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문제와 사도 바울
박윤선박사 지음
머릿말
이 적은 책자는 방언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사도의 교훈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고린도전서 14장에 대한 중점적 해석이다.
필자는 근 일년 동안 이 문제를 마음에 두고 성경에 근거하여 심사숙고하였다. 이제 이것이 이와같이 적은 책자로 밝혀진 것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일이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많은 유익있는 책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1966. 8. 3. 금정산 아래서
지은이 씀.
목차
제1부 방언과 예언의 비교
1. 방언은 무엇인가?
2. 예언은 무엇인가?
제2부 방언 사용의 원리
1. 교회에서 사람(성도)들이 알아듣고 깨닫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 무익함.
2. 방언을 교회에서 말하면 교회연합에 지장을 줌.
3. 교회에서 기도할 때 방언을 위주로 기도하지 말것.
4. 깨닫지 못할 방언을 교회 상대로 하는 것은 교회에 벌을 줌과 같다고 함.
5. 깨닫지 못할 방언을 교회에서 하면 미쳤다는 말을 듣게 됨.
6.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이가 교회 앞에서 방언을 하려면 통역을 세우고하라 함.
7.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 것
제3부 방언에 관한 논쟁을 검토함
1. 현대에 참 방언이 있다는 학설.
2.고전 14장과 기타 성경 말씀을 지키며 방언하는 것을 기독교적 체험으로 용인하는 하는 학설.
3. 현대 교회는 방언이 있을 수 없다는 학설.
제4부 성령의 입신이란 것이 성경적인가?
방언 문제와 사도 바울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고전 제14장 전체의 장을 가지고, 그 때 고린도 교회의 난제 중의 하나인 방언문제를 해결하였다. 나는 사도 바울의 이 부분을 해석하고저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강요.
제1부 방언과 예언의 비교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 :1-5)
바울은 여기서 방언이 무엇이며 예언이 무엇임을 밝힌다.
1. 방언은 무엇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였다(2절 하반절).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함은 무슨 뜻인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영적 은혜로 (곧 기적적으로) 남들이 일아 듣지 못하는 외국 말을 한다는 뜻이라고 함(칼빈: 고전13:10 해석).
(2) 듣는 자들이 깨달을 수 없는, 영적언사(靈的言辭)로서 일정한 내용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F.W.Grosheide).kommentaar Op Het Nieuwe Trstament, Eerste Brief San Korinthe,pp.451- 452.
위의 어느 해석이 옳든지 간에 그것이 이적적으로 되어지는 말인 것만은 틀림없다. 22절에서도 그것을 가리켜 표적(세마이온)이라고 하였으니, 기적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런 이적이 교회시대에도 있을까?
교회 시대란 것은 계시시대(啓示時代), 곧 사도시대와 구분된 명칭이다. 사도 시대는 표준적인 이적과 계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시대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기 위하여 이렇게 터를 닦는 의미의 기본적인 사역을 하셨다. 그 시대의 이적이나 계시는 실상 주 재림 때까지 장성할 교회의 뿌리와 터전을 이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도의 사역을 가리켜 터 닦는 일로 비유하였다.
고린도전서 3:10절에 말하기를 "교회의 터를 닦아 두었다" 하였고, 11절에는 말하기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 말씀의 뜻은 ,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계시와 능력을 받아 복음을 나타낸 것을 의미 한다. 교회는 이 터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엡2:20; 계22:14).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도적 사역은 나무에 대하여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는 한번만 일정한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돋아 나온 나무는 그 요소에 있어서 뿌리와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그 능력도 여전하시지만, 그의 사역의 경륜은, 사도시대엔 그렇고 또 교회에는 이렇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이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온 다음에는 만나 내리시기를 그치셨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시대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에, 이는 마치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와 같으니 그 자라나는 도중에 다시금 뿌리의 형태로 자체를 거듭나타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는 그 뿌리를 의미하는 사도적 사역을 거듭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교회 시대에도 사도의 증표(證票)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다고 할지라도 특별섭리는 있다는 것이다(L,.Berkhof. Systematic Theology p.168).
