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예배의 역사
( 창 4:2-3; 느 8:13-16)
이제 우리는 예배의 기원과 예배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계시의 점진적 발전과 아울러 예배도 역시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지만 그 성격이 뚜렷하여지는 예배의 발전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 시대에 있어서 예배자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성경의 인물들의 예배의 모범과 실패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에게서 비롯됨
예배는 그 출발점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예배 받으실 자와 예배드리는 자의 인격적 관계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특히 천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고(히1:6), 그의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들에게서도 역시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본성적으로 예배의 기능과 경향성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경배의 대상을 찾아 섬기고자 하며 자신의 영혼의 기능을 발휘하여 예배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어서 그 본성의 빛에 의하여(롬 2:14) 예배의 대상을 스스로 찾아 나름대로 예배행위를 하게 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행 17:22-23)라는 구절은 인간의 예배정신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적으로 예배하는 경향성을 부여받은 인간은 참된 대상을 섬기지 못하면 어떤 다른 존재를 경배하거나 그 대상을 찾아서 방황하게 됩니다. 사람의 이러한 성향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기의 대상으로 깨닫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기 전까지는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롬 1:25).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재창조되어 그의 영혼이 새로운 기능을 발휘하면 그는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일에 진력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본래적 성향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새로 지으셔서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시고 그 사람 마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거룩한 소원과 열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누구나 보통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세기 4:2-3)
성경에서 최초의 예배 기록은 창세기 4장 2-5절에 나타납니다. 이것으로 볼 때 예배는 에덴동산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교회는 가정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정의 가장은 그 가정교회의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다스리는 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의 족장들의 가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기관으로서 가장을 중심으로 예배가 드려지고 동시에 성인이 되어서는 스스로의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수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 그들의 생활에서 예배는 자연스럽게 항상 있었던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타락한 이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은혜언약에 참여한 언약백성들은 그들의 생활의 리듬 가운데서 예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볼 때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과 구원의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운 언약이었습니다. 사람은 이때부터 구원에 관한 한 이 약속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 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응답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가장 귀한 인간의 표현이요, 드릴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표현이지만 사람은 그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을 보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언약백성들은 항상 그 삶 자체가 종교생활이요, 그 생활 전부가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 자체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생활과 기타의 생활이 구분되어짓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종교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은 예배에서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이 예배의 제물이 되어지면서 그러한 삶은 별도의 제사 의식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별도의 제사 속에서도 그 신뢰하는 믿음의 자세는 항상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만한 것이 못되었던 것입니다.그런데 분명한 것은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셨다는 점이고 받으시지 않으신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가인의 제사에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란 항상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제물은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제물은 그것을 드리는 사람을 대신하고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제물을 드린 그 사람을 받으셨다는 말이 됩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 자체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각기 자기의 것으로 종교의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열납 되고 하나는 거절된 것입니다.
가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아벨의 선한 행위에 분노를 품고(4:5-6), 악한 자(사탄)에게 지배를 받고 있던 사람이요(요일 3:12), 결국 미움으로 살인을 하였고, 거룩한 공동체 가운데서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하는 일로 참된 신령한 지식을 훼방하는 사람이며(유 10-11), 하나님의 경고의 계시를 무시한 사람이었습니다(창 4:6-8). 그는 가인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를 역사 속에 심어 놓았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악의 세력이 역사 안에 뚜렷하게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은 그래서 타락한 이후 인간의 두 조류의 시작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예배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예배는 곧 그의 정신과 영적 상태의 반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들은 하나님 예배를 가장인 아담으로부터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다같이 예배행위를 하였지만 그 자세와 결과는 큰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인격에 있어서 결정적 차이를 가져오게 한 요소가 무엇인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그것은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이때부터 벌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두 흐름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얻고 살아가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요, 영광일 것입니다.
