이 있다. 그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입례송의 레파토리는 훨씬 많아 질 수 있다. 예를 들면 E. Titcomb의 여덟개의 모텟은 모두 입례송으로 쓸수 있는 적합한 곡이다. 이 여덟개의 모텟이 다 교회력에 맞추어 작곡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력에 따라 바꾸어 가면서 사용 할 수 있다.
찬송가와 Titcomb의 모텟 이외의 곡으로 필자가 사용하는 입례송은:
곧 일어나 주의 빛 비추라! - F.Mendelssohn 곡
잠자는 자 다 깨라! - F.Mendelssohn 곡
주의 성소, 하나님 세우신 - A.Bruckner 곡
자비로신 우리 주 - P.Casals 곡
이새의 뿌리에서 - R.Wagner 편곡
주 오신다, 모두 머리들라! - H.Hopson 곡
부활 하셨다 그리스도 - M.Vulpius 곡
부활 아침의 팡파르 - Gordon Young 곡
등을 들수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필자가 편집한 악보에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입례송은 “지금 예배가 시작 되니 너희들은 모두 조용히 하라!” 는 선포이다. 입례송이 짧은 것은 예배시작 정각에, 긴것이면 음악의 길이에 따라서 30초 전, 또는 1분 전에 시작하여 예배의 시작이 입례송으로 인하여 지장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입례송의 중요한 역할을 기억해야 하겠다. 주일 아침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려고 의자에 와 앉아 있게 되면 피곤과 지침에서 그 심령은 아직도 잠자고 있는 상태에 있게 된다. 이때에 입례송이 활기차고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 잠자던 교인들의 심령을 깨우게 된다. 입례송은 잠자는 심령을 일깨우는 역할도 한다. 입례송이 잠자는 심령을 더욱 잠자게하는 자장가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3. 개회 찬송 또는 입장 찬송 (Processional Hymn)
어떤 교회는 찬양대와 목사님이 줄을 서서 입장하는 교회도 있고, 입장이 전혀 없이 미리 찬양대는 찬양대석에, 목사님은 목사석에 와 앉아 있다가 그대로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도 있다.
입장하는 순서가 처음 시작된 것은 동굴속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초대교회에서 그 근원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사도중 한 사람이 또는 사도의 후계자중 어떤 사람이 이 동굴과 저 동굴을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도와 그 교회의 대표자가 밖에서 만나, 동굴로 인도되어 왔었다. 동굴에 이르면 어두운 굴 속을 인도하기 위하여 촛대를 가진 사람이 촛대에 불을 켜 굴속을 밝히고, 사도는 촛불 든자의 인도를 따라 동굴속의 교회로 들어 갔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어 사도들이 오는 날에는 그 굴속에 환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환자들로 인해 악취가 나고 또 통풍이 제대로 안되는 좁은 공간에 병균이 만연되어 있으므로 병균을 죽이고 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향불을 피워 연기를 뿜으며 들어 갔다. 그래서 지금도 천주교를 비롯한 의식교회에서는 촛불을 밝히는 두 소년과 향불을 가진 사람이 연기를 뿜으며 앞에서 길을 인도하면 바로 뒤에 그리스도의 상징이요 고난의 상징이요 동시에 승리의 상징인 십자가가 앞서가고, 그 십자가의 인도에 따라 찬양대가 따라가고, 그 다음에 목사(신부), 맨 뒤에 주교(감독)가 들어 온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교회가 입장해 들어 갈때 목사님이 앞장을 서고, 다음에 장로, 지휘자, 찬양대, 헌금위원의 순서로 입장하는데 이는 동양의 유교적인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사상 때문인 듯 하다. 뒤에서 보살피는 목자의 상징과, 지극히 낮은 자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왔다는 성경의 말씀 때문인지, 서양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가장 뒤에 들어오는 것이 상례이다.
Scotland 장로교회의 전통을 보면 촛불이나 십자가 대신 성경을 든 사람이 앞서서 가고 뒤에 찬양대, 마지막에 목사의 순서로 입장을 한다. 천주교의 십자가 - 찬양대 - 신부의 순서나, Scotland 장로교회의 성경 - 찬양대 - 목사의 순서는 둘다 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완벽한 형태를 이룬다. 즉 맨 앞에 “그리스도” 또는 “말씀”이 앞서가고, 맨뒤에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신부(천주교의 신학) 또는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이 있고, 가운데에 찬양대가 있으므로 A - B - A 의 음악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다운 형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국 교회의 형식은 A - b - c - d 의 형식으로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교회에는 입장하는 전통이 없다. 그래도 간혹 간략한 입장을 하는 교회가 더러 있다. 입장 할 때는 찬양대와 목사와 사회자, 기도하는 장로, 헌금위원들은 찬송을 부르며 행진하여 입장해 들어 온다. 이들이 교인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능이 있고, 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그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성전에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회(입장)찬송(processional hymn)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을 찬양하는데 촛점을 두고 찬송을 택하여 예배의 시작부터 경건하고 경외심이 일어 나도록 하느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개회 찬송을 복음찬송으로 대치해서 부를 때 예배의 분위기가 흐려질 뿐만 아니라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마저도 상실하게 되어 의미 없는 예배가 되어질 우려가 있다. 복음찬송은 올바로 사용 될 때 은혜가 되는 것이지 사용해서는 안될 때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규탄의 대상이 된다. 목사들은 물론 예배 찬송을 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어떤것이 복음 찬송이고, 어떤 것이 예배 찬송이며, 어떤 경우에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 할 경우에는 찬송가 택하는 책임을 음악목회자에게 과감하게 돌려 주어야 한다.
