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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 교육 자료실

[스크랩]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와 그 갱신

by 낮은곳에 서서 2016. 7. 17.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와 그 갱신에 대한 소고 

 

 




 I.서론

   예배의 부흥. 예배의 .갱신, 그리고 예배의 개혁은 현대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관심사가 되고 있다. 왜 예배를 갱신해야 하는가? 예배의 갱신이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은 매우 값있는 질문이다 교회당에서나 가정에서나 기도원에서나 또는 다른 장소에서 한국의 교회들만큼 자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나라가 별로 없을 것이다. 매일 새벽, 주일 낮 밤, 수요일 밤, 금요일 구역 집회, 가정 예배 등 정기적인 예배 외에도 심방예배, 길흉간의 특별예배를 합치면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빈번히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인도자나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예배의 신학이 없다. 한국이란 상황에서의 예배는 너무 무기력하다.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응답하는 자세보다 구경꾼으로, 순종과 결단의 태도로 설교를 듣는 것보다 들어주고 평가하는 태도로, 아직도 샤마니즘의 영향을 벗지 못하여 예배를 복받으려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리고 예배자와의 공동체의식이나 예배의 공동행위라는 의식은 없고 이기적인 사상으로 채워져 있음을 느낀다. 함께 살아가는 생활과 함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의식이 시급하다. 예배는 교회의 심장부의 중심점에 위치한다. 예배에 의해서 교회는 산다. 그러므로 예배의 갱신은 한국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먼저 개신교. 예배의 특징에 대한 이해와 현재 한국 교회 예배의 문제점과 예배의 갱신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생활과 선교에 활력을 주고 교회가 생명력을 회복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II.개신교 예배의 특징

   개신교는 교파가 많은 것만큼 그 예배의 형태도 다양하다. 루터교회나 영국 국교회의 예배는 일정한 의식이 있는 데 반해 감리교회나 회중교회는 의식이 없다. 또 개혁교회파 장로교회는 일정한 순서를 가지고 있으나, 침례교회의 집회는 일정한 순서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와 같이 다양한 예배를 간략하게 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다면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그 양식을 계승한 것이거나 거기서 더 나간 것이거나 한 것이어서 몇 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루터교회 예배는 루터에게서 나왔고, 영국 국교의 예배는 영국 교회에서 나왔다. 감리교의 예배는 영국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허물어뜨린 것이고 회중교회의 예배는 쯔빙글리의 감화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예배는 칼빈과 청교도들에게 근거해 있고, 침례교나 성결교의 집회는 청교도와 부흥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여러 교회들의 예배와 집회도 모두가 위의 계통 중 그 어느 것에 속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하면 매우 다르게 보이는 개신교회들의 예배도 기본적인 점에서는 대체로 공통된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것은 희랍과 로마 양 교회의 예배의식과 기교해 보면 한층 더 명백해진다.
   그러면 이 개신교 예배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그 두드러진 특징은 개신교 예배에는 어느 교파에서나 희랍과 로마 양 교회 예배에 포함되어 있는 이교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희랍, 로마 교회도 많은 예배의 갱신을 가져왔지만 중세의 미사에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서 많은 순교자와 성도들이 예배 또는 기원의 대상이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소홀하게 했다. 또 갖가지 그림상과 조각상이 우상에 가까운 숭배를 받고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나 알아 듣지도 못할 낮은 목소리가 밀의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미사에 있어서 화체설과 희생설은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공덕의 증진이라고 보는 태도는 전자와 함께 신약 성서의 견지에서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런데 개신교 예배에서는 이런 모든 것이 말끔히 불식되어 있다 물론 영국 국교회에서는 제단 위에나 성만찬상 위에 십자가를 얹고 최근에는 다른 여러 교파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모든 교회당 안에 있는 십자가는 상징적인데 지나지 않으며, 로마교회와 같이 숭배나 애정의 대상은 아니다. 또 루터의 성찬에 대한 견해인 실재설 속에 중세의 실체 변화설에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보수적인 성찬 사상은 그것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불가결하다는 것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확보라는 혁명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에 의해서 중세의 미신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되어 있다. 그리고 찌빙글리나 칼빈의 조류를 따르는 개혁교회에서는 십자가, 등, 꽃, 예복 등은 말할 것도 엄고 성가대, 오르간까지도 교회로부터 내버려야 하는 너무 과격했던 교회들이 있다 어떻든 이런 사실 속에 개신교회의 첫 번째 특징이 나타나 있다.