아벨이 그러한 실증을 얻게되었다는 것은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우신 언약(창 3:15)이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증거에 작용하고 있는 귀중한 요소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약속하신 사실의 확증으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실증하심을 내가 누리게 되는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사실의 계시를 전승 받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타락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우심으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데 그 어떤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심으로 되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 그의 믿음이 근거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계시에 대한 인식의 양이나 차원이 미약했을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구원을 얻기에는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시의 핵은 오늘 우리의 것과 동질의 똑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신심이나 신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을 내가 알고 그 앎에서 오는 지적인 감정이 따라오는 것이고 그의 정당한 신적 지식과 감정은 그의 행동으로 옮겨지는 데 이 전체의 전인적 자세를 신앙이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신앙 자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계시의 내용들을 아울러 자신의 신앙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이러한 전반의 사실들은 내가 어떤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깊이 각성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독특한 것으로서 그 믿음 속에는 특별한 지식이 그 깊이와 양으로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거기에 감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 믿음은 그의 예배생활이나 전체생활의 귀중한 성격으로 작용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3. 노아의 예배 (창세기 8:20-22)
하나님 예배는 어느 한 시대에 누구에 의하여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세상과 인류의 시초부터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정당한 소원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구체적인 예배행위가 어느 시대나 항상 있어왔다는 것을 짐작 할 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성경에 기록된 경우를 중심으로하여 예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와 그의 예배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노아는 그의 일가족이 대홍수로부터 구원 받은 후에 방주에서 나와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마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예배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귀한 약속까지 주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노아의 예배의 수준을 생각하기 위해서 먼저 노아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심판하셔야 할 만큼 배도와 부패가 범람한 시대였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눅 17:26-27) 외에는 더 이상의 특성이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 하여는 별다른 성격이나 특징이 없는 불신과 죄악의 시대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시대의 성격을 들어 주님 재림 직전에도 그와 같을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희귀하며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위협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1:5)라고 했는데 경건한 자와 불법한 자를 대조하여 경건한 자는 불법(무법)한 자들 속에서 고통하며 살지만 하나님은 결국 불법한 자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시대의 특징은 불경건 이었다. 경건한 사람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대세와 사조와 여론을 불경건한 사람들이 주도하여 나아갔고 대중은 거기에 휩쓸려 따라가고 결국 그들이 이루어 나아가는 문화적 특징이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반신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심에 의한 도덕생활이 전혀 없고 이웃끼리 사회생활의 도리와 인간미가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본성과 거기에서 오는 부패된 삶이 문제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반은총의 혜택을 누리도록 되어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도록 되어있지를 않고 또 그 원법이 되는 양심의 법이 있어서 죄에 대한 수치를 알고 보다 가치있고 정당한 일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고 언제라도 그 수준에서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경건과 불의와 도덕적 부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롬 1:18-32 참고). 이러한 불경건은 어느 시대에는 극도에 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원칙적으로 모두 다 심판하시지만 어느 시대를 놓고 현세에서도 심판하시고 역사의 거울로 삼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는 극도의 불경건과 불신과 죄악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하기 마련이며 그의 마음은 상하기 일쑤입니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천국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 갈려고 할 것 같으면 말로만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고 살아가며, 그 나라의 신령하고 거룩한 원칙을 알고 그 길을 따라 갈려고 하면 많은 고립과 손해와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과 자기 생명의 보존과 현세의 행복이나 물질의 힘에 따라 가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약간의 자기 의를 자랑이나 하는 신앙 인은 세상에 자기의 거점을 유지하려는 타협주의의 심사로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기가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국백성의 특징은 세상과 갈라서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행동 결정을 매 순간마다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일로 마음에 고통과 눌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백성은 그 시대의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를 외치게 됩니다.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형태 또는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며 나아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의를 전파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당대에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의를 전파한 사람입니다(벧후2:5). 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와야 만이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으며 마땅히 죄에서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노아의 삶의 내용과 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순종으로 옮겼던 방주의 사역과 그의 선포가 모두 의의 설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가정은 그 시대의 거룩한 교회의 한 분자들로 가담하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구원의 능력과 영광을 높이는 제단을 쌓는 것은 당연하였다. 예배란 그의 생활의 자연스런 연속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 마땅히 적극적으로 드리는 자발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창 6:9) 가지고 살아가는 그 가운데서 아무 때나 자연스럽게 예배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누렸을 때는 예배로 감사와 영광을 올렸습니다. 노아의 예배는 비록 그 예배가 단순하였다 할지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훌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는 아직 율법으로 예배형식이 자세히 가르쳐지지 아니한 때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나 그 계시의 전승으로 어느 정도 예배에 대한 도리가 확립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새를 가지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정결한 것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드렸으며,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창 8:21). 그리고 노아는 예배와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의 크신 경륜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창 8:21하, 9:8-11). 노아는 극도의 부패와 불 경건, 불 신앙의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계승한 자다운 모습을 확실하게 지켰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는 복된 사람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4. 족장들의 예배
노아의 자손들은 노아의 10대 손이 되는 아브라함의 때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을 점점 떠나 결국 바벨탑을 쌓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벨탑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수24:2) 다신론적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 예배자들을 불러내시고 이 땅 위에 두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은 특별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창12:1-3)을 믿고 언약백성들로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때때로 약속과 계시를 주셨고 그들은 그대로 믿고 살았습니다. 족장들은 역시 자신들의 평범한 의식주생활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삶을 특징지을만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들의 생활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평소에 또는 일찍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였습니다(히 11:17-22 참고).