특별섭리란 것이 계시사에 속한 것은 아니나 역시 하나님의 특수간섭이기 때문에 그의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병자를 위하여 기도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과 사도의 행한 이적과는 다르다. 가령, 병 고침 받는 실례(實例)를 들어 말하면 ①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은, 취급된 병자가 모두 치료 되었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神癒)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 은혜로 치료되는 자도 있거니와 치료되지 않는 자도 있다. ②그 뿐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으로 고침 받은 병은 재발하는 법이 없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 병이 재발 되는 경우도 있다.
③ 예수님과 사도들이 고친 병자들의 몸은 당장 완전해지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다. 위의 세 가지 사실은 교회 시대의 신유의 특징들을 보여 준다. 이러한 특징들이 있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시대는 약하여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역 경륜(經輪)의 이와 같은 차이점은, 특별히 교회의 터가 되는 계시시대(예수님과 사도의 시대)의 표준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및 사도적 전도 내용(성경)을 표준으로 하고, 거기서 안식(安息)해야 되는 것이다. 만일 교회시대에 있어서 역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혹은 사도들과 같이 표준적인 이적을 행한다면 그들도 역시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있는 계시도 받는다고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과 성경만 기초로 한 기독교의 성격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방언을, 사도들의 사역으로 나타났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방언운동에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난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해야 된다. 다만 방언을 함이 자기에게 유익한 줄 아는 이는 고전14장의 교훈을 지켜야 될 줄 생각한다.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預言)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 예언(預言)은 무엇인가?
맡을 예(預), 말씀 언(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역. 교회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안위한다고 한다. 사도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豫告)하였다(행11:28, 21:11). 그러나 그들도 (혹은 그들 중 어떤 이들)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계시사역을 하였으며(고전14:3), 이런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진리를 해명하기도 하였다(롬12:6).
그들의 사역도 사도들의 사역과 함께 신약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엡2:20;고전12:28). 이 점이 방언하는 자와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고, 은사의 미말(尾末)에 속하다(고전12:10,28).
그러나 예언(預言)사역은 사도의 사역처럼 계시시대(사도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직(單回職)에 속한다. 교회시대에는 예언의 후신(後身)으로서 설교가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양자(兩者)의 기능이 같기 때문 이다. 예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기능으로 한 것인 만큼(고전14:3),설교도 그러하다. 다만 예언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찾아 왔으나 설교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 말씀(성경)께로 나아가야 한다. 곧,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라는 말이다. 설교자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다(고전4:1,2; 딛 1:7).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기독교의 터를 닦는 자가 아니고, 사도와 선지자가 닦아 놓은 터(고전3:10~11),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설명(성경)을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이다.
설교자는 (1) 맡기운 터와 자재(資材) 곧, 성경을 그대로 보수(保守)할 책임이 있고, (2) 또한 그 터와 그 자재(資材)를 가지고 집 지을(교회 세울) 책임도 있다. 설교자가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설교자는 말씀을 전파 할 때에 자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설교할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 현대교회에도 사도시대의 것과 같은 예언(預言)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이런 주장을 아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 같은 것이 오늘날도 나타난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
(1) 그 예언(豫言, 預言)이 맞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배척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2) 그 예언이 사실과 부합할 때에는 우리로서 그것을 거부(拒否)하기가 곤란할 듯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 들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① 그 예언이 맞아도 그것이 거짓된 예언일 수 있으니(申13:2), 하나님의 명령대로(요일4:1), 착실히 영들을 시험하며 지나 보아야 된다. 그것을 시험하며 지나보는 일이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신자가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행동이다.
申13:1~3에 말하기를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異蹟)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하였다.