이때 부를 수 있는 좋은 찬송가는:
9장 거룩, 거룩, 거룩.
11장 거룩한 주님께 예배를 드리자.
13장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주 하나님.
19장 내영혼아 찬양하라
20장 다 감사 드리세
21장 다 찬양 하여라 전능왕 창조의 주께.
22장 다함께 주를 경배하세.
그외 24, 25, 26, 27, 29, 30, 31, 32, 33, 34, 36, 39, 45, 46, 48, 50, 52, 53, 등이 예배의 첫 찬송으로 좋은 것들 이다. 이들 25개 찬송가 중에서도 특별히 좋은 것으로 9, 11, 13, 19, 21, 25, 26, 31, 32, 33, 34, 39, 45, 46,48, 50, 52, 등을 뽑을 수 있다.
4. 예배에의 부름 (Call to Worship)
개회찬송(입장찬송)을 부르면서 예배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전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이 예배자들을 불러 주시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처음에 언급한 대로 예배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대화라고 했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영광의 찬송을 불러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대화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화의 순서가 이어지는 것이다. 백성들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 갔는데 하나님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침묵을 지키신다면 대화가 불가능해 지고,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인간의 찬송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을 예배에로 불러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하나님은 초청해 주시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초청을 받음으로 인해 예배의 주체가 될수 있다. 초청 받지 않은 예배자는 방관자들이요, 불청객들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불청객들의 예배는 인간들의 독백으로 끝나게 된다. 우리의 예배가 독백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으로 엄숙히 응답해 주시는 것은 이 싯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예배에의 부름은 예배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되어야 한다.
목사에 따라서는 이 “예배에의 부름”을 오르간 전주 직후에 갖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난 다음 입장찬송을 부르면서 입장하거나 입장이 없으면 개회찬송을 불러 예배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예배에의 부름”은 Calvin이 시작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으로 진행 되어 왔다. 따라서 교인들 중에는 “예배에의 부름”을 성귀 명상시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Calvin은 하나님의 엄숙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려는 시도에서 시작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꼭 같은 말을 사용하여 교인들로 부터 실증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 교회력과 절기에 따라 새로운 적절한 말씀을 선포하므로써 언제나 신선하고 새롭게 느낄 수 있어야만 하나님이 어떤 말씀으로 부르시는지 경청을 하게 된다. 말씀을 선포 할 때에도 그 구절을 외워서 명확하고 똑똑한 발음으로 위엄을 가지고 선포 할 때 예배는 장엄해 진다.
“예배에의 부름”을 “예배의 부름”으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순서는 하나님이 백성을 “예배로(예배에로)” 불러주시는 것이지, 즉 하나님이 “예배를” 부르시는 것이지 “예배가” 누구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는 "Call to worship"이지 “Call worship"이나 또는 “Call of worship"이 아니다.
예배에의 부름이 끝나면 화답송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 주심에 감격한 인간들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화답송이다. 전주가 끝나자 곧 예배에의 부름을 갖는 교회에서는 화답송 대신 찬송가를 불러 응답을 할 수도 있다. 이 때의 찬송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감격적인 인간들의 응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입장찬송의 역할을 겸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인 화답송은 감격적인 음악으로 된것이 좋다. 감격적인 화답송은 잠자는 심령을 다시 일으키는 두번째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입례송과 화답송은 사람들의 심령을 고양시키고 고취시킬수 있는 음악으로 연주하는것이 신령한 예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입례송과 찬송가, 그리고 화답송을 통하여 교인들의 심령을 깨워 놓지 않으면 그들의 심령을 깨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입례송과 화답숭을 통한 찬양대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5. 기원 (Invocation)
기원은 보편적인 기도나 성경말씀의 봉독은 아니다. 기원이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오늘의 예배속에 성령이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권능과 현존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짧은 기도이다. 이 기원은 화답송이 없는 경우 첫 찬송 다음에 오게되고, 화답송이 있는 교회에서는 화답송 다음에 따라오게 된다. 기원은 교인들의 형편과 사정을 아뢰는 성격의 기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을 감사하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속에 성령으로 오셔서 예배를 받아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예배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구할 뿐이다. 예배에의 부름은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불러 주시는 것이고, 기원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6. 죄의 고백, 공동기도(General confession, Common prayer)
이상과 같은 순서를 통하여 일단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만남이 이루어 졌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첫번 만나서 무엇보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일주일간 세상에서 사는 동안 지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일이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죄인의 상태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계속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만들어 그동안 여러번 사용한 죄의 고백 기도문을 예로 든다.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와 나의 형제 자매 되시는 여러분에게 내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 죄 지은 것과,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행하지 않으므로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시여, 우리를 불쌍히 보시사, 당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지나간 모든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부터는 당신의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봉사하고, 섬길 수 있는 새 삶을 살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죄의 고백 순서는 18, 19세기의 부흥운동가들에 의하여 폐지 되어 오랫동안 개신교회의 예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순서가 되었다. 이들은 “기도란 마음 속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것이어야만 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면서 “기록된 기도문은 개인과 하나님의 만남을 저해하는 요소로서 오히려 실증을 갖게하는 요인이 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하여 예배순서에 기록되어 나오는 기도문의 활용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예배의식의 복고운동이 일어 남에 따라 죄의 고백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이론적 근거는 위에서 이야긴 한 대로 죄악된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내 입으로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7-18)하였고, 이사야서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라고 고백한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사야와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고백에 하나님의 응답은 천사를 내려 보내 이사야의 입술을 숯불로 짖어 죄를 깨끗게 해 주신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용서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 져야 한다. 이때 의식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는 Kyrie eleison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을 찬양하게 된다. 용서의 확신을 주는 말씀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예: 용서의 확신
사회자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주 예수는 죄인을 구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읍니다. 다같이 기도 하시겠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오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옵소서. 아멘.