   둘째로, 개신교 예배는 일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예배에서 가장 클라이막스가 되어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은 물론 회랍, 로마 교회 예배에 말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사도서간과 복음서 낭독이 있고 시편이나 강화, 그리고 영창이 있다. 복음서를 다루는 태도는 외형적으로는 경건하고 엄숙하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갈라져 나와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결정된다. 독일 복음교회나 영국 국교회와 같이 비교적 로마교회에 가까운 교회에서 그 예배는 후자보다 훨씬 더 성서적이다. 그들의 의식문은 성서의 말씀에서 성립되어 있든가, 말씀에 대한 응답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성서 일과에서는 개신교는 각기 자기 나라 말을 사용하여 회중이 알아 들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또 성서를 낭독할 때는 단순히 예전적으로 아름답게 읽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서의 낭독을 활기띠게한 것은 종교개혁이 예배에 미친 커다란 효과중의 하나이다.

   이에 따라 예전주의의 예배에서는 설교가 때때로 가볍게 넘겨지거나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개신교 예배에서는 설교가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과 생명의 역사를 행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인 요구 - 비록 그것이 종교적 요구라 할지라도 -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안적인 것을 넘어서는 피안에서 강력하게 육박해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거기에 모이는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종교 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던 예배관이었다.  

루터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롭게 전해지고 사람의 영혼을 일깨우고 갱신하기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찬송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함께 모이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말은 개신교의 예배 신학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예배는 성전 예배나 동서방 가톨릭 교회의 신비적인 예배보다는 회당 예배인 말씀 예배에 치중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설교가 예배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설교가 예배에서 군림을 하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제네바 개혁교회가 "교회에 가는 것이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이 전승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희랍교회와 로마교회 예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주의 만찬"의 예전은 이 "말씀"의 중요성을 상실한 것일까? 아니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행동된 말씀"으로서 철저하게 존중된다. 종교 개혁자들은 분명히 로마 교회의 예전관을 어느 정도 배제하고 그들 각자의 성만찬을 수립했다. 그 결과 그들의 해석상의 차이가 생겨났고 교회 역사상 유명한 성만찬 논쟁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성례전을 하나님 말씀의 구체화로 보는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루터의 표현을 따르면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다. 그러나 개신교 예배는 루터교회와 영국 국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만찬을 일 년에 봄, 가을 두 번으로 한정해 버리고 설교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또한 순수하게 들려지며 성례전이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거행되는 곳, 거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 " "성례전에 의해서 주님은 그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약속하셨다." "주께서 그의 거룩한 말씀과 성례전 양쪽에 의해서 그의 자비와 은혜의 보증을 주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셋째로, 개신교 예배는 교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없애 버림으로써 원시 그리스도 교회 예배에 나타난 단순성과 자발성과 능동성을 회복했다. 로마교회의 예배는 제사화되고 전문화되어 그 미사는 사제에 의해서만 집행되고 신도들은 다만 그것을 보고 듣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제는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이라는 이 한 점에서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특권 계급이 되었다. 그때 이런 장기간에 걸친 폐풍을 타파하고 신도들도 예배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은 "모든 크리스찬은 다 제사장이다"라고 한 루터의 개혁의 외침이었다. 그 결과 개신교의 예배는 극도로 단순화되어 버렸다. 독일 복음교회나 영국 국교회와 같은 프로테스탄트로서는 복잡한 예배 의식도 성체 예의나 미사에 비교한다면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하물며 그 후에 생겨난 여러 교파의 예배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소하고 단조로운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개신교 예배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 안에 많은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 성례전이나 의식을 소홀히 하는 주관주의에 빠지기 쉽고 성서의 권위를 높인다는 것이 교회의 질서나 제도를 무시하는 자유주의로 흐르기 쉽고 또 모든 신도는 제사장이라는 주장이 미나 숭고함을 부정하는 평속주의로 전락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개신교 예배는 중세의 극단적인 제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써 예언자적 경향으로 너무 달려가 버린 나머지 그리스도교 예배에 있어서 객관성과 공동성과 예술성을 망각해 버리려는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개신교 예배의 약점이 있다.