② 사단의 사자도 복음을 높이는 체 하며(행16:16~17), 또한 도덕이 있게 사람을 대할 수도 있다(행11:14~15; 마7:15). 우리가 이렇게 현대의 예언이란 것을 시험해 봄이, 우리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현대의 예언보다 성경이 권위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롬15:4).
제 2부 방언 사용의 원리
1.교회에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 무익함.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ㄹ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없는 소리는 없나니,"(고전14 :6-10)
신자가 복음을 명백히 말하지 않음은 교회에 무익하다. 생명 없는 악기(樂器)도 분변 있는 음성을 내는데 어찌 생명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식별(識別)되지 못할 말을 하고 있으랴(7절). 그뿐 아니라 짐승들도 소리를 뜻 있게 내는데(10절), 사람들로서는 그리하지 않아서 되는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하는 이들을 이렇게 심각하게 주의 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연관(聯關)되는 말씀은 8절의 말씀이니, 곧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이다. 독실한 신자들이 교회에서는 복음만 명백히 나타내야 된다. 그렇게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된다.
1.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치중하지 않아야, 복음의 나팔 소리가 분명해짐. 무슨 일에든지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을 혼동하면, 그 일은 틀린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하는 신자들은 방언을 과중시하여 남들이 모르는 말을 회중 앞에서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을 시정 시켰다. 그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은사(恩賜), 곧 방언을 지나치게 너무 내세웠다.
2.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복음의 나팔이 분명해짐.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다 밝히 드러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후4:3)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였다(롬10:8).
기독교는 가장 깊은 복음의 오묘를 밝히 드러낸 사실을 그 특징으로 한다. 엡3:9에 말하기를 사도의 직분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벧전1:12참조).
우리는 환하게 나타난 복음의 사실들을 받아들여 그대로 살기에 주력할 것이고, 논쟁점을 가지고 지나친 노력을 할 것은 없다. 신29:29에 말하기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주요히 관계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벌써 나타낸 예수 그리스도 사건(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 것)을 가르치는 성경말씀이다. 그런데 이 밝히 드러난 하나님 말씀의 단 맛은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만이 느낀다. 우리가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신종하기를 위주하지 않다가는 샘 곁에서 목말라 죽고 곡식이 가득한 창고 속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이 된다.
2. 방언을 통역이 되지 않은 채로 교회에서 말하면 교회의 연합에 지장을 줌.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 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고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14 :11-16)
기독신자가 교회 상대로는 회중에게 유익한 것만 내 놓아야 된다.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방언(方言)을 교회에서 말하면 그 말하는 이와 듣는 회중과의 사이에는 야만(野蠻)의 관계가 생긴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화합과 융통은 서로 주고받는데서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방언하는 이가 자기도 모르는 말을 회중에게 하면 영적 은혜를 전달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피차 멀어진 느낌만 준다. 그런식으로 방언을 함은 교회에 해롭다. 그것은 사랑(신자들끼리의 연합)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가리가 되고"라고 하였으니, 은사(방언의 은사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사랑이다(고전13:1). 기독신자가 깨닫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에서 하면 도리어 사랑을 깨뜨리니 이 얼마나 모순되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하는 신자들더러 그들이 기도할 때에(혹은 찬미할 때에), 영만이 아니고(영으로 하는 말은 알아 듣는 자 없음, 고전14:2) 마음으로도 말함(지각에 알려지게 말함)을 원한다.
3. 회중을 상대로 방언을 사용하지 말 것.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 :18-19)
바울은 여기서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의 비중(比重)이 방언보다 얼마나 큼을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교회 앞에서는 언제나 방언은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말할 바엔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은 마음으로 말할 수 밖에 감히 방언으로는 절대로 말 할 수 없었겠다. 현하 우리는 방언을 위주로 교회에서 말 할 수 없다.