이와 같은 죄의 고백이, 많은 교회에서 공동기도문을 예배순서지에 인쇄하여 이를 함께 낭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되도록이면 공동기도문에 참회의 부분과 감사의 부분이 반드시 명시되어 참회의 기도를 대신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때로는 참회의 기도 대신에 신앙고백으로 대치하는 경우도 많이 볼수 있다. 이것도 종교개혁 이후에 생긴 새로운 순서인데 본래 신앙고백은 종교개혁 이전만 하더라도 설교 다음에 오는 순서였었다. 신앙고백에 관해서는 설교 다음에 설명하기로 한다.
7. 대영광송 (Gloria)
죄의 고백 순서가 끝나면 의식교회에서는 대영광송을 곧 이어 부른다. 이는 하나님으로 부터 죄를 용서받고 난 다음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의 찬양을 돌리는 백성들의 응답 순서이다. 이 찬송은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 받은 축복을 백성들이 성부, 성자, 성령께 감사와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 대개 거대하고, 화려하고, 장엄하고, 웅장해서 일반적으로 찬양대가 회중을 대신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대영광송을 찬양대가 부르든지 아니면 회중이 같이 부르든지간에 이 노래를 부를 때엔 모두 다 일어나서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심지어는 강대상 위의 목사들도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은 교회 정면 벽에 있는 십자가를 향하여 돌아서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백성들이 드리는 가장 엄숙하고 가장 장엄한 찬양이어서 부르는 자세부터 엄숙하고 진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대영광송 대신에 찬송으로 대치해서 부르고 있다. 의식교회에서 사용하는 대영광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가장 좋은 찬양이기 때문에 개신교회에서도 많이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8. 교독문(Responsorial Reading)
교독문이란 본래의 시편 교독을 말 한다. 시편은 사실 교독하는것이 아니라 교창하는 것이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때 모든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종전에 사용하던 시편의 선율이 새 번역에 맞지 않게 되어 이때부터 시편을 노래하지 못하고 교독하게 되었다. 시편을 교독해 온지 수백년이 흐르게 됨에 따라 개신교회에서는 시편창법을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시편은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찬송이었던것을 이와 같이 노래 부르는 법을 잊어버린 후에 교독을 하게 됨으로 인해 노래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성경말씀을 명상하는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시편 이외에도 교화적이고 교육적인 성경 말씀을 여기저기 골라서 교독문으로 만들어 놓았다.
본래 시편은 유대교회에서 사용하던 찬송으로 여호와 한 분만을 찬양하는 것이었으나 초대교회에서 찬송으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 이를 기독교화 할 필요가 생겼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표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듯이 시편을 교창 또는 교독한 후에 송영(Gloria Patri: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께 드리는 영광송)을 첨가하여 부름으로써 시편을 성 삼위 일체께 드리는 기독교의 찬송으로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 시편을 교독하고도 송영을 부르지 않는 교회가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잘못은 시편의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하므로써 잘못 발전한 개신교 예배의 탈선임으로 마땅히 시정 되어야 한다. 유대교의 찬양을 그대로 우리 기독교회에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편을 예배에서 뺄 수도 없다. 시편은 예배를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찬송중에서 가장 좋은 찬송이기 때문에 예배를 위하여는 반드시 시편을 노래하여야 한다. 시편을 노래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는 먼저 시편을 규칙적인 운율시로 바꾸는 작업도 해야 겠고, 한국 찬송가에 시편을 악보와 함께 싣는 작업도 해야한다. 그리고 교회음악과와 신학교에서는 시편을 노래로 부르는 방법을 정규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편이 노래로 불려지는 전통을 회복 하여야 한다. 시편이 얼마나 좋은 찬송인가 하는것은 Calvin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자기 교회에서 시편을 제외한 일체의 다른 노래를 예배에서 허용하지 않은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본래 시편교창의 위치는 구약성서 봉독 다음에 따라오는 순서였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성경을 한군데서 밖에 읽지 않음으로 자연히 시편의 위치가 성경봉독 이전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9. 목회기도 (Pastoral Prayer), 중보의 기도 (Prayer of Intercession)
목회기도라고도 하고 중보의 기도라고도 한다. 이 기도는 목회자가 회중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고 살피는 책임을 위탁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에서 오는 어려가지 범죄를 위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전쟁과 질병과 가난과 억눌림의 삶으로 부터의 해방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실망한자와 낙심한자, 마음에 상처를 입은자들을 위해서는 위로의 기도를 드려 하나님께 아뢰이는 사제적인 기도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보의 기도이다. 목회자가 회중을 목회하는 동안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목회기도라고도 한다. 이 기도는 Luther와 Calvin등 종교개혁자들로 부터 시작 되었다.