III. 한국교회의 예배와 그 문제점

   우리는 이미 개신교 예배의 특징을 살피는 중에서 그 장단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 한국 교회의 예배와 그 의식은 어떠한가? 한국교회 예배의 특징은 첫째로 그리스도적이라기 보다는 샤머니즘적인 데가 더 많다. 이것은 특히 다음 세 가지 사실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1)한국교회의 예배는 다분히 기복적인 예배이다.

예배는 그 자체 안에 목적이 있고 다른 무엇을 위한 방편이 아니다. 바르트는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의 일이며 이것은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 것이다"라는 적절한 표현을 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어떤 효과를 위해서 예배를 시도한다면 그 행동은 이미 예배가 아니고 그 결과는 다른 무엇을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예배 속에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사오니 만복의 근원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 공공연한 기도 속에는 현세적인 기복 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것은 공중예배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길흉간에 드리는 예배와 특히 심방 예배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목사가 찾아 가서 그 가정을 위해 드리는 예배는 주로 현세적인 축복만을 빌어주기를 바라고 있고, 따라서 목사의 손은 복덕방망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마치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해서 액때움을 하듯이 목사를 불러다가 액을 면하고 복을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하나 둘이 아니고 보면 이것은 더욱 절박해진다. 심지어 돼지가 병이 나도 목사를 불러다가 기도를 청하는 교인이 있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니 더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이것은 4300년의 샤머니즘과 2000년의 불교, 1500년의 유교가 한국의 종교와 문화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며 또 불교나 유교가 다 함께 샤머니즘과 짝하여 한국 특유의 불교, 유교가 되어버린 만큼 이것이 아직 100년밖에 안되는 한국 개신교 안에 스며든 것은 불가피한 사정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2)한국 교회의 예배의 특징은 구경꾼들만 모여서 관람하고 있는 예배이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알고 깨달은 사람들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헌신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여기에는 예배드리는 자가 따로 있고 방청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템플(William Temple)은 예배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예배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양심을 살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로 심령을 양육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으로 창의력을 깨끗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하나임의 목적에 대해 생각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 예배는 전부가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본다"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예배당에 갈 때도 "예배보러 간다"고 하고 예배를 시작할 때도 "예배 보자"고 한다. 목사건 장로건 누구든지 "예배 본다"는 말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 이렇게 예배를 "보고" 있기 때문에 예배 장소에 참석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참여 의식이 있을 수가 없다. 목사가 예배 인도하는 것을 구경하고, 장로가 기도하는 것을 구경하고, 성가대가 노래를 하는 것을 구경한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사회를 하면서 “성가대가 노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성가대의 찬양이 어찌하여 교인들의 감상용으로 전락을 해버렸는가? 이것 역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샤머니즘적 사고방식이 예배 속에 뿌리박고 있는 폐습이다. 샤머니즘의 푸닥거리 생리가 그대로 예배 행위에 반영되어 있다는 말이다. 굿은 언제나 무당이 하고 거기 운집한 남녀 노유는 모두 구경꾼에 지나지 않듯이, 아직도 교회 회중의 대다수가 이런 풍조를 그들의 체질 속에 간직하고 있어 쉽사리 태워버리지 못하고 있다. 호세아 6장 6절에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라는 말씀이 있다. 형식과 체면에서 체질이 자라온 한국인들이 이 형식적인 제사, 내용도 없고 빈껍질만 있는 제사, 구경꾼과 방청객들만 모여서 "보고" 있는 제사,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는가?

  (3)한국 교회 예배의 특징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주관주의이다.