(1)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친히 방언(方言)을 하셨다는 말씀은 성경에도 없고 교회 역사상 가장 빛나는 지도자들이 거의 전부 방언(方言)을 하였다는 말이 없거니와 물론 그들이 이것(방언)을 위주로 교회에서 방언을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2) 교회에서 방언을 위주 하면 결국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기이(奇異)한 것을 탐하기를 즐겨한다. 누가 어떤 곳에서 성경을 가지고 기독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친다 할찌라도 그 부근에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의 마음이 거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영혼을 이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신다.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이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노라"(고전1:22)라고 하였다.
(3) 방언(方言)을 위주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預言)"도 고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필경 저마다 계시(啓示)를 본다하며 꿈을 숭상하고 기타 여러 가지로 숨은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다. 예언(豫言)을 위주하는 곳에 필경은 그릇된 예언(豫言)들이 많이 터져 나오게 되어 마귀역사의 온상을 이룬다. 마귀는 언제든지 교훈이 불건전한 틈을 타서 역사하는 법이다. 사도 바울은 교훈의 건전성을 많이 주장하였다(딤전 1:10, 6:3; 딤후1:13, 4:3; 딛1:9,2:1,2). 이 귀절들 중에서 그가 주장한 "바른 말" 혹은 "바른교훈"이란 것은 건전한 교훈을 말함이다. "건전한 교훈"이란 것은,"건강한 교훈" 을 말함이다. 사람의 체격이 건전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머리 있을 자리에 머리가 있고, 손이 있을 자리에 손이 있고, 귀가 있을 자리에 귀가 있고, 발이 있을 자리에 발이 있어서 질서정연(秩序整然)한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가 교회에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가 바뀌지 않고 각기 제 위치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교훈이 건전하다.
4. 교회에서 회중을 상대로 깨닫지 못할 방언을 교회 상대로 하는 것은 교회에 벌을 줌과 같다고 함.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4:20-21)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은근히 꾸짖는다.곧 방언(方言)을 교회(敎會)에서 하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만큼, 그것은 회중에게 벌을 줌과 같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일찌기 이사야(율법(律法)이란 말은 이사야서를 의미함)의 예언(預言)에, 알아듣지 못할 말로 말하는 것은 벌주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사28:11).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의 교훈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필경, 앗수르 사람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어 깨닫지 못할 말(앗수르 말)로 그들을 압제하며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예언(預言)하셨다(사28:9-13).
5 통역되지 않은(깨닫지 못 할) 방언을 교회에서 하면 미쳤다는 말을 듣게 됨.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2-25)
방언하는 이가 신자들에게 방언하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전14 :5-6).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란 말이(22절) 그 뜻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방언하는 이의 방언이 불신자들에겐 표적(σημειον=세마이온) 곧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것이어서 (눅2:34) 그들의 비난거리(미쳤다고 함)가 될 수 있다(고전14 :23).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란 말씀이 그 뜻이다.
6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하는 이는 교회 앞에서 하려면 통역을 세우라고 함(고전14 :26-28).
사도 바울이 이렇게 지시한 것은 후대 교회보다 그 때 초대교회의 실정대로 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대 교회의 방언이 사도들의 사역으로 나타났던 그것과 같은 수준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삼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말하기를 "방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 방언인데(천사의 방언은 아님), 죄악의 영향을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① 그는 계속하여 또 말하기를 "방언의 이적이 오순절에는 완전하게 나타났으나 그 후에는 불완전하여졌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받는 은혜가 처음에 중생의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그 후에는 불완전하여졌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받는 은혜가 처음에 중생의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그 후에는 비교적 현저하지 않은 영력(靈力)만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And this was wrought by the Holy Spirit gave them utterance. They Spoke a heavenly Language to praise God - not of angels, but a Language above the influence of sin. -The Work of the Holy Spiriy, p.138.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이후의 첫 오순절에는 완전한 방언의 이적이 나타났고, 그 후에 지방 교회에서는 비교적 약한 분량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교회시대(특별히 현대)의 방언운동에 대하여 한 가지 주의해야 될 것은 위에서 카이퍼A .Kuyper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사도적 사역의 왼전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적 이적은 병자를 고칠 때 그 취급된 병자를 고칠 때 그 취급된 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여 어떤 병자는 고치나 어떤 병자는 못 고치는 정도이다. 오늘날 방언의 성격도 그런 정도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된다. 사도의 직접 지도가 없는 지금(교회시대)에 있어서 방언의 성격의 진위(眞僞)를 참으로 알 분이 누구이기에 교회에서 방언을 통역에 의하여 공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의문점이다. The Work of the Holy Spirit P .134-135.
