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성서적 근거
구약성경에서 '예배드린다'는 말로 사용된 동사의 대표적인 것은 `샤하'(Shaha)라는 말인데 이 말은 `엎드린다, 또는 따른다'는 뜻이다.67) 여기서 `엎드린다'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또 `아바즈'(abhadh)라는 말도 예배시에 사용되는데, 이 말은 `섬긴다'는 뜻68) 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기는 존재임을 가르친다.69)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남은 자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할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기자들도 시편 96편 3, 10절의 말씀과 시편 57편 9절의 말씀에서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배받을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70).
신명기 26장 10,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을 가르쳐주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고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은 가나안 족속을 말하며 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때부터 열린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 86편9절과 67편5,7절에 보면,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잠재적인 예배자로 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71)
■ 신약성서적 근거
신약시대의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즉 그분이 스스로 자기를 현시하심과 예수님을 통한 구속의 역사(役事),성령을 통하여 일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충만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었다. 즉 예배는 이런 확신에 의해 좌우되었다. 로마서(15:9-11)에서는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잠재적인 예배자로 보고 계심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 34절, 35절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서 고백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통해서도 그를 경건하게 경외하는 자들을 부르신다고 말하고 있다.72) 이방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기독교문화와 교회의 환경에 익숙치 않은 자들을 그들의 문화에서 출발하여 교회문화를 소개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하는 예배야말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참여해야 할 사명이며 의무이다.
특별히 바울의 전도방법73) 속에서도 이러한 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바울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자유했지만, "가능한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문화의 옷을 입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의 옷과 언어를 사용했으며, 유대인들의 전통과 문화를 인정하면서 존중했다. 그들과 함께 식사할 때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율법 없는 자, 즉 헬라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에는 돼지고기를 먹었다. 이 이유도 가능한한 많은 헬라인들을 전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헬라인들과 함께 돼지고기를 먹는 사실 때문에 실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렇게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과 믿음을 같이 나누었다.74)
이처럼 바울이 여러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 여러 모양의 문화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떻게 하든지 몇몇 사람들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복음을 위한 일이며, 이방인을 복음에 참예시키는 길인 것이며, 이것이 성육신적 결단이다. 성육신은 복음이며 복음은 성육신이다. 성육신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75) 그러므로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여행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안디옥교회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행13:2),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고 한 것을 보아 예배한 후 안수하여 전도자를 파송한 것을 알 수 있다.76) 즉 전도도 예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예배 자체는 세상을 향하는 아주 강력한 전도가 된다.77)
■ 열린예배의 신학적 의의
밀톤 잉커(Miton Yinger)가 `종교란 인간집단이 인생의 긍극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지니는 믿음과 양식의 체계'.78) 로 규정한 것처럼, 열린예배에 대한 논의는 '겉모습' 또는 '형식', 즉 '스타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되고, 양심의 소리를 경험하는 믿음과 양심의 체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예배는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생활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예배는 곧 생활이다.79)
무엇이든지 그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성'과 그 의도를 전달할 때 전제되는 문화적 조건들이다. 그러므로, 열린예배는 형식보다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의도성을 조건지우는 문화적 요인에 따라서 스타일은 수없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의도가 같더라도 문화가 다를 때 스타일은 달라진다. 스타일이 같더라도 문화가 다를 때에는 그 의도가 달리 전달되고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열린예배에 대한 논의가 그 스타일에 대한 논쟁으로 끝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진리는 모든 개념화를 능가하는 양심의 소리의 경험을 소유하며 종교적 진리는 "신비주의적 경험에서 얻어지는 신성한 것에 사유"로부터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80) 예배와 생활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교회는 무력해질 가능성이 있게 된다. 교회를 이 위험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서는 주목할만한 예배의 혁신운동과 갱신운동이 전개81) 되어야 한다.