희랍어 70인 역에서 통용된 교회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 ҨӑһӑІ의 번역인데 이것은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백성인 온 이스라엘의 총회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예배는 처음부터 공중적인 행동이며, 원시 그리스도교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 즉 부활하신 분의 영적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 이해와 경험은 그리스도교 예배를 한편으로는 세속적 - 자기 중심적 욕구를 정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공허하게 만드는 온갖 열광적 신앙까지도 배제했다. 사도들의 공동체는 "코이노니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있었고, 그 친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헌신하는 것에 의하여 독특하게 하나가 된 공동체였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결코 개인주의적인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종속적인 데에 두고 하나님을 동경하는 주관주의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교회 예배에는 예배의 신학이 없다. 이것은 예배학을 가르쳐 오지 못한 신학 교육의 책임도 있지만 예배 인도자나 예배자가 다 같이 예배의 신학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예배"라는 말의 히브리 어 Shachӑh는 본래 “부복한다”는 뜻인데 구양성서의 사상은 마음과 몸 양쪽의 공손한 태도에 종교적인 찬양과 복종과 봉사를 결합시킨 말이다. 신약성서에서 이 말에 해당되는 λειτουρνι는 봉사와 직무를 가리키는데 "하나님을 섬김다"는 뜻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빈번히 오는 예배에 해당되는 말 προσκυυεω는 글자 그대로는 “상대방의 손에 입맞춘다” 또는 “존경을 바칠 분 앞에 부복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라고 하신 "신령과 진리"의 예배는 "사랑과 복종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예배"이며, 인간의 전인격이 하나님과 만나서 변화를 받고 갱신되면서 그의 계시에 날마다 새롭게 응답하는 예배이다. 여기에는 예배자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예배 행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 말의 구조와 표현부터가 제삼자적 입장에서 방관적 태도를 불허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말은 그 어원부터가 일종의 드라마틱한 어감을 가지고 있다. 즉 예법을 갖추어 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당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데 기울여지기 쉬운 특징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예배를 긴박한 일로 생각하기보다는 하나의 수양이나 수신으로 생각하는 층이 다분히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 주일 예배는 시작하기 전까지 나와 앉은 교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교인들의 예배 출석 행렬은 예배가 끝날 시간까지 꼬리를 무는 것이다. 찬송 부를 때도, 기도할 때도 뚜벅뚜벅 걸어온다. 더욱이 설교 중심의 예배이기 때문에 설교 이전의 순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설교파 교인도 있다. 이들의 예배 참석 시간은 으레 11시30분이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기 바쁘게 나가버리는 조퇴신자도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교회가 설교 위주의 예배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감명을 주고 은혜를 받게 하려는 데서 무리가 많이 생긴다. 설교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강단의 위치는 점점 높아지고 설교자는 그 높은 강단에서 축복과 저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다. 만일 설교가 예배의 중심부에 군림하지 않고 하나의 행위로써 존재하고 또 회중의 심령을 휘어잡고 생각을 자극시켜 성서 본문의 뜻하는 방향을 그 본문이 의도하는 바대로 현재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변화를 일으켜 준다면 그 모든 예배 행위 - 즉 성경봉독, 기도, 찬양, 헌금 등 - 는 더욱 의미가 있고 예배자들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교회당 문을 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설교가 도덕적인 어조와 내용없는 소리로 일관한다면 회중은 상처를 받고 예배를 완전히 망쳐버린 채 교회당 문을 나설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성만찬을 일 년에 봄, 가을 두 번만으로만 한정해 버리고 그나마도 설교 위주의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이며 이것은 예배의 신학이 없는 데서 생겨난 문제이다. 바르트는 "설교의 본문은 언제나 성서에서 나와야 하고 그것은 곧 성례전과 관련되어야 하며, 예언자와 사도들을 통한 말씀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은 비록 그의 후예들이 그를 따르지 않고 성례전을 일 년에 두 번으로 제한해 버렸다 하더라도 그의 개혁운동은 예배의 갱신에다 두고 말씀과 성례전의 올바른 균형을 세웠다. 그리스도의 예배는 본래부터 말씀과 성례전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말씀 예배는 앞에서도 논한 대로 회당 예배에서 전승한 것이고 성례전 예배가 순수한 그리스도교적인 요소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성결교회 등의 예배는 1년에 두 주일만 그리스도교적인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50주일은 회당 예배를 드리고 있는 셈이다. 말씀과 성례전, 이것은 그리스도교 예배에 있어서 항상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하며 그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이 "균형"의 원리는 예배의 갱신에 대한 기초로 인식되고 있고 예배학자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IV. 한국교회의 예배갱신