7.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 것(고전14 :39절).
사도 바울의 이 권면은 위에 기록된 6~28의 가르침의 모든 규례에 의하여 교회의 공적 질서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것 뿐이다. 방언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靈)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靈)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고 한 말씀을 지켜야 된다.
성경은 성령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존중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화를 참되이 보존하는 길이다. 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영(靈)들을 시험하라"고 까지 하였으니,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인가? 시험해 보기까지 분변하는 행위는 결단코 불신앙이 아니고 오히려 경건이다. 우리가 방언을 아무 분변없이 마구 받아들일 때, 거기에는 마귀의 역사도 받아들이게 되어지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神靈)한 은혜의 진위(眞僞)를 분변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성경을 떠나서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分辨)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성경을 표준해야 된다. 성경을 떠나서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分辨)할 수 있을까? 진리 판단의 표준은 언제나 어디서나 오직 성경이다.
★"이적(異蹟)"을 행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가 반드시 언제나 진리를 바로 분별할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마귀도 어느 정도 이적(異蹟)을 행한다(마24:24, "거짓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 누구가 병을 고친다고 하여 그는 언제나 진리를 옳게 분변할 것이라고 하지 못한다. 우리가 확실히 알기로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을 고치셨고 그들이 전도한 말씀은 진리이다. 오늘 교회 신자들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병이 고쳐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교회 시대에 기도나 안수로 병 고치는 일이 있다고 하여서, 모두 다 신임할 수는 없다.(그 중에 혹시 신임할 것도 있지만), 어떤 때엔 사람의 병이 이상하게 고쳐지는 수도 있다고 한다. 대단히 어려운 병(위궤양, 반신불수, 신경통, 소경(시각장애), 절름발이, 귀먹어리, 벙어리, 피부의 내솟김)들이 마음 깊이의 억압된 감정이나 죄감 때문에 생기는 수도 있는데, 이런 병들이 혹시 그 병자의 심리조절에 의하여 고쳐진다고도 한다.
③ 그러므로 병 고쳐 준 사람의 말이면 성경 말씀의 권위와 같은 줄 알면 절대 안 된다. C.Stegall,The Modern Tongues and Hesling Movement,p.27.
★ 누가 어떤 고상한 영적 체험을 하였다고 하여 그는 언제나 진리를 바로 분별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체험에는 오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어찌 그것을 성경 권위와 동일시하랴? 진리 판단의 권위는 성경 밖에 없다.
제 3부 별고(別考): 방언에 관한 논쟁을 검토함
성령의 은사로 성도에게 성령 하나님의 임의로 주어지는 방언문제는 하나의 난제이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기타 모든 나라에서 이 방언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변론이 끝나지 않는다.
1. 현대에도 참 방언이 있다는 학설.
(1)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하퍼(Michael. C.Harper)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① 방언의 은혜는 원하는 자는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하였다(고전 14:30). 그리고 ②하퍼(Harper)씨는 또 말하기를 신앙이 많이 장성한 사람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일이 있으니 , 방언은 신앙이 성숙한 표가 아니라고 한다.
