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예배와 생활
( 롬 12:1-2 )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안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생활 가운데서 계속하여 행동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의 예배와 세계 속의 생활과 일치될 때에 "거룩한 산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와 생활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교회는 무력해질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교회를 이 위험 속에서 구출해 내기 위하여 주목할 만한 예배의 혁신 운동, 갱신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계 속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고로 교회예배는 항상 이 세계의 생활로 향해 나아가는 자세로 드려야 하고 이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들은 예배에 의해 지탱이 되어 가야 합니다. 예배는 인간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복종시키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일체를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해 새로 거듭남을 입게 되면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죄에서 해방 받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세계 속에서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의 예배 즉 교회로서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예배 자로서는 크나큰 또 하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나 혼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여 그 전체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간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을 개인으로하여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받으신다는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공동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땅히 교회의 예배라 할 때는 그 구성원들이 그러한 각성과 정신적 자세를 품고 예배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이 하나의 개체로서만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단체로서, 하나의 나라로서 나아간 것이요, 또한 한 개인으로서만 의미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나라로서 의미있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도 역시 각기 개인의 중요성만큼이나 한 개의 개체로서의 교회적 존재와 행적을 중요시하시며, 심지어 각기 개인도 주님의 몸(교회)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과 그 속의 한 지체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로 의의가 있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위의 사실도 역시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참여하고 있는 유형의 교회 속에서 그대로 그의 행보로서, 그의 예배에서나 성도간의 교통 가운데서 나타나게 될 것이요, 나아가 그의 일반생활까지도 그러한 의식과 정서 안에서 그의 생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 한 이후에 뚜렷이 가져야 할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새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주님의 거룩하신 그 몸의 한 지체로 있다는 것, 나는 언제나 그 몸의 한 부분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의식입니다. 내가 공동의 예배에서 찬송을 한 마디 불러도 그것은 나 혼자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부르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그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받으시고 그것으로 의미있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그러한 의식을 항상 가져야 하는 것이며 그날 교회 공동체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기 위하여는 각자는 그만한 각성된 자세를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느끼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가 늦게 예배에 참석한다거나, 흐트러진 정신과 자세를 가진다거나, 생각 없이 찬송을 한다거나, 준비되지 못한 헌금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공동의 예배에 크나큰 손실과 흠을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공적예배의 귀중함을 인식하면서 나아가 개인의 생활과 예배와의 관계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자기 전체의 삶으로 파악되지 못한 예배생활이라는 것은 일상생활과 예배사이에서 오는 많은 이중성 때문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생각할 때 어떤 일정한 순서에 의하여 정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드리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예배생활이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 앞에 도리를 다하였다고 스스로 고무를 느낀다면 그것은 올바른 예배생활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전 생활과 생애가 예배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이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고 한 말은 옳은 것입니다. 거룩한 제단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생생활에서도 나의 가슴과 사고와 욕구와 하나님을 위한 의지를 바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알려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시 145:10-13)라고 시를 읊었던 것처럼 자신의 정서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손길을 보고 느끼는 감정으로 넘치며, 그것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서(시 1:2-3)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추하고, 반복하여 생각하기 까닭에 그의 생활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생을 헛된 가운데 소비하지 않고 가장 효과 있고, 결실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전체가 예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고대 예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들은 단순히 기도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을 볼 수 있는데 헨드릭 하트씨는 족장들의 예배에서 다음 중요한 세 가지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처음부터 언약적 생활 속에 속하였다는 것과,
둘째 그들은 예배행위보다는 언약생활에 더욱 치중하였다는 것과,
세째 창세기에 기록된 모든 예배 행위는 그들의 생활의 일상적인 리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평범한 내용인 것으로 보 인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그들의 예배가 그들이 언약백성으로서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약속하여 주신 하나님의 현존감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아갔으며 그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때때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언약백성의 생활의 연장이요,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이들의 예배가 공동적 요소가 결여되었다 할지라도 이렇게 언약 민으로서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은혜의 언약 안에 참여하여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언약의 백성은 그의 모든 생활의 분야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국가 시대로 들어와 우리는 그들에게서 생활과 예배의 심각한 이중성을 보게 됩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지적을 보십시요.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여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 6:21-24).