중보의 기도가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의 기도시간으로 변질 되었다. 한국에서 장로가 목회기도를 하는 전통은 한국 기독교 선교와 함께 시작된 전통이다. 한국의 초대 선교사가 이땅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예배를 인도할 때, 설교는 원고를 보고 할수 있었지만 눈을 감고 하는 기도는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여 지극히 어려웠기 때문에 조사나 장로에게 기도를 부탁했던 것이다. 장로들이 기도할 때 교회내의 여러가지 사정도 선교사 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장로야 말로 그 교회를 위한 목회기도를 할수 있었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장로의 기도가 우리 예배순서에 고정적인 순서로 들어오게 되었다.
10. 하나님의 말씀 (Scriptural Lesson)
초대교회의 예배 순서에서는 대영광송이 불려진 다음 즉시 구약성경 봉독으로 이어 진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죄의 고백도 없고 대영광송도 없다. 죄의 고백 대신에 공동기도문이나, 또는 목회기도가 죄의 고백을 대신하고, 기도순서 다음에 찬송가를 불러 대영광송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경을 봉독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찬송가를 하나 더 부르게 된다.
초대 교회의 예배순서를 보면 하나님과 백성의 대화와 응답은 질서있게 진행되었다. 그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보면 대영광송 - 구약낭독 - 시편교창 - 서한낭독 - 할렐루야 - 복음서낭독 - 찬양 - 설교 - 신앙고백으로 이어져, 백성들의 순서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말씀으로 따라 나옴으로 완전한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서봉독은 초대교회 때 부터 사도서한과 복음서를 분리하여 두번 낭독 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유대교회에서 율법서와 예언서를 구별하여 읽던 습관에서 왔다. 그러나 의식교회에서는 구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사도서한을 읽고 복음서를 낭독하기 전에 알렐루야를 노래하고 복음서를 낭독한다. 말씀 사이사이에 찬양이 들어가는 것을 볼수 있다.
예배의 핵심인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성경말씀 봉독이요, 다른 하나는 설교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구약과 서한과 복음서를 모두 예배에서 읽게하여 3년이 되면 성겅 전체를 다 읽을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다. 개신교회에서는 설교 (말씀 선포)를 대단히 중요시 한다. 그래서 설교단을 강대상 중간에 위치하게 하고, 혹은 제단 옆에 설교단을 만들어 놓은 교회도 설교단은 가장 높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예배에서 성경봉독은 설교 본문에 해당되는 불과 두세절을 읽고 끝나는 것이 개신교회의 실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핵심으로 여기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 봉독은 안하고 설교를 장시간 하게 되니까, 개신교회 예배의 중심은 자연히 설교중심 예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경을 개인이 소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3년만 빠지지 않고 교회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성경 전체를 다 읽게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따라서 성경봉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평신도들의 손에 성경이 쥐어지기 전까지는 대단히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성경은 각국 방언으로 번역되었고, 이제 교인이면 누구나 성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어디서나 읽을 수 있게 되어 구태여 예배에서 성경을 많이 읽을 필요성이 없어졌다. 성경을 읽는 것은 집에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읽는 성경은 설교 본문만 읽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는 크게 잘못 된 것으로 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배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서 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전해 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세군데에서 봉독 할 때,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평신도를 훈련시켜 읽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봉독해 드리겠읍니다”라고 말하고 읽고, 다 끝낸 다음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한다. 같은 성경 말씀 중에서도 복음서는 성경중의 성경이다. 의식교회에서는 복음서를 낭독하기 전에 “알렐루야”를 세번 부른다. 그리고 복음서는 평신도가 아닌 사제가 봉독하고 이때 교인들은 모두 일어나서 경청한다. 즉 복음서 낭독이 하나님 말씀의 중심이요, 예배의 정점(climax)이다. 신교에서는 본문에 해당되는 짧은 성경구절을 읽고 설교가 말씀의 중심이 되는데 비하여 구교에서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봉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성경에서 취하기 때문인지 구교의 강론은 개신교의 설교처럼 그리 중요시 되어지는것 같지 않다.
11. 찬양 (Anthem)
찬양대의 찬양은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의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큰 찬양을 드리는 시간이다. 이때의 찬양은 찬양대가 교인 전체를 대표하여 일주일 동안 정성스럽게 준비한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대원은 이 찬양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준비를 해야 하고, 교인들은 이 찬양을 드리는 순간 자신의 마음도 함께 묶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찬양은 우리가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제물을 살라 받치던 제사는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졌으므로 더이상 다른 제물을 드릴 필요는 없어졌다고 했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에게 찬미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설교 전에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에서 교인들을 위하여 음악목회자들이 행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이다. 찬양이 끝난 다음 교인들이 “아멘”을 하는 이유는 찬양대가 교인들을 위하여 대신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사제가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 듯이 찬양대가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찬양대는 이시간이 분명히 사역을 담당하는 시간임에 틀림이 없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목회를 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는 음악목회자들이란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 찬양대원들 사이에 이와같은 사명의식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찬양대원만의 잘못은 아니다.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과, 일반 교인들의 잘못도 크다고 본다. 교회에서 찬양대에 대한 인식이 낮기 때문에 찬양대원들의 봉사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어 결석과 지각이 많고 성실성이 부족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볼수 있다. 주위의 환경과 인식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인 음악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음악목회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음악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찬양을 할 때의 문제가 어떤곡을 선택하여 부르느냐하는 점이다. 한달치의 설교제목이 미리 나온다면 찬양대에서도 이 스케쥴에 의하여 찬양곡을 한달 전에 연습을 시작하여 준비 할 수도 있으나 주말에 가서야 준비되는 설교 제목에 찬양을 맟출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찬양곡을 선택하는 몇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음악이면 어느것이나 좋다. 구태어 설교 제목에 맞출 필요가 없다. 설교제목은 사람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찬양이 사람을 향한 노래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불러도 좋다.