(2) 존 스토트(John R.W.Stott)는, 영국 성공회 학자요 설교자로서 현대 교회에 방언이 있다고 하며 그것이 성령을 받은 필연적 표적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방언을 신자마다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3) 프린스(Derek Prince)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군대 생활을 하던 병사(兵舍)에서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방언이 기도생활을 돕는다고 한다.
(4) 크리스텐손(Lerry Christenson)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루터파 목사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방언을 하는 것이 반드시 성령받은 증표는 아니로되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로 방언을 구하면 받는다고 한다.
2. 고전14장과 기타 성경 말씀을 지키며 방언하는 것을 기독교적 체험으로 용인하는 학설.
칼빈주의 신학자 리드 박사(Dr.W.Standford Reid)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모든 방언한다는 주장을 반드시 의심스럽다고 하기에는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킬 수 없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꼭 어떻게 행하셔야만 된다고 지정(指定)할 수는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생각하기를 방언하는 일에 관하여 다만 그것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볼 규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전14장 첫 부분에 이를 시험해 볼만한 규칙을 말해 줍니다. 방언을 하는 신자는 고전14장의 원리를 지키며 또한 요일 4:1-3의 진리를 따라 모든 신들을 시험해 보아야 되며 교만하지 않아야 됩니다. 방언은 언제든지 기독교 전도에 부차적(副次的)인 것입니다. 위은 모든 조건들을 잘 지켜 가면서 방언을 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순전한 기독교적 체험이라고 하겠습니다.물론 그것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체험입니다."라고 하였다(1966.2.7).
스콧티쉬 개혁협회(The Scottish Refomation Society)의 총무인 호온목사(Rev. A. Sinclain Horne)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말하였다. "박윤선목사님의 편지에 기록된 교회의 난제인 방언 문제는 바로 우리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도 꼭 같이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이 문제를 취급해 보았으나 방언을 대번 정죄할 것이라고 확신이 되어지지는 않습니다."라고 한다. (1966.2.5. 나(박윤선)에게 온 편지).
미국 콜롬비아 신학교 교수인 휴스박사(Dr. P. E. Hughes)는 칼빈주의신학자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방언운동에 있어서 만족치 못한 신학적 설명을 하는 것과 또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도록 하려고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여 혹종의 소리를 내라고 장려하는 것 같은 것은 성신 충만을 위한 기도보다도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더 노력하는 것이니, 그것을 찬동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나는 방언 체험을 한 분들의 집회에서 경건과 기쁨의 정신이 나타난 것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1966.2.17. 박윤선 내게 온 편지).
3. 현대 교회에는 방언이 있을 수 없다는 학설.
①고전 13:8-10에 근거하여서 현대교회에는 방언이 있을 수 없다고 함. 고전13:8-10에 말하기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다.
여기 "온전한 것"이 계시(啓示)의 완성, 곧 성경을 의미한다고 하면. 이 부분의 말씀의 뜻은 성경의 왼성(제1세기 안에 완성) 후 방언은 폐지되었다는 것이겠다. 그러면 문제는 "온전한 것"이 과연 성경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난제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 이른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도 말 한다(Dean Alford, Barnes, Ellicott). 이 해석이 옳다면 방언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폐지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 해석도 꼭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것이 또 한 가지 해석 때문이다.
칼빈(J. Calvin)은 여기 이른바 "온전한 것이 올 때"란 말은 죽은 뒤에 오는 것 곧 천당(天堂)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이 해석을 취한다면 바울이 여기서 이 말로써 자기와 및 그 당시 기독자들이 별세하여 천당에 들어갈 때를 의미하였다고 할만하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 부분에서(특별히 9-10절) "우리"란 말을 사용하며 말하기 때문이다. 이 해석이 옳다면 방언의 은사(恩賜)는 바울이 별세시에 그친다는 뜻이 나올 듯 하다. 그러나 나(박윤선)는 이 해석이 옳다고 아주 확실하게 단언하지는 않는다.