       (1)예배의 갱신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주의적이고 빈약하며 예배가 없는 신학은 냉랭하고 죽은 것이다. 예배와 신학이 합쳐질 때 그리스도교 신앙에 강한 모티브가 되고 충실한 크리스챤 생활의 동력이 된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근거는 실용주의적이 아니고 신학적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시급히 갱신되어야 하며 이 예배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예배의 신학이 수립되어야 한다. 샤머니즘적인 체질을 갱신하고 참그리스도교 예배로 갱신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예배의 신학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본다"는 용어부터 철저히 바꾸고 "예배보러"오는 구경꾼들로 하여금 "예배자"로 예배에 직접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야한다. "복받기 위해 예배"를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개인주의적이고 주정주의적"인 예배를 공중에 띄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로 자기의 전인격을 가지고 사랑과 충성과 복종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예배를, 말씀과 성례전의 신학적인 균형을 이루는 예배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예배의 갱신은 예배에 있어서 인간을 갱신하고 공중성과 성례전성을 되찾으며 신학적인 균형을 지향하는 하나의 운동이다. 이 운동의 기본적인 주장은 그리스도교란 첫째로 한 인간 개인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를 갖기 원하는 개인들의 집합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시간과 역사 안에 계시하시며 속죄와 신생과 부활의 성업을 성취하시는 것을 믿고 전하는 신앙의 공동체이며 말씀과 성례전의 예배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의 갱신 작업을 위해서 예배의 신학을 가르치는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교인들에게 예배의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예배 인도자인 목사에게 먼저 예배의 신학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2) 예배 의식의 회복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중 루터교와 성공회를 제외한 교회는 대부분 예배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처음에 밝힌 바 있다.그러나 근년에 와서 교회들은 교파의 구별없이 예배의식 문제에 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 당시의 보수적이었던 교회들은 서방 교회의 공동 유산에 대해 한층 더 고맙게 여기게 되었으며 16세기에 과격한 편에 있던 교회들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전통과 의식들을 되찾게 되었다. 교회력은 이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루터교회와 영국 국교회는 그들의 연중 행사표를 풍부하게 했으며 스코틀랜트 교회는 한때 간직하다 폐기했던 예배 의식들을 많이 회복했다. 개신교에서 특히 예배 의식을 가지고 있는 루터교회와 영국 국교회는 교회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고, 미국 감리교회도 그만큼 철저하지는 않으나 교회력을 따르고 있다. 이 교회력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여러 세기에 걸쳐 서서히 발전된 것이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행사하시는 큰 사건들과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의미를 해마다 재검토하게 한다. 교회는 교회력을 폐기하거나 재구성하려고 시도할 때는 그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어왔다. 16세기의 보수적인 개혁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교회력을 보존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보증되지 않은 축전만은 제거했다. 초기의 청교도의 영국과 칼빈주의적 스코틀랜드에서는 교회력을 "로마교적인 제도"라고 생각해서 의아하게 여겼다. 그 결과로 의식을 가진 교회 이외의 개신교회들은 영국이나 스로틀랜드나 미국을 막론하고 메마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교회가 메마른 이유의 하나도 바로 이 교회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3) 교회력의 재발견

   한국교회 생활의 가장 큰 결함도 교회력이 없다는 점이다. 교회력은 강림절이 신앙 생활의 새해를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왔다. 우리의 발걸음은 어떤 모양으로든 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에서 시작되고 그것에 의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신앙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교회력이 없고 교회력을 출발점으로 하지 않는 한국교회에 이런 신앙이 싹틀 리가 없다. 교회가 강림절을 기점으로 하는 교회력을 따라 한 해의 계획을 세우는 것과 이교신 야누스의 두 개의 얼굴을 상징하는 1월부터 한 해를 출발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교회력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여러 세기에 걸쳐 서서히 발전된 것이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행하신 그의 큰 사건들과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의미를 해마다 재검토하게 한다. 교회는 역사적 교회력을 폐기하거나 재구성하려고 시도할 때 늘 그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왔다. 16세기의 보수적인 개혁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교회력을 보존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보증되지 않은 축전만은 제거했다. 그러나 초기에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의 영국과 칼빈주의적인 스코틀랜드에서는 교회력을 "로마적인 제도"라 해서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예배의식을 가진 교회 이외의 미국 개신교회는 메마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교회력도 없고 예배의식도 없는 것은 이런 배경을 가진 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장로교회나 감리교회가 다같이 교회력을 재발견하고 예배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철저하게 이교적인 토양과 이교적인 신앙 속에 100여년을 걸어 왔다. 한국교회가 뿌리박고 있는 이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갱신 작업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회의 갱신은 교회당 건물을 신축예배하고 구조를 바꾸고 기구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을 갱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예배의 신학의 수립, 예배의 신학적 균형, 교회력의 재발견이 이루어질 때,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지고 교회는 생명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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