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운영되어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신 나라가 그 사회에 반드시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도덕적 성격들이 사라지고, 오히려 불공평과 불의가 그 사회의 각계 각층 각 곳에 깊숙히 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열심히 예배행위는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도 받으시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 자체의 존재의 의의를 묻지 않으실 수 없었으며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를 경영하시는 그 경영체로서는 더 이상 지상에 두시지를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12:1-2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의 영혼과 함께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의 몸은 영혼의 작용과 더불어 구체적인 삶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영혼의 활동이 육체의 활동과 아울러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내어 놓는 것이므로 몸은 그의 삶을 말합니다. 여기에 몸을 '드리라'고 하였는데 본래 이 말은 제단에 짐승을 바치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우리 몸을 희생제물로 제단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은 얼마나 끔직스러운 말입니까? 우리의 몸을 짐승을 잡아 죽여서 제단에 태워 바치는 것 같이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짐승을 죽여서 드립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가운데 이미 십자가에서 죽음에 던지웠습니다 (롬 6:2, 7:4). 그러나 그것은 죄의 몸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산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의 살아 움직이는 육신의 활동도 전혀 다른 활동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의 육신의 활동은 그의 영적 생명의 발휘로 나타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은 거룩해야 한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 삶을 받으시는 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사용하고 있지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봉헌되거나 헌신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떤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평범하고 속된 것으로부터 신성하게 구별되어 바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것의 윤리성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하여 구별되어진 성격을 띠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구별되어 봉헌된 것은 아무렇게나 속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전, 성소, 제사장, 레위인들, 성물, 성민 등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이유로 거룩이라는 영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용어의 또 하나의 용법은 윤리성에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레 19:1, 20:7 등)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본질적 품성으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그분의 영광이나 존귀함 같이 존재 형태와도 밀접한 관련이 되고 하나님이 또 다른 품성들, 즉 의로우심이나 사랑 같은 성품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계시며, 그분의 활동이 거룩한 성품을 가지기 때문에 마땅히 사람들도 그분 앞에 거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이미 구별되어 드려진 사람들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구별되어 봉헌되어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개인만 아니라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약간의 결핍이 있다거나 교회를 나가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일을 못 지킨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의 그 거룩하시고 신성하신 의로우심 앞에서 놓고 볼 때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할 때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가히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나지 못할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을 거룩한 사람들로 구별시켰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직 도덕적으로 완전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하신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그의 백성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활에 새로운 사명과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영광)을 선전(찬양)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거룩의 영역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제 계속하여 거룩한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의 살아가는 삶의 내용과 질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봉헌 된 자다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거룩의 윤리적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들어봅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제는 우리의 활동이 제사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에 '예배'(라트레이아)라는 용어는 섬기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님께 대한 의전적 예배를 가리키는 말로 쓰여집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의전적인 예배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태도를 나타내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행 27:2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빌 3:3),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딤후 1:3),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 즉 은혜를 받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3).
이상의 용어들을 볼지라도 예배는 그의 실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고 살아가는 것도 다 포함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모든 일 공부하는 일이나, 상업하는 일이나, 농사를 짓는 일이나, 광산에서 채광하는 일이나, 직장에 나가서 근무하는 일이나, 모든 일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행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간다고 할 때(물론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하여 가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공장에 가고, 가게에 가고, 직장에 가고, 세차장에 가고, 외양간에 가고, 논으로 나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는데 헬라어 사본에 "로기켄 라트레이안"이라고 되어 있고 킹 제임스 영역성경에도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을 한 것을 보면 "영적예배"라고 하기 보다는 '합당한 예배'또는 '이치에 맞는 예배'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된 생활을 드리는 것은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당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상생활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관계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전면에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생활은 거룩하신 주님의 몸의 한 부분으로서의 생활이요, 그러한 지체들의 생활이 주 앞의 공동의 예배에서 공동의 성격으로 능력 있게 표현되어 나타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과 제 >
1. 예배와 생활에 대하여 논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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