열린예배의 신학적인 논의는 열린예배의 '개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즉 열린예배는 무엇인가, 오늘과 같은 스타일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이런 논의를 해야 하는가, 한다면 어떠한 기준으로 어떠한 한계 내에서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할 준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82)
■ 열린예배의 신학적 본질
열린예배를 통해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적인 특징은 "상황화"와 "문맥화"를 통한 방법이다. 열린예배의 스타일은 새롭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은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미래를 결정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미래로 나아감에는 과거의 인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83)
첫째,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모든 것이 상황화 또는 문맥화의 결과이다. 히브리인들에게는 히브리어로 선포되고 기록되고 전승되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그 의미를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들의 문화적 전제들(Cultural presuppositions)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개념'은 '히브리어' 또는 '히브리 민족'이라는 한 '컨텍스트'를 전제하여 오늘의 기록된 말씀을 낳게 되었다. 이것을 계시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 하나님의 계시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과 채널이 사용되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포되고 기록되고 전승 되었다. 예를 들어,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선포할 때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했다. 물론 이사야의 의도가 반드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즉 이사야가 의도했던 대로 청중이 모든 것을 다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사야의 의도는 가능한 한 잘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84)
즉, 이사야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이 익숙해 있는 문화적 요인들 - 언어, 개념, 자연, 표현방법, 수사학, 관습, 비유 등 - 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사야가 전하고 싶은 말씀의 개념이 호세아의 입에 담겨졌을 때는, 호세아 앞에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옷이 입혀진 상태로 선포되었다. 호세아는 자기 시대 사람들의 문화와 상황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모든 성서 기자들이 이러한 의도성을 갖고 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상황화'의 한 결과이다.85)
이처럼 모든 언어현상은 상황화의 과정이다. 모든 문학, 역사, 영화, 코미디와 유우머 등 상황화가 아닌 것이 없다. 만약에 이러한 상황화가 없거나 약할 때, 흔히들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력이 부족한' 또는 '말솜씨가 없는'것이 돼버리는 것이다. 말을 해도 능력이 없고, 말이 많아도 변화가 없는 것은 바로 이상황화의 결핍 또는 부족 때문이다. 문화와 역사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초월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요, 은총에 대한 응답과 수락의 행위요 그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결단의 사건이다.86)
둘째, 성서 안에 있는 내적인 역사를 통하여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어 일어났다. 어떠한 개념이 시대와 문화적 배경이 변화됨에 따라 상황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성경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구원"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변화됨에 따라, 즉 광야시대, 사사시대, 왕정시대, 포로시대, 포로이후 시대, 중간사시대, 신약시대에 따라 다른 옷을 입게 된다. 또 다른 예는, '제사'도 이러한 역사적 시대를 거치는 동안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상황화의 과정을 거쳤다. 성경 안에서도 제사의 형태와 스타일이 변화되었다.87)
이처럼 예배형식의 갱신에는 삶의 개혁이 동반되어야 하고 밑받침되어야 한다. 예배의 갱신은 우리의 삶의 갱신을 유발하고 주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삶의 갱신이 있을 때 예배의 갱신은 더욱 증폭된다. 예를 들어, 레위기의 성전 - 희생제사(Temple-Sacrifice)가 중간사를 거쳐 신약시대의 회당 - 율법 낭독(Synagogue-law)으로 변화되고, 이것이 교회사를 통하여 변화되고, 종교개혁을 통하여 변화되어 현재까지 이른 것은 상황화의 대표적 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앞으로 계속 반복될 것이며, 또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88)
이러한 제사-예배의 변화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열린예배'라고 부르는 최근 스타일이 현대화된 예배는 새로운 현상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적극 권장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구도자 목회의 목적은 교인들 개개인이 활기있고, `내교회'라는 의식을 가진 성도가 되어 `어떻게 교회에 봉사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찾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89)
■ 열린예배와 공연신학
예배는 우리와 하나님간의 관계, 즉 역사적 사건들에 뿌리를 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극적으로 공연한 것(a dramatic enactment)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공연이란 뜻은 `사상이나 무의식적 두려움 등을 말보다는 행동이나 행위로 표현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예배에서의 공연(enactment)형태는 낭독(recitation)과 극(drama)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낭독(신앙고백, 찬송, 설교)과 드라마(혹은 의식:retual)는 그 근거를 구약과 신약, 특히 유월절과 성찬에 두고 있다.90)
예배에서 우리는 한 실화(a story)를 재진술(retell)하고 또 공연(act out)한다. 여기서 한 실화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과 그 일에 대한 현재 우리의 반응을 의미한다. 예배란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 주는 사건을 공연하는 것이다. 예배는 신자들을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과 연합시킬 뿐 아니라 역사상의 모든 신자들의 공동체와도 연합시킨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도자들이 양심의 소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예배를 공연할 때 신자들은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다시 체험하게 되며, 동시에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91)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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