결국 족장들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살아가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자신들의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크신 경륜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내용이 여러 가지로 약속이 된 만큼 그들의 마음과 생활은 거기에 전부 있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족장들에게서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생활 따로 종교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행위와 그들의 사고나 생활이 각각 다른 부분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종교가 그들의 삶이요, 그들의 삶이 곧 종교였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자신의 생활의 한 부분이었던 경우는 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우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종교를 인간의 공리를 위하여 만들거나 그렇게 만든 것을 취하거나 인간생활의 어떤 부분의 필요를 위하여 종교생활을 만들므로 사람들의 생활에 종교생활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면을 차지하는 것이지, 본래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마땅한 본분이요 본상이기 때문에 또 다른 종교생활은 없는 것입니다. 편리상 종교라는 표현을 쓴다면 종교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없는 것이요,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종교인 것입니다.
족장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예배가 그들의 신앙생활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생활 또는 종교생활이 자연스럽게 수시로 예배라는 특별한 행위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정한 날 자에 제도에 의하여 예배라는 종교형식을 갖추는 것으로 종교생활이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전체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려지면서 예배는 그 나름대로 중요한 성격을 띠고 아무 때나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족장들에게 있어서는 예배가 그들의 종교생활의 중심이 되어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신앙생활의 성격을 발견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 아니라 예배행위는 오히려 그 조그마한 한 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가정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적 성격을 나타내신 때이기 때문에 후대의 보다 더 크고 복잡한 사회 여건 하에서 이루는 교회와 공동의 예배행위와는 여러 가지 제도적 차이를 가져오겠지만 중요한 것은 예배는 천국백성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신의 생활과 관련하여, 오히려 그 평소의 생활의 연장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5. 성막과 성전의 제사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들의 종교의식에 근거하고 있다기 보다는 그들의 생활 경험 속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이루신 일에 대한 응답이 그들이 신앙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언제나 그들의 생활과 역사에 깊이 뿌리를 박고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단순한 의식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족장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에도 예배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생활과 예배는 양극화 현상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그 생명력 있는 생활은 그대로 예배로 나타나 그것이 단순하고 그 절차가 간단할지라도 거기에는 신뢰가 있고 진실이 있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 이르러 주어진 율법들도 의식행위에 집중되어 있지를 않고 그들의 모든 생활과 관련되어 주어지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예배는 희생제사의 형태를 가지고 모세 시대에까지도 계속되어 왔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자기 백성들을 보내 달라고 할 때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했던 것(출 5:3)은 그 시대에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같은 형태로 계속되어 왔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예배도 역시 더 한층 이전보다 발전하는 모습을 띠게 된 것입니다. 그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예배의 대상이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신 분이시라는 명확한 인식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찌기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하신 대로 자기들을 구원하시고 거룩한 나라로 세워주셨다는 그 경험은 그들의 예배를 더 한층 분명히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모세가 그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불려질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예배 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인상을 결코 지울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발전은 예배의 정신이 더 한층 구체화되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족장시대의 제사에서 보다 이스라엘 민족 이후 시대에서 예배의 구체적인 성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 가지 제사의식을 명하시고 거기에 깊은 내용을 담으셔서 훨씬 구체화된 예배를 시행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는 그들의 제사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는가 하는 것과 둘째는 그들의 제사가 공동의 행위로 시행되어졌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제사 가운데는 속죄의 성격을 가진 제사도 있고 헌신의 성격을 가진 제사도 있고, 감사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제사도 있습니다. 속죄의 성격을 가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것이 감사를 포함한 내용으로 화목의 제사가 별도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속죄적 제사는 사실상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성취되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 번에 드리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의 축복을 이미 영원하게 누리게 된 것입니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이러한 제사에 있어서 반드시 중보자의 역할이 필요하였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인데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자로 계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의 도움을 통하여 속죄의 제사를 매번 드림으로 용서받게 되었으며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항상 유지되도록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의 중보의 사역에 의지하여 아무 때나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가 있으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 있어서 우리는 구약의 사람들이 매번 속죄제를 드리던 것처럼 속죄의 예배를 별도로 드리지 않는 것은 구약의 속죄제가 예배의 성격보다 