② 교회력에 맞추어 찬양곡(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양하는 곡)을 택해서 노래부르면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설교의 제목이 어떠하든지 교회력의 주제에 맞추어 노래 부르면 틀림이 없다.
③ 설교제목에 꼭 맞추고 싶을 경우에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설교의 스케쥴을 한달 전에 달라고 부탁을 드린다. 그리고 설교제목에 맞는 찬양곡을 찾아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가지 찬양대가 주의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찬양대는 찬양을 부를 때 심중에서 울어 나오는 영적인 톤으로 신앙고백적인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려고 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독창자들은 예배에서 노래를 부름으로 수퍼스타가 될려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일 수록, 목소리를 내세우고,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고 뽑내며, 교인들로 부터 박수를 받기를 원한다. 영적인 찬양을 부르기를 원한다면 영적인 생활을 해야하고,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한다. 노래란 본래 사람의 심중(영혼)속에서 울려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이 깊은 사람은 깊은 신앙의 노래가 나오고, 신앙이 얕고 세속적인 사람에게서는 세속적인 노래가 나오기 마련이다. 찬양대나 독창자가 부르는 노래소리를 들으면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으며 그들의 기도생활이 어떠한지 즉시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아무나 예배에서 독창을 시키지 않는다. 설교전에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지만 그 찬양이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 찬양을 듣는 동안 교인들의 마음이 설교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열려진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오히려 마음을 닫아 버릴 수도 있으며, 마음을 뜨겁게도 하고 차겁게 만들기도하고,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여 열배 백배의 결실을 낼수 있는 옥토가 되게도하고 복음의 씨앗이 말라 죽게하는 자갈밭이 되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찬양대원들은 절대로 신실한 기도생활과 깊은 신앙생활을 해야만 올바른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
노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에 그 노래를 사용하는 사람의 영적 능력이 노래를 통하여 그대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영적안 찬양을 드리는 우리가 영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음악목회자인지 지휘자인지의 차이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교회가 진정 영적인 예배를 원하고 말씀을 통하여 목회(말씀의 사역 또는 말씀목회)가 이루어 지듯 음악을 통하여 그 교회에서 목회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교회와 목사님들은 지휘자가 아니라 음악목회자를 모실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음악목회자가 아니라 지휘자를 모셨을 때 교회와 담임목사의 목회에 미치는 손해는 대단히 큰것을 깨달아야 한다.
12. 성령의 사역을 바라는 기도 (The Prayer of Illumination)
보통으로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짧은 기도를 올리게 된다. 그것은 설교하는 설교자 자신이 아니라 이 시간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도록 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설교를 통하여 역사해 달라는 간구인 동시에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교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 순종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설교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부탁드리는 기도인데 이는 말씀을 중요시하는 개신교, 그 중에서도 특히 Calvin파 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기도이다. 의식교회와 개신교에서 요즘 출판되는 의식서에는 모두 이 기도문이 예배순서에 들어가 있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설교의 현장이란 인간의 활동이 나타나는 곳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주관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간혹 보면 설교자가 단위에 서자마자 설교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강의 실에서 강의를 시작하듯. 이러한 것은 절대로 시정 되어야 한다고 본다. 성령의 사역을 바라는 기도는 예배 순서에 있기도 하지만 없는 경우가 많다. 설교자가 설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생각해서 순서에 있든 없든 반드시 성령의 사역을 바라는 기도를 드린 후에 설교를 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13. 설교 (Preaching)
성경은 약 2000년전에 쓰여진 것이다. 2000년 이전의 사회상황에서 쓰여진 성경의 말씀이 오늘의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적용 되는지 를 재 해석해 주는 것이 설교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상식이나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상식으로, 지식으로, 학식으로, 이해 할려고 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때 그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이 되어지고 만다. 그런데 요즘 많은 설교자들은 자기의 지식과 생각과 사상, 즉 사람들의 재미있는 “세상사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고, 많은 교인들은 설교를 통하여 또 재미있는 “세상사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한다. 설교에 새로운 지식과 사상, 새로운 생각, 그리고 세상사는 이야기가 없으면 설교에 인기가 없고, 설교자는 인기를 잡기 위하여 세상이야기를 즐겨 사용하게 된다. 설교에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사상과,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혀 없으란 법은 없지만 설교의 본래 의미와 본래의 위치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지켜야 한다.