② 현대엔 참 방언이 없다는 학자들은 말하기를 현대 신자들의 방언은 흥분된 심리 조절을 못한 결과라고 함.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신경계통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고등신경으로서 뇌에 있고 다른 하나는 하등신경으로서 위(胃)의 밑에 있다고 한다. 인체에 있어서 보통으로는 뇌 신경이 주장하는데 만일 하등신경이 주장하게 되면 방언 같은 것이 나온다고 한다(Lohman).
물론 신경계통이 고장이 나면 사람이 허실부실해지는 일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방언을 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없다. 현하 영국의 어떤 기독 신자는 20년 동안 방언을 말하는 체험이 있다고 하는데 흥분되는 일도 없이 똑똑한 말을 하게 되며 자기 자신에도 유익하고 남에게도 유익을 준다고 하였다.
③ 영국 학자 와커(J.W.Walker)씨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그의 저서 "오순절 주의를 검토함"(Pentecostlism Examined)이라는 소책자에서 현대교회에는 참된 방언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신약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들은 사도적 사역의 증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사도들의 특권(Apostolic Preorgative)라는 것이다.
④ 침례교 목사 구-루(Eric T. Gurr)씨는, 그의 저서 "나팔소리"(The Sound of Trumpet) 라는 작은 책자에서 역시 "현대 교회의 방언"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특별히 역사상의 유명한 성도들은 방언을 한 일이 없다는 이유로 현대 교회의방언을 시인(是認)할 수 없다고 한다.Baptism In The Holy Spirit,pp.20-21.
⑤ 모시만(Eddison Mosiman)은, 자기의 저서 "방언" (Das Zungenreden,1911)이라는 책에 모든 방언을 초자연, 곧 기적과 관련시키지 않고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그노시스파 사람들 중에서도 방언을 말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방언을 기록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면서 방언의 원인을 순연히 자연주의의 처지에서 설명하였다. 곧 질병(Krankheiten)이 그 원인이라고도 하고, 혹은 마취(Narkotischen Einflussen)의 영향이 그 원인이라고도 하였다.Das Zungenreden,pp.86-90.
그리고 그는 교회 역사상에 있는 방언이나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방언이 다 함께 자연주의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시만(Mosiman)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잘못이다. 신약에 기록된 방언은 성령의 은사였다(고전12:10; 행2:4, 10:45-46, 19:6). 그뿐 아니라 교회시대에 나타난 소위 "방언"들 중에도 거짓된 것들도 있지만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 전연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제 4부 입신(入神)이란 것이 성경적인가 ?
현하 한국 교계에는 "입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서 남들로 하여금 "입신"상태에 들어가게 한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이나 성경으로만 그 시비(是非)를 분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참된 종교는 인간의 권위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권위를 따르는 것은 참 종교는 아니다. 참된 종교는 인간의 권위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권위를 따르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 권위로 믿는 참 종교이다.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권위로 믿는 참 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신자들은 "입신"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성경으로만 분별해 낼 수 있다.
(1) "입신"이란 것은 성경에서 주장한 바가 없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간 체험은(고후12:2), "입신"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비교표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감
①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것은 뜻밖에 한번 그렇게 되었고 그것을 위주하지 않았음(고후12:5).
②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것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임(고후 12:2-3).
현대의 소위 "입신"
① 현하 "입신"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런 체험을 남들에게 장려함. 그러나 성경에는 "입신"이란 말도 없는데 그것을 사람이 주장함은 진리가 아님.
② 현하 "입신" 이란 것은 사람이 뜻을 정하고 남들로 "입신" 되도록 공작함. 그러나 이것은 월분(越分)한 행동이다.
"입신"이란 것은 신플라톤학파(Neoplatonism)에서 주장한 것이며 범신론(汎神論)에 속한다. 그것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이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신다(고전1:3).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어떤 공작에 의하여 하나님의 세계에 돌입(突入)하는 일이 가능한 듯이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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