속죄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별도의 어떤 속죄 예배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와 속죄제와의 관련성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우리의 예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속죄의 터 위에서 행하여지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사역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 가운데는 감사와 헌신의 제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매일 자기 집에서 드려지는 제사도 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사실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경륜 전체와 관련하여 현재에도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생활과 생명의 발휘, 전체를 다 쓰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흥을 도모하시기를 소원하는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제사생활은 그러한 의식에 내가 참여하였다고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든지 그 실질과 생명이 없이도 얼마든지 내가 거기에 참여하여 계속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배자는 그의 예배행위가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만한 정신과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의 기능이라는 것이 예배자로서 합당하게 그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그의 모든 종교 의식행위는 무의미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고 하신 것입니다.
▣ 내용 있는 제사
하나님께서는 제사 자체를 원하시지만 내용 없는 참여를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거절된 것이 아니라 그가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았고, 또 그럴만한 영적 변화가 없었다는 데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범죄는 제사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거기에 상당한 헌신이 없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그의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거절되어 버리고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사야의 책망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사 1:12). 제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격과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제사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사1:8)와 순종(사 1:19)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먼저 율법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깨달아 행하여 나아가는 삶을 원칙으로 하는 것인데 그것은 없고 전부터 하여오던 습관대로,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던 습관대로 종교의식은 부지런히 행하여 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멈추고 깊이 생각하여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살수가 없고 목사라 할지라도 다 그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살고 못 살고 가 문제가 아니고, 목사가 못사니까 나도 그렇게 안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피할 길이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이것은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렇게 산다고,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그것은 무지한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은 자신이 안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무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의 생활을 그토록 책망하고 회개를 외쳤지만 그가 자신이 그만큼 훌륭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이유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못살아도 어쩌면 평생 살아도 다 못살겠지만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하고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개인의 상태로 말한다면 새 생명과 영적 사망의 차이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원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고 그때부터 변화하여, 고쳐진 영혼의 기능의 작용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바뀌어지고 자신의 인생관이 바뀌어지는 바에 따라 그의 생활이 바뀌어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련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실천하느냐보다 내가 깨달은 정도에서, 그 수준에서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고 있느냐 하는 그 사람의 상태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격과 어울리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 제사의 공동행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국가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지상에 존립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나라들 중에 한 나라로 서 있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나타내고 실증하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독특한 내용을 가지고 건설된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국가 공동체의 형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행위를 단순한 개인이나, 가정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제는 공동의 행위로 시행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의 행위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개개인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만국 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하나의 개체로 놓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개인이 그 개인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개인들이 그 공동체를 위하여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의하여 의미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성막이나 성전에 올라와 제사를 드리고 내려갔다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의 제사로 항상 거룩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는 그 개인이 아니라 친히 경영하시는 그 나라 전체를 통하여 영광을 거두시며,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들어 쓰시는 사실에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다같이 절기와 제사에 참여하여 함께 드림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거룩한 교통을 나눌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막이나 성소나 성전에서 개인적으로도 제사를 드렸지만 분명한 것은 공동의 장소를 마련하여 공동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점차 그 중요성이 더하여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에 