순전히 복을 받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것은 잘못 된 것이지만 기복적인 신앙이라고 매도하는 것도 잘못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기 때문이다. 순전히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도 비판 받아야 하지만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시는것은 자신의 중요한 목회중 하나였었다. 방언으로 기도 하는 것을 신앙과 기도생활의 열매라고 생각 한다면 방언기도는 존경 되어야지 없신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 이러한 것을 매도하고 비판하고 없신여기고 무시한다면 잘못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메아리여야 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통하여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그 예수는 우리의 지식과 학식과 상식으로 이해 될 수 없는 많은 것을 말씀하시고 보여부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문등병자를 깨끗게 하시고, 앉음방이를 일으켰으며, 절름발이가 춤을 추게 하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셨다. 그는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저리로 옮길수 있다고도 하셨고, 원수를 네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 모든것이 우리의 상식과 지식과 학식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우리의 것으로 불가능한 것을 우리의 것으로 정의 내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모순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메아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갈보리산 위에서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다.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이 메아리가 되어 2000년동안 세상 이곳 저곳에 울려 왔다. 이제는 그 메아리가 우뢰소리 처럼 커져서 세상을 온통 흔들고 있다. 설교는 우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복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만 외쳐야 한다. 사람의 이야기,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복음의 이야기를 외쳐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그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 세상사는 이야기가 많아지면 많아 질 수록 하나님의 현존은 흐려지고 인간만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하는 순수한 사명을 가지고 설교단에 서야할 것이다. 그러한 순수한 마음을 가질수 있도록 설교전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여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로서만의 기능을 발휘하여야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교인들에게 하지못했고,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을 토로하는 목적으로 사용 한다면 성령의 역사는 떠나게 되고, 그 교회와 그 예배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교회와 예배가 되지 못하고 인간 목사의 목적과 수단만이 역사하는 교회와 예배가 되어 예배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요즘 교회에 분란이 있는 것은 모두 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지식만 나타나는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 한다.
14. 설교자의 설교후 기도
설교자들은 설교가 끝난 후 대개 기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때의 기도는 설교의 결론을 내는 기도가 아니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술을 도구로 써 주신것을 감사하고, 설교자의 입술을 통하여 뿌려진 말씀을 성령께서 가꾸시고 키워 좋은 결실을 맺게 해 달라고 드리는 기도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 이상의 다른 내용의 기도가 들어가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전한 말씀을 희석시킬 우려가 있다.
15. 신앙고백
앞서 말 한 바와 같이 초대교회는 예배가 완전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전반부는 “초신자를 위한 모임”이요 후반부는 “입교인들만의 모임”이었다. 복음서를 낭독한 다음 신앙고백을 하고 나면 초신자들(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일단 그 모임을 떠났고, 세례 입교인들만이 그곳에 남든가 또는 다른곳에 모여 성만찬 의식을 가졌다. 신앙고백이 기독교의 예배의식에 삽입되게 된 것은 의식의 여러 순서중에서도 가장 늦게 들어오게 되었다.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의미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과 함께 참회의 기도가 없어짐에 따라 개신교 예배에서 이를 예배의 첫머리에 놓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의식교회에서는 설교 다음에 신앙고백을 갖는다.
신앙고백에는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늘 외우는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고, 둘째는 니케아신경(The Nicene Creed)인데 이는 의식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셋째는 아타나시우스신경(The Athanasian Creed)으로써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첫째와 두번째의 것이다. 사도신경은 본래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 세례인들에게 묻는 질문이었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네가 믿느냐?”로 부터 시작해서 “성령으로 잉태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하는 질문을 했는데 이 질문 자체가 사도신경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열한 제자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흩어지기 전에 함께 모여 자기들이 가르치고 설교할 내용을 통일하기 위하여 합의 본 것을 정리한 것이 사도신경이 되었다는 말이 15세기 까지 전해져 내려 왔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이 확실히 성문화 된 것은 주후 404년 경이다. 초대교회에서 신앙고백은 작은 기도회에서 암송 되었는데 인도자가 첫 머리만 큰소리로 시작하면 모두 함께 따라서 외웠고, 외울 때 옆사람이 들리지 않게 암송 했다고 한다. 개신교회에서는 예외없이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다.
사도신경보다 먼저 생긴것이 니케아신경이다. 천주교회를 비롯한 모든 의식교회(성공회, 루터교회)에서는 니케아신경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나의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승천하신 후 사도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전파되고 그후 약 300여년간 지하의 조직으로 전파되어 오다가 기독교가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된 다음부터는 교세가 급성장하게 되었다. 교회가 갑자기 확장되면서 기독교의 신앙은 각양 각색으로 발전하여 교회마다 믿음이 제각기였기 때문에 이 교회와 저 교회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같은 교회로 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방국교의 교리까지 뒤섞여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양상에 이르게 되어 신앙의 규범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통일을 위한 교회역사상 제일 첫 모임을 니케아에서 가졌다. 이 모임이 니케아 공의회(Nicene Council:325년)이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이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는 교회만이 올바른 기독교 교회로 인정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회의 통일과 신앙의 통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삼위일체의 이 신앙고백은 주기도문 처럼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마지막에(28:19)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열한 제자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공동) 고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삼위일체를 믿는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니케아 신경은 그 후 381년 Constantinople에서 있었던 제2 교회통일 모임에서 오늘날 사용하는 신앙고백으로 개정, 확정 되었다. 따라서 니케아신경이 사도신경보다 먼저 확정 된것 임을 알수 있다. 니케아 신경도 사도신경과 마찬가지로 세례식의 질문 내용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고, 이 신앙고백이 모든 교회에서 받아들여져 예배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 되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교회에서 공인된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16. 감사와 응답의 찬송 (Hymn of Response)
설교 다음에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찬송을 불러서 설교 말씀에 대한 응답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신앙고백이 앞에 위치하므로 대신 설교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찬송을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이때의 찬송은 감사의 응답을 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우리의 감사와 결단을 노래하는 찬송이 된다. 그리고 감사의 응답은 또 봉헌으로 계속 된다.
