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있느냐 없냐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가치기준에서 충돌이 발생하는가의 빈도비율에 의해 가늠이 가능하다.
즉 세상이라는 가치성에 깊히 젖어있으면 이같은 단순기준은 다른 비교대상 기준이 없어 부딪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번민은 할 수 있어도 방황은 할지 몰라도 충돌이라는 미지의 대결은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신앙은 반드시 충돌이라는 변수와 접하게 된다.
그것은 기준이 현재세상의 육적가치냐 아니면 미래를 담아 소망하는 영적가치냐에 따라 갈리기 때문이다.
성경을 예수님은 당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증언하실 때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다.
요6:10절 기록에 의하면 모인 사람들을 잔디에 앉게 한 수가 오천 명쯤이라 했다.
말씀에 앞서 제자들의 고민은 이 수많은 군중을 무엇으로 어떻게 먹이느냐 였다.
그들은 단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예수님의 기적앞에 배불리 먹고 만족함을 경험하였다.
그런 군중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선다. 바로 육적인 배부름의 만족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왕이 되어주길 원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드러내고 일침을 보이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갖는 목적은 '표적'이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유이기에, 예수만이 영생이라는 메시야적 진리가 오직 그 이유여야 한다. 그것이 곧 '표적'이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경험했다고 해서 다시한번 그 이적을 재경험하고자 하는 육적인 욕망이 자신을 이끈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런 목적으로 예수를 따르고 주를 부르며 찬양하며 뒤를 졸랑졸랑 따른다고 믿는자가 아니다.
배부름이 아니라 예수가 생명의 떡인줄 알아보고 그 떡인 예수를 내 영혼의 양식으로 먹으려 달려드는 자만이 신자다.
이미 하나님 복은 우리 인간들에게 모두 주어졌다.
이제 그 복을 발견하는 자만이 그 내려진 복을 누리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는 작업이다.
그러나 내가 찾으려 해서 찾아지는게 아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가르쳐 주셨듯이 주님이 드러나게 하시고 찾을 수 있게 보여주는 것만을 얻게 된다.
더 보여지지 않는 것은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 이미 그것은 하나님 영역이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게 보여지는 것만큼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인생의 삶은 세상에 관련된 욕망에의 연출이다.
그렇기에 그 욕망은 사람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잡고 흔들며 지배하려 한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같은 환경하에서 겪어야만하는 고통중에 하나다.
신자라고 해서 세상의 갖가지 환경에 예외일 수는 없다. 인생에서 무공해적 삶은 없다.
동일한 환경에서 힘들고 어려운 여건이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제어할 능력이 믿음이다.
주님은 이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셨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일)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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