이르러 성전을 건축하면서 공동제사가 정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곳곳에서 개인적인 예배가 이루어지면서 공적 장소에서 공동으로 예배가 드려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같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종교나 사회생활 전체에 걸쳐 공동체적 성격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개인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의 공동의 사회를 형성하여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과 공동의 예배를 통하여 히브리인으로서의 가져야 할 거룩한 사상(헤브라이즘)과 신앙과 정서를 같이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 친히 어떤 사회를 만드셨다면 그 특별한 사회를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은혜와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회는 그만큼독특한 성격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로 말하면 히브리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내용을 가지고 그 사회의 한 사상과 정신으로 성격을 형성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도 그 당시의 역사 가운데 그렇게 존재하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회의 자녀들이 그러한 생활감정, 정서 가운데서 자라나고 자기 민족이 가지고 있는 사명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의 실상을 알고 그것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깨달아서 거룩한 사회를 형성하고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동의 예배는 이러한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교회의 참 정신과 요구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면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로서는 의미 없는 사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독특한 세계, 교회라든지, 은혜의 왕국, 즉 하나님의 나라라든지 이러한 것의 성격이 자기에게 강렬하게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교회적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의 장성이라는 것은 그러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정서와 능력과 주의 가운데서 자라나는 것이며 이것이 잘 자라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 인품에 그것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정서를 바로 흡수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적인 품성과 능력이 잘 드러나는 인격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실을 성도의 교통 가운데
서 실증하는데 그 장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본의를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야 하나님께서 그 사회를 내신 의의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공동의 예배를 통하여 한층 더 그러한 사회적 성격을 이루는데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6.신약시대의 예배 (벧전 2:5)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흩어지면서 그 이후 그들에게 예배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성전 제사에서 회당예배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처에 회당을 지어 그곳에서 그들의 모든 종교 행사를 시행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약의 성전 제사의식이 사라지고 다른 내용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이유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을 회당생활로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예배 속에서 자라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회당예배는 기도와 찬양이 있었고, 선지서와 율법의 낭독으로 이루어졌는데 기도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고정된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찬양은 시편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예배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그 당시에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의 중추기관이었으며 특히 그들의 종교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는 회당이 이었습니다(행 6:9, 13:5, 13:14, 14:1, 17:10)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율법과 선지서를 읽고 설명하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기독교 예배는 탄생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유대인들의 회당예배와 유사하였습니다.
그 순서를 보면 먼저 성경 낭독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어떤 부분을 택하여 낭독하든지, 주님의 교훈이나 사도의 서한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의 순서가 이었으며, 이어 찬송을 드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찬송은 시편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배의식이 진행된 후 공동식사와 성찬식이 베풀어 졌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2세기경 로마에서도 시행된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주일날이라 불리움)에 도시나 촌락에 사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선지자들의 글이나 사도들의 서신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읽고, 그것이 끝나면 사회자가 낭독된 성경 구절 중에 포함된 진리를 전달하며 권면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렇게 기도가 마쳐진 후에 떡과 포도주와 물이 운반되어 사회자가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회중들이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고 각자 떡과 포도주를 받아 나눕니다. 혹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집사들에 의하여 분급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뜻이 있거나 유족한 사람들은 재물을 받쳐 회장이 보관하였다가 고아와 과부들이나 곤궁한 자, 옥에 갇힌 자, 나그네와 외국인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세례는 침수나 관수의 형태로 실시되어졌는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관계를 맺는 표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사도 후 시대(A.D. 100-313)의 예배를 살펴보면 그들이 주일날(주께서 부활하신 날)의 박해를 피하여 비밀리에 새벽이나, 밤중에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은 즐거운 날로 주일을 지켰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은 오후 3시까지 금식하고 부활절 이전 40시간을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개인 집이나 셋집, 혹은 회당에서 드려졌는데 200년 후에는 "주의 집", "하나님의 집", "기도의 집"이라고 불러서 특별한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회당의 예배의 내용은 찬송과 성경 봉독과 말씀 강론, 기도, 성찬식, 헌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찬송은 주로 시편과 기타의 성경 부분이(사 6장; 눅 1:46; 마 21:9; 계 1:6) 사용되어졌습니다.