17. 헌금 (Offering)
설교에 대한 응답의 행위가 찬송으로 이어 지거나 또는 헌금으로 이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가지가 함께 올 수도 있다. 즉 찬송의 마지막 절을 부를 때 헌금위원들이 나왔다가 찬송이 끝나면서 곧 헌금이 시작 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속에서 부터 울어나는 감사한 응답의 마음으로 드리는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즉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응답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실 때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한것 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기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다음 세상에 나가서 자기자신을 내어놓고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써 사회에서 온전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 때 비로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예배를 드렸느냐 못 드렸느냐 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해서 찬송가를 잘 부르고, 찬양을 잘하고, 설교를 잘 듵고, 헌금을 많이 했느냐에 있는것이 아니라, 예배가 끝난 다음 교회의 문 밖을 나가면서 예배가 시작되고, 문 밖을 나와 일주일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올바른 예배의 여부가 결정 되는 것이다. 헌금시간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개인의 결단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서를 돈을 걷는다는 의미가 강한 “헌금” 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마땅히 “봉헌”이란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쳐 인간을 구원하신것 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결단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상고 해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그의 생의 전부요 늙어서 얻은 가장 귀한 자식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진 것의 전부와 가장 귀한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되돌려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거역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져도 서슴치 않고 나에게 바쳤다” 고 하시면서 대신 바칠 수양을 마련해 주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부 바칠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전체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대신 드릴 수 있는 물질을 허락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 순서를 “헌금”이라고 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는데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축복의 가장 귀한 일부인 10의 1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시간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리 귀한 것을 바친다 해도 그것은 결국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것 외에 하나님에게 달리 바칠것이 없다. 그래서 Augustine은 “이 세상의 아무도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것 이외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찬양을 드릴수 없다”고 말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풍성한 축복의 일부를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헌금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따라서 헌금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순서이다. 시편 96:8 에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야훼께 드려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빈순으로 갈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든 땅에서 난것의 십분의 일은 야훼의 것이니 야훼께 바칠 거룩한 것이다”(레27:30) 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우리가 받은 축복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치는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확장시키는데 쓰여진다. 즉 가난한 자를 돕고, 불쌍한 자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데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업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에, 하나님의 일꾼을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어느곳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사용되도록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이 되어야 한다. “물질이 없어서 일 못했다는 핑계”가 없도록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있을 만치 바쳐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이 바친 헌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값있게 사용 될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헌금시간에 많은 교회에서 독창을 한다. 이때 대부분의 독창자들이 자기 자신을 드러낼려는 의도가 크게 나타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소리 자랑을 하여 수퍼스타가 될려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이와 같은 태도로 인해서 경건과 헌신의 예배분위기가 세속적인 흥행연주의 분위기로 타락되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이럴 경우 예배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독창을 없애는 편이 오히려 낫다. 이런 폐단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필자는 새문안 교회에서 7년간 봉사하면서 헌금시간에 독창하는 순서를 찬양대의 순서로 바꾸어 놓았다. 이 때 방금 전의 설교 내용에 적합한 찬송을 택하여 찬양대 전체가 부르게 하여 개인이 수퍼스타가 되는 경우를 예방 하였고, 설교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교인은 찬양대가 설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아름다운 찬양을 부르므로 인하여 설교를 통하여 받은 은혜가 도욱 고조되어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인들 중에는 설교후 헌금시간의 찬양을 듣기 위하여 3부 예배에 오는 사람이 많다고도 하였다. 따라서 찬양대는 헌금시간의 찬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의 기능에는 두가지가 있다. 모든 교인을 대표하여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한 것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로 드리는 기능이 있고, 둘째는 천사들의 찬양을 들려 주고, 영적인 노래를 들려 줌으로써 교인들의 심령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은혜를 주는 기능이다. 목사님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참회와 중보의 기도,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동시에 하나님을 대신해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기능이 있는것과 꼭 같이 찬양대도 교인들이 준비못하는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런 찬양을 정성껏 준비하여 교인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일과 동시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백성들에게 노래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로 표현하여 은혜를 주는, 목사님과 꼭같은 두가지 기능을 발휘한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응답으로 헌금을 드리는 교인들에게 설교의 내용과 일치하는 찬송으로 은혜를 끼치는 것은 하나님의 헌금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고, 또 찬양의 내용에 따라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찬양으로 헌금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찬양대는 예배를 통해서 이 두기능을 항상 적절히 해야만 한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노래만을 부르게 되면 교인들의 마음이 찬양대로 부터 멀리 떨러져 찬양대가 찬양 드릴 때 같은 마음과 같은 정성을 갖지 못하고, 찬양대가 교인들만을 의식 할 땐 예배가 되지 못한다. 찬양대 지휘자는 어느 순서가 하나님께 가는 것이고, 어느 순서가 교인들에게 가는 것인지 분명히 하여야한다.