성경 봉독은 사도들이 쓴 예수님의 언행록과 선자자들의 글이 읽혀졌으며 강론은 처음에는 성경을 읽은 후 간단하게 즉석에서 느낀 대로 감사를 말하는 정도였으나 차차 준비된 치밀한 형태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전체가 일어나서 힘이 지나도록 하였으며 성찬식은 회개와 눈물로 정성을 다하여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헌금은 회장이 보관하여 구제하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순수한 생명력 있는 예배는 카톨릭시대로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가 첨가되고, 점차 의식화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A.D. 1.500년경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더하여졌습니다. 예배는 성직자와 수도사들의 분야로 되어버렸고 일반신도들은 막연한 참여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미사경전(Missal)이나 의식은 당시의 학술 용어인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성직자에 의하여 연출되는 종교관람객들을 위한 하나의 종교연극과도 같았으며, 이는 공동의 예배라는 중요한 성격을 파괴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미사는 그들의 연옥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뵈트너의 말을 들어봅시다. "연옥교리는 흔히 신부들의 금광(the gold mine of the priesthood)으로 일컬어지는 데 그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수입의 지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이 술책으로 우리는 부자가 되었다(By this craft we have our wealth)고 말해야 좋을 것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한 하급미사에 드는 비용은 최소 1달러가 들고 고급 미사에는 5달러에서 10달러가 들고 장엄 고급 미사에는 25달러에서 35달러가 든다. 부자들은 자신의 죽은 이후 계속적인 미사와 기도를 위하여 수천 달러를 남겨 놓기도 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하나님 예배가 얼마나 타락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잘못된 교리와 결탁되어 오용되고 있는 예입니다. 어느 시대나 예배가 인간의 다른 목적을 위하여 공리적으로 이용되는 때에 심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도 여로보암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난 인위적인 예배를 시도하였고(왕상 12:25-35), 아하스왕이 또 그랬습니다(왕하 16:10-16). 그러나 예배를 인간의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행위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547년에 스티븐 가디너(Stephen Gardiner)가 크랜머(Cran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중세시대의 카톨릭의 예배상황에 대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사제나 성직자들이 제단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복음서를 읽을 때 일어나고, 축성(성찬용 떡과 포도주를 성별하는 것)할 때에 무릎을 꿇는 것 뿐이며 그렇지 않으면 각자 기도 시에 자신의 기도를 드리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것은 신도들이 마틴스(기도회의 하나)나 미사를 실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자리에 참석하여 가만히 기도나 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성직자들의 말의 분명한 발음과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 들을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들로서는 예배에 참석하고, 책임을 충분하게 이행하고, 기도도 잘 드리고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들은 자기의 예배를 성직자들에게 맡겨 신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마땅한 일로 생각하였고 그렇게 예배는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세시대의 예배는 형식과 의식주의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예배를 철저히 부정하였습니다. 칼빈선생은 미사를 사탄의 아이디어라고 평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의 미사에서 거행되는 성찬식은 미신과 혼합된 경외심에서 이루어졌고, 기도의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성모 마리아와 나누어 갖게 함으로서 개혁자들의 비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에 있어서 초기 기독교의 형태를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예배에 있어서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성찬예식입니다. 이때부터 이 두 가지가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을 다시 받게 되고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예배의 요소로서 예배자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영적 예배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성경과 초기 기독교의 예배정신과 관습을 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불필요한 장식과 의식들은 제거하고 예배를 단순 화시켰으며, 미신적이며, 마술적인 예배정신을 제거하고 성경적 예배자세를 회복시켜 나아갔습니다. 사실상 우리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의 예배행위를 지적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하였다는 실상은 그가 긍휼을 베푸는 사실로 나타나는 것이요, 그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그가 이미 받았다는 사실의 표현일 것입니다(마 5:7). 이러한 그의 변화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격과 생활 속에서 실증되는 것인데, 전혀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 생명의 발휘가 없는 사람이 예배행위는 계속 참여하고, 실제 예배는 이러한 성령의 작용으로 기쁨과 진실과 적극성에 의하여 드리는 개인들의 공동적 행위인 것인데, 예배는 형식과 의식주의로 휩싸여 나아갈 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예전에서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은 하나의 전통으로 내려 온 것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그러한 외적 경건태도에 비하여 생명력 없는 예배를 가져오는데 그러한 악순환은 바른 대안을 제시할 표준을 가지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개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교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미 그러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바입니다. 교회가 정당하고 거룩한 표준을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하여 갈수록 밝히 세워 나아가지 않으면, 거기에 불필요하고 그릇된 것이 늘어 붙어서 그것들이 큰 자리를 점거하고 그것이 종교인 것처럼 밀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 예배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 깊이가 얕아서 이리저리 밀리다가 좌초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서 종래의 카톨릭과 전통적인 개신교에 반발한 근래의 성령운동가들은 비성령적인 방법에 의한 성령운동에 깊이 빠져 거짓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예배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데 성령을 말하고, 성령을 운동한다고 해서 그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성령운동가들에게서 성령의 작용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서도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나는 거룩한 사실들은 없고, 공리적인 심사에서 오는 현세적 기복주의나 감정적인 운동만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계시를 통하여 셩령님의 역사에 대한 보다 중심적인 교훈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리저리 요동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진리의 계시에 대하여 밝아야 그의 모든 행위가 바로 서서 나아가게 되는 것인데, 중세시대는 말씀의 쇠퇴로 인하여 그 예배나 신앙생활 전반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16세기의 개혁 교회가 탄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 했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례전에 대하여서는 요즈음에는 개신교 내에서 예배의 성례전적 요소를 강조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일찌기 종교개혁자들도 성례전은 예배의 요소로서 유일하게 인정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칼빈선생은 이 성찬예배를 매 주일 실시하려고 하였지만 시의회의 거절로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형제들로서 드리는 것인데 예배의 원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성례예배라고 하면서 '그것은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적절한 예배이다'고 한 바 있습니다.
성례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임을 확인하면서 그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능력을 교회가 힘입어 살아갈 수 있음을 알고, 그를 의지하고 전체가 그 앞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공동예배의 가장 훌륭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의 말씀이 선포되고 정당한 성례전이 시행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자라날 것입니다. 그 백성들은 성심으로 찬송을 올리며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가진 바 소유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드려서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를 드린 자답게 나아가 사명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교회답게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며 성례전의 위치를 인정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진정한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특히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예배를 지난 시간에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예배만이 아니라 분명한 어떤 목적과 근거를 가지고 공동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을 유의하면서 신약교회의 위치와 그 공동의 예배의 귀중성을 주의 깊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신약교회의 예배는 구약 이스라엘의 예배의 실체가 되기 때문에 훨씬 더 밝은 내용을 가지고 드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만한 인식과 수준이 있는 자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교회는 자신이 처한 영적 위치를 바로 파악하여 그만한 각성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예배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회중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들은 그 전체의 성격을 좌우하기 때문에 큰 책임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미숙하고 각성되지 못한 예배행위 하나는 사람의 눈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는 그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교회 안에 많게 되면 각성된 개인들이야 하나님께서 귀히 받으시겠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로서는 세상에서 별 의의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다음 구절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이 말씀에서 '신령한 집'은 그 구성원들이 성령님의 내적 교통에 의하여 거룩한 교통 가운데 새로운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것을 말하며, 이 집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 거룩한 공동체인 것을 말합니다(엡 2:20-22).