헌금이 제단위로 바쳐질 때 우리는 보통 “만복근원 주, 하나님...”을 부르게 된다. 이 찬송은 Doxology라고 해서 우리말로 송영이라고 한다. 영광을 노래 부른다는 뜻이다. 우리가 부르는 이 송영을 음악적으로는 Lesser Doxology라고 하고 앞에서 언급한 대영광송을 Great Doxology 라고 한다. 헌금을 제단 앞에 바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정성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함께 드린다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18. 성만찬 (Holy Communion)
의식교회의 미사에서는 성찬식이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 성찬식이라는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찢기신 몸과, 스스로 흘리신 피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시고, 셋째, 성례전을 통하여 나 개인과 하나님과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성만찬에 참여한 다른 많은 형제와 자매가 또한 서로 하나가 되고, 같은 성만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더라도 이 교회의 형제와 저 교회의 형제가 영적으로 하나가 되며, 과거에 믿고 이 세상을 떠난 성도들과 지금 이 시간에 성찬을 갖는 살아있는 성도들이 모두 하나가 되며,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듯 이들 모두가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 어 하나의 그리스도 공동체를 이루는 신비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성례전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6:56) 라고 한것 처럼, 예배안에서 이 성례전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만남”을 가져 하나가 되는 절정적인 순간인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을 그리 중요시 않는 경향이 있다. 구교에서는 매주일 미사를 드릴때 마다 성만찬의 순서를 갖는데 비하여 개신교는 1년에 한두번의 성찬식을 가질 뿐이고, 성만찬의 신학적인 의미도 매우 다르다. 한국교회에서 성만찬을 자주 갖지 않는 이유는 주께서 마지막 만찬을 집례하시면서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라는 말의 언어적인 의미 이상으로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3.1절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년에 한번 기념행사를 가지듯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여 1년에 한두번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스위스 종교 개혁가 Zwingli(1484-1531)의 생각이었고,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개신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성찬식이 끝나면 천주교의 신부들은 “모임이 끝났읍니다. 이제 평안히 가십시요”하고 회중을 돌려 보낸다. 이때 회중들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어 그리스도를 내 안에 품고 돌아온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합일하는(Communion) 예배내용이 빠져있기 때문에 예배를 통하여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뵙고 우리는 성전을 빠져 나오는 느낌이 든다. 개신교가 성찬식을 소홀히 하는것은 개신교의 큰 약점이다. 같은 종교 개혁가 Calvin도 성만찬은 매주일 가져야 한다고 주장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직한 제네바 교회의 당회에서 부결되어 장로교회에서도 성만찬을 매주일 갖지 않고 있다.
성만찬에서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눌 때 찬양대가 떡을 나누는 가사로 된 성찬노래와 포도주를 나누는 가사로 된 성찬노래를 험잉(humming)과 가사로 부르는 것은 성찬식의 엄숙함을 더해 준다. 목사님이 집례에 필요한 말씀을 할 때에는 험잉으로 노래하고 그렇지 않을 때엔 가사로 노래해서 성찬의 의미를 노래를 통하여 더해 주는 것은 성찬식을 더욱 은혜스럽게 만들어 준다. 교회 크기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떡을 나누는데는 3분 정도 소요되고 잔을 돌리는 데에는 4분 내지 5분정도 걸린다. 성만찬을 끝내고 성찬대를 정리하는 동안에는 찬양대가 떡과 잔을 나눌 때 보다 더 크게 승리적인 기쁨의 찬송을 하는것이 좋다.
19. 퇴장 찬송 (Recessional Hymn)
입장찬송 (개회찬송)이 있으면 퇴장찬송 (폐회찬송)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입장찬송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예배 또는 경배의 찬송이면 퇴장찬송은 신앙의 결단, 충성, 선교, 등의 의지를 가진 찬송이어야 한다. 이 때 부르는 찬송은 새로운 각오로 세상을 향해 행군해 나가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는 씩씩한 찬송이 알맞다고 생각 한다.
20. 축도 (Benediction)
개신교 모임의 특색은 모임이 끝날 때 마다 목사님의 축도(축복의 기도)을 받는 것이다. 축도의 근원은 구약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려 주신다고 하셨다.(창 12:3) 이것이 복의 근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할수 있다”고 말씀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축복해야 할지를 말씀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민 6:22-27)라고 약속까지 하시었다. 성만찬이 없는 개신교의 예배에서 축도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21. 축도송
축도송은 축도에대한 응답송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백성들이 응답을 안할 수 없다. 이 때 찬양대로 하여금 큰 아멘(Great Amen)으로 응답하게 하는 것이 좋다. 이로서 예배순서는 끝나고 오르간 후주를 들으며 남아서 기도를 하든지 예배당을 떠난다.
22. 결론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형식이 있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거기에 질서있게 잘 짜여진 예배의 형식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잘 짜여진 예배의식에는 신학적인 근거와 의미가 충분히 부각 되어야 한다. 뿐만아니라 아름다운 예배는 미적 형식과 안정된 구성미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안정된 미적 구성은 대칭적인 조화이다. 전주로 시작해서 후주로 끝나고, 입례송은 축도송으로 대칭 되고, 입장찬송과 예배에의 부름은 퇴장찬송과 축도로 대칭되고, 죄의 고백은 신앙고백과, 성경봉독은 설교와 대칭을 이루며, 그 사이에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는 찬양이 있어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드리는 예배의 중심은 찬양이어야 한다. 예배가 설교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예배를 통하여 드릴려는 생각 보다 받을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부각 되어 온것이 사실이다. 드리는 예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충현교회에서는 헌금과 찬양을 성경봉독과 설교 사이에 넣고 있는것은 특기할만 하다.
아름다운 예배는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시시각각으로 표현되는 순서이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만남이 표현되는 예배가 강조 될 때, 하나님 중심 예배,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가 될 수 있다. 예배가 인간중심 예배가 된다든가, 설교중심 예배가 되어 자칫 목사중심예배가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이와같이 본질적인 요소가 “만남”이 되는 예배에서는 수시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체험 할 수 있고,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본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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