그러므로 신령한 집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적으로 연합된 하나님의 새로운 오이코노미아로서의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제 교회는 그가 허락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서 있는 위치가 있는데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각기 개인의 거룩한 예배나 덕성들은 그 자체로 혼자 발휘되는데 의미 있는 것이 아니 그 신령한 집 안에 들어 있어서 그 집 자체가 신령한 성격을 발휘하게 되고 그 집 자체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큰 의의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주적 공동체인 주님의 거룩하신 몸인, 교회가 가지는 사명인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제사장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대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영광을 돌리며 온 인류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영광)을 선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개의 지 교회들은 다 이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에 속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거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수효가 적거나 미미하다는 것은 하나도 문제되거나 낙심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과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고 거룩한 교통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우리가 거룩한 본상의 교회에 속하였다는 사실은 자연히 현상의 성격을 띠게 되는 까닭에 유형의 교회를 이루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그 공동의 회집을 습관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것은 마땅히 권면하여 고쳐야 할 것이요, 주의
재림을 가까이 두고 있는 교회는 더욱 그래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우리 나라 교회들이 주일 낮에의 참석 수는 많아도 저녁이나 기타의 집회 수는 그 삼분의 일도 못미치는데 적어도 그 교회에서 공적으로 약속하고 다같이 모이는 회집에 습관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회중들을 과연 그 교회가 신령한 군사로 전진해 나아가는 일에 진정한 영적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의문스러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삼일 밤에 나오는 숫자를 그 교회의 진정한 숫자라고 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교회생활을 원하고 교회의 참된 형성을 원한다면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경우 외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공회에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일이나 삼일 밤이 똑같은 것이지 그 공적 회집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그 교회의 공동의 약속이기 때문에 만일 참여하지 못할 경우라면 전체 회원이 받아들일만한 것이 되어야 하고 또 공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삼일 밤 집회라 할지라도 참석하지 못한 경우에는 미리 교회 앞에 공고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사회의 맹약 보다 더욱 강렬한 언약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그만한 공동체적 성격이 없이 사단과 세상의 세력 앞에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습관적으로 불참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권고하시기 바랍니다. 습관은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마음 속에 쉽게 변명할 길을 열어 피할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갑자기 큰 일이 부닥치면 자기 마음이 갈피를 잡지를 못하고 불신앙적으로 나아가고 결국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나쁜 습관들을 성령님께 구하여 뿌리를 뽑아 내버리고 좋은 습관을 성도들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공동의 예배에 대하여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 하여야 합니다.
▣ 예배의 역사 개관
가. 족장 시대의 예배
1)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함께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고 제사 드리는 일을 하였다
( 창 12:7-8, 13:18, 35:1-8, 수 24: ).
2)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중심이었다( 창 15:9-10, 22:5-8 ).
나. 율법 시대의 예배
1) 성전에서의 예배
2) 규정된 예배 - 세부 사항까지 규정(성전을 시설하는 방법, 내용, 제사장의 예복, 회생제물의종
류와 방법.
3) 위탁적 예배 - 매년 3회의 에배는 위탁하지아니하고 12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림.
* 3회( 무교절, 맥추절, 장막절 - 출 2:14-17 )
4) 의식적 예배
5) 상징적 예배
다. 포로 이후 시대의 예배
1) 회당 에배의 실시(겔 8:1).
2)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 존속( 느 8:1-6 )
3) 어느 곳에서나 설립( 행 6:9, 13:5, 14;1, 17:1)
라. 예수 시대의 예배 : 회당과 성전에서 동시에 거행됨.
마. 신약 시대의 예배 : 성전의 희생제물 중심의 예배와 회당에서의 말씀 중심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하여 합쳐짐 그것이 성찬이다.
바. 초대교회의 예배 : 말씀 예배와 만찬 예배로 나누어져 있었다.
사. 속 사도 시대의 예배
1) 주의만찬과 말씀(강론)이 나누어짐.
2) 주일날로 예배를 옮김.
3) 찬송가를 사용.
4) 수요일, 금요일은 오후 3시까지 금식을 경건으로 생각.
자. 중세 시대의 예배 : 말씀예배가 없어지고 성례전만 남게 됨.
차. 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 : 말씀 예배가 회복되고, 자국어로 예배함.
카. 오늘날의 예배
1) 예배 형태면에서 고정적이다.
2) 예배를 난발하고 있다.
3) 음악의 사용관심이 높아짐.
4) 설교중심의 예배가 이루어짐.
<과 제 >
1. 예배의 근원에 대하여 논하라
2. 예배